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문밖에 서 있었기에 (요 18:12-18)

첨부 1


한국교회는 우리 민족 앞에서 자랑스런 역사가 많습니다. 그 중의 하 나가 한국교회가 주축이 되어 일어났던 삼일운동입니다. 1919.3.1. 그당시 천도교 200만 유교 불교는 300만을 넘어서는 교세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독 교의 교세는 인구 2,000만에 35만명 신자 곧 1.2%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민족대표 33인중 16인이 기독교인이었고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자가 기독교인이 2,039명 천도교인 1,063명 유교인55명 불교인 41명으로서 기독 교인이 60%이상을 차지했던 것이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볼 때 당 시 교회는 비록 교세는 보잘 것 없이 작았으나 민족의 미래를 움직일 수 있 는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그로부터 73년이 지난 날입니다. 오늘 이 나라의 현실은 다시한 번 교회의 사명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 리에게 주신 믿음이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과 사회 그리고 이 민 족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사명이 있기도 합니다. 삼일 운동은 절대 과거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그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이 민족의 문제는 커녕 우리 자신의 문제 해결 도 제대로 못해 부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 사회의 문제를 걱정하 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한다고 할 때, 세상사람은 '당신들부터 바로 살 아 보시오'하고 빈정거리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 다. 저는 오늘 삼일절 기념 주일을 맞아 주신 본문에 의지하여 이 시대를 책임져 나갈 성도의 신앙자세를 증거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베드로의 실패를 읽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을 따른 지 3년동안 항상 예수님의 수제자 노릇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고, 진심으로 예수 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말 예수님의 힘이 되어 주어야 할 그 때 에, 어처구니 없이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번씩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왜 이렇게 나약해지고 말았습니까 우리도 이와같이 될 가능 성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의 실패 원인을 알아야겠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신앙적으로 위험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붙들려 대제사장의 집으로 갔을 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예 수님을 뒤따라 갔었습니다. 마 26:58에 보면 이때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 갔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말 속에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징조가 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대제사장의 집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우물쭈물했습니다. 같이 갔던 요한은 대제사장과 안면이 있는 지 라 예수님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께서 심문당하실 때 그 곁에 있 었지만, 베드로는 그만 문 바깥에 그냥 머무르고 만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 모르고 당황해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위험한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 자리는 예수님과 점점 멀리 떨어진 자리였습니다. 예수 님과 멀어지면 사탄은 시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은 그사실 을 몰랐습니다.

 한 친구는 자신의 신앙고민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계 신다고 인정하자니 너무도 확신이 없고 그래서 안 계신다고 뒤돌아서자니 분명히 뒤에 계신 것 같아 불안하다" 이와같이 갈등을 겪고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자세가 분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실패자가 되 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 지 분명히 확인 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주님과 가까이 잇습니까 아 니면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까 문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문밖에 있습니까

베드로의 실패는 결코 갑자기 닥쳐 온 것이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 다. 점진적이었습니다. 한번 자리를 잘못잡으니 자꾸 문제가 생기게 되고 결국은 예수님을 파는 데 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지 못함-멀찍이 좇아감-문밖에 서있음-계집 종을 만남-계속 예수님을 부인 함

둘째 베드로는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사실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지 도무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지실 것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씀하셨음에도 베드로나 제자들은 막상 그 일이 닥쳤을 때, 전혀 기억에 나지 않았던 것같습니다.

 바로 이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우리가 깨닫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신앙생활에 힘과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신앙생활에 문 제가 있는 교우들은 결국 그들이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의 은혜, 십자가의 능력을 모르기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능력-십자가 설교와 신앙의 능력이었습니다.

심방 길에 어느 권사님 "교회에 열심히 나와야 구원받지" 설교의 좌절감 듣고도 모른다. 구원의 진리를 제대로 설명할 자 몇명 입니까 한국교회 초창기 한 부인 남편 미국 유학 새벽기도 만주 봉천에 남 편과 이혼 하나님 저주 그는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남편을 믿은 것 말씀을 좀 안다는 경우에도 생활로 배운 것이 아니라 머리로만 배운 까닭에 스스로 모순투성이의 생활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제일 문제가 되는 성도는 신앙생활을 상식으로 하려는 것입니다. 상식 으로는 십자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상식으로는 부활을 이해 할 수 없습 니다. 말씀은 없이 상식만 늘어 났기에 그 신앙생활은 세상사람 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이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복시기에 문제가 없으나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는 이해가 되지 않아 야 정상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무리들은 자신들이 잘한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는 이 엄청난 일을 하면 서도 자신들이 옳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이유는 그들이 무지했기 때문입니 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실 때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바로 몰라서 예수님의 마음에 못을 박는 성도가 있습니다. 자신은 모릅니다. 이것이 참으로 문제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은 왔는 데 그속에 십자가의 말씀 이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지금 내 문제가 아닌지 물어 보셔야 합 니다.

말씀이 우리 속에 임하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말씀으로 천지창조 가 이루어졌고, 죽은 나사로에게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이 임할 때에 죽은 자가 살아 났고, 병든 자가 주님의 말씀으로 고침을 받았으며 베드로가 바 다 위를 걸었고 사도들과 선교사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해질 때 민족의 운명 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삼일 만세운동이 교회를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갔던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 평양을 중심으로 전국교회에 확산되어진 사경회의 영향이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는 교회에서 성경말씀을 배우기 위해서 일주일이고 한달 이고 교회에서 모여 집회를 가졌습니다. 그 열기는 참으로 대단했던 것같습 니다. 그때 가장 애독되고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성경공부는 출애급기, 에스더서 같은 성경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출애급 사건을 배웠고 다 윗의 왕국과 이스라엘의 바벧론 포로이야기와 회복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러면서 우리 민족의 아픔과 소망을 함께 읽었던 것입니다. 성도들이 믿음의 눈을 뜨기 시작했습니다. 소망을 가졌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아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세째는 베드로가 정말 사는 길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 의 당부를 잊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어드려 하는 자는 잃고 잃고 자 하는 자는 얻으리라 하셨습니다.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우가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신 앙으로 살기로 결심한 우리들의 승리 비결 1호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우리를 지키려 할 때는 한없이 약한자가 됩니다.

내가 날 마 부유하게 하려 할 때는 우리는 가난하게 됩니다. 신앙을 바로 실천할 수 없습니다. 나 하나 살겠다고 할 때 모두 죽게 됩니다.

축복문제 하나님의 인격성 기쁨과 슬픔이 있음 축복받을 조건이 있다-그런데 알아야지

에스더서를 읽어 보면 바벧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이 하만 이라는 그 나라 총리의 미움을 사서 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나라 왕비 는 에스더라는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민족을 감추고 잇엇 습니다. 민족이 다 죽게 되었을 때 그 오빠인 모르더게가 에스더 왕비에게 편지하기를 "너는 왕궁에 잇으니 모든 유대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고 생각 지 말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아느냐"고 했습니다. 그때 에스더 왕비는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하고 왕에게로 나아가 자신의 동족의 생명를 건져 달라고 담대히 구하여 민족을 건지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도 하나님께 나의 생명까지도 다 맡기는 분명한 결심이 없이는 신앙의 승리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붙들고 살 때 그는 베드로 처럼 실패를 맛보기만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부정없이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했으므로 게집아이 하나의 말에도 무서워 떨었습니다. 정말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주는 귀한 교훈, 성도는 온전한 믿음에 서 있지 못하면 약하다는 사실-얼마나 무섭게 들리는지!

어떤 분은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왜 세상을 무서워 합니까 마치 당 신의 생활비를 세상이 주는 줄 착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왜 세상 고용주나 상관이나 거래처 사람마의 비위를 맞추느라 쩔쩔매십니까 물론 인간관계가 원만해야 하겠지만 진정 신경을 써야 할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모르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해도 상관이 없습니까 내 힘으로 살려고 하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 참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민족을 위기에서 구원할 성도가 되려면 우 리의 신앙자세를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번째 부인했을 때, 얼마나 크게 부인했을까요 당황하면 그렇게 됩니다. 눅 22:61 그때 에수님께서 부인하는 베드로를 돌 아 보셨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결국 나를 부인하였느 냐' 그순간 베드로는 걷잡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 그만 쓰러져 울었다고 했 습니다.

 우리도 생활 중에 예수님을 부인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꼭 말로 부인해야 부인한 것입니까 다른 사람 앞에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 처럼 말하고 행동한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내 생각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결정 함으로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부인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때마다 우리를 보시는 주님의 얼굴을 보셔야 합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내 생명을 주었건만 넌 날 위해 무엇주느냐'

베드로는 실패를 통하여 깨달았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있었습니다.회 개가 없는 사람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가룟유다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남 의 연약함을 이해못하는 사람은 독선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실패를 허락 하시는 이유는 교만의 뿌리를 제거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사탄이 자꾸 우리 를 흔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예언하실 때 "사탄이 밀 까부를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했습니다. 사탄의 역사는 참 성도 와 쭉정이 성도를 가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넘어가서는 안될 것입니 다.

 우리 어깨에는 민족우가 문제가 있습니다. 세계의 문제가 우리의에 있 습니다. 우리부터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 중심이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 다. 성령의 사람인지 확인 해야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