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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자녀에게 가르치라 (신 11:18-21)

첨부 1


유교를 할아버지의 종교, 불교를 할머니의 종교라고 한다면 기독교는 어린이의 종교라는 말이 있다. 이런 표현이 무색하지 않게 한국교회 성도의 80%는 유년주일학교 출신이며, 목사의 97%와 목회자 아내의 99%, 그리고 장로 집사의 95%는 모두가 교회 어린이 교육의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라는 통계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오늘을 어린이 주일로 지키는 것은 교회의 장래를 위하여 크나큰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어린이날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나친 과보호속에서 자라나는 우리 어린이들,그런데 이 어린이 날이 그런 어린이의 과보호를 더욱 더 부추긴다는 지적이다.

중세기 유럽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제일 먼저 교회로 데려가서 세례를 받게 했다고 한다. 그때 신부는 아기의 부모와 대부 대모에게 이렇게 명령을 한다. “이 아이가 일곱살이 될 때까지 물과 불,그리고 말 발굽과 개의 잇빨에서 보호하고 그 다음에는 슬하를 떠나게 할찌니라”라는 세례문을 읽었다고 한다. 이러한 관습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서양의 자녀 교육은 우리와 비교하여 상당히 자립적이며 책임감을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자녀 교육에 관한한 많은 혼란 가운데 있다.

1.많은 부모들이 자녀 교육의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
어린이 교육의 목적이 상실된 시대를 살고 있다.
얼마전 주한 미군 미국인 학교에 많은 기부금을 내고 한국 어린이들이 공부하고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우리가 그 일에 대하여 분노하는 것은 과연 그 아이들이 한국인인지 아니면 미국인인지,한국인으로 키우려는 것인지 미국인으로 키우려는 것인지 자존심이 상한다는 말이다.

너나 할 것없이 자녀 교육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그러나 대부분 목적없이 남들이 다 하니까, 내 자녀도 해야한다는 식의 욕심에 지나지 않는 것을 본다. 더우기 심각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분명한 목적을 상실한채 우왕좌왕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적인 예를 들겠다 바다에서 고기 잡으며 살아갈 사람에게는 인격적인 여러가지 교육 이외에 바다를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농사를 짓고 살아야 할 사람에게는 농사를 가르쳐야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사람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2.자녀를 수단으로 생각하는 부모들이 많이 있다.
오늘날 자녀들은 부모들의 욕구를 대리 충족시키는 하나의 수단(도구)으로 전락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부모의 영광을 위하여 수단으로 전락한 어린이들부모를 위하여 밤낮 수고하는 어린이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많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기를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듯이,우리들에게 자녀를 기업으로 맡기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기업을 최선을 다하여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업으로 다듬어 가야 한다.이일에 대하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이런 세태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녀를 가르쳐야 하는가
자녀교육의 올바른 동기와 그 목표를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1.먼저 오늘 분문은 철저한 말씀의 교육을 명령하고 있다.
본문은 “이스라엘아 들으라”라는 말로 시작되는 신6:4의 유명한 “쉐마”의 내용이 그대로 반복되어 있는 말씀이다.
유대의 전승에 따르면 경건한 이스라엘의 가정에서는 신명기 6:4절 이하의 말씀을 벽에 걸어놓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자녀들과 함께 암송한다고 한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자녀교육의 중심철학이요 근간이 되고 있다.

본문 18절에 보면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간혹 사진을 통해서 경건한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그들은 이 말씀처럼 손목이나 이마에 가죽으로 만든 성구상자 매달고 기도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말씀을 문자적으로 준수하고 있지만,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과 뜻에 간직하라는 말씀이다.

19절/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자신이 이말씀을 마음에 새길 뿐만 아니라 자녀에게 이와같이 가르치라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교육은 철저하게 본을 보이는 교육이었다.
자녀에게 가르치기 전에 먼저 철저하게 자신을 가르칠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말씀을 내 손목에, 미간에 붙이면서까지 우리 마음에 새겨야 한다. 왜냐하면 자녀들은 부모의 말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헹동을 보고 느끼기 때문이다.

여기 19절의 말씀을 잘 관찰하여 보면 집에 앉았을 때와 길에 행할 때에 가르치라고 하고 있다. 즉 집에 앉았을 때라는 것은 가정에서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리고 길에 행할 때라는 것은 집 밖같에서의 교육을 의미한다./ 또 누웠을때,일어날 때에도 가르치라고 하고 있다.즉 밤에도 가르치고, 낮에도 가르치라고 한다. 심지어 네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고 했다. 집을 나서면서 보게하고, 외출하여 들어오면서 그것을 읽고 되새기게 하라는 말씀이다. 장소와 때를 가리지 말고 이말씀을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모습이 오늘 우리 자녀들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생각되지 않는가 우리 자녀들은 집안에서는 숙제해야 하고,밖에 나가서 학원 다녀야 하고,낮에는 학교에서, 밤에는 개인과외를 해야 한다.요즘 학생들은 부모님에게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 선생님에게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는 것.

이것이 아니다. 먼저 말씀을 이렇게 가르쳐야 한다. 신앙의 기초를 먼저 놓아야 한다는 말씀이다.가정에서 부모들이 신앙의 경건한 본을 보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교회학교를 통하여 자녀들의 신앙인격을 다듬어 가야 할 것이다.

2.성경이 이렇게 철저하게 말씀을 가르치라고 명령하는데 그 이유는
드러면 성경이 이렇게 철저하게 말씀을 가르치라고 명령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살펴본 18절이하의 말씀은 “이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되고 있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고 집에서나 길에서나 밤이나 낮이나 자녀에게 가르치라고 하고 있다.

그 이유가 이러므로라는 접속사 앞부분에 나타나 있다. 그렇게 철저하게 가르쳐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10절 이하에 나타나 있다.

10절 이하의 말씀에서 가나안 땅의 특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 땅의 특성 때문에 그렇게 철저하게 말씀을 가르치고 강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1.자동적으로 풍요가 주어지는 땅이 아니다라고 말씀한다.
10절/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 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성경은 그 가나안은 애굽땅과 같지 않다고 말씀한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늘 에굽을 바라보고 동경하였던 것처럼 애굽은 참으로 풍요로운 곳이 아니었나
(창13: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땅과 같았더라
여기서 애굽땅을 여호와의 동산에 비유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그만큼 그 애굽땅은 풍요로운 땅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가나안은 애굽땅과 같지 않다고 본문 말씀이 강조하고 있다./ 흔히 생각하는 그런 유토피아, 낙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우기 그 가나안 땅은 인간의 노력으로(인본주의 적인 생각) 살수 없는 땅이라고 말씀한다.
다시 11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 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애굽에서는 파종한 후 물대기를 하였다고 한다./즉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다는 말그러나 가나안은 어떠하다고 하는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한다.천수답이라는 말이다. 하늘이 비를 내리면 농사를 지을 수 있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땅이라는 말씀/이것이 가나안 땅의 외적인 조건이다.

2.그러나 그대신에 그곳은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다.
1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하나님이 권고하시는 땅, 하나님의 눈이 머무는 땅이다.-다스리는 땅/간섭속에 사는 땅./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된 삶을 사는 땅

이말은 그 땅에만 들어가면 무조건 축복만 누릴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하나님을 인정하고 순종할 때 복을 주시지만, 잘못된 길로 갈 때 그냥 방관하시지 않는다는 말씀이다.
약속의 땅의 양면성을 알아야 한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퉁치와 징계가 있는 땅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왜냐하면 하나님의 눈이 머물러 있는 땅이기 때문이다.

(13-17절에 그 양면성이 잘 나타남)
순종:축복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림곡식,포도주,기름을 얻을 것,,심지어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함/
불순종할 때 저주가 있는 땅 /하늘을 닫음/땅이 소산을 내지 않을 것.

순종하면 복이요 거역하면 저주하겠다는 이 말씀은 단순히 내가 너희 행위를 보겠다, 조건적으로 너희 를 상대 하겠다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너희 행위를 부정하라는 것이다. 인간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할 때, 너희가 너희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만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질 때 비로소 가나안의 풍성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러므로”
이러므로(약속의 땅의 특성이 바로 이런 까닭에) 손목에도 미간에도 옷깃에도 붙여야 하고/자녀에게 가르치되 집에 앉았을 때도,길을 갈때,누웠을 때,일어날 때를 불문하고 먼저 이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므로 새로운 삶의 자세와 원리를 가져야 했던것 처럼, 우리 또한 이세상에서 이미 저세상으로/ 어둠의 세력이 지배하고 다스리는 나라에서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로 옮기어 간 사람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비록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 나라/여호와의 날을 대망할 수 밖에 없었으나,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속으로 들어갔으며,이미 그분의 다스림속에서 살고 있는 자들이다.

공간적인 의미에서 약속의 땅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이미 성취된 약속의 땅/하나님의 통치속에 들어간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빌3: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로 이민간 백성들이요,그분의 다스림을 받는 존재들임을 있어서는 안된다.

이것을 자녀들에게 강조해야 한다.

우리 자녀들이 세상의 타락한 가치관 속에서 성장하고 있다. /저들을 그냥 방치해 둔다면 우리 자녀들은 저 하나님 없는 세상 속에서 세상이 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세상사람들처럼 생각하고, 동일한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게 될 것이다.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는 사람.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사람.그분의 뜻을 위하여 사는 사람으로 양육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마가복음 10:13-16/예수님과 어린이(9

5.

5. 7 어린이 주일오후)

우리가 어린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어린이가 왕이다, 혹은 어린이의 위대함을 찬양하고 기리자는 의미가 아니다.더우기 세상이 어린이 날이다 떠덜석하게 행사를 벌리니까 그에 뒤지지 않기 위하여 쫒아 가려는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매우 소중한 교훈을 주시고 계시며, 특히 어린이는 누구보다도 연약한 인격체로서 많은 사람의 돌봄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연약한 지체이기 때문에 어린이주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보셨고 그들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셨는지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의 어린이에 대한 태도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예수님께서 안수하시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랬기 때문/ 그 때 제자들은 그들을 꾸짖어 돌려 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어린아이들을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해 주셨다.
예수님께 꾸중을 들은 제자들의 행동은 전혀 별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그대로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었다.
동서를 막론하고 고래로 어린 아이들에 대한 인식은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어린이들은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강아지가 귀엽듯이 귀여운 존재는 될지언정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대접해 주지는 않았다.
그래서 구약성경에 보면,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이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우상에게 제물로 바치는 악한 일들도 있었다.
그리고 옛날 스파르타에서는 어린아이가 출생하면 의사를 보내어서 뼈대가 튼튼하고 건강해서 장차 좋은 군인이나 운동선수가 될만한 아이만 살려두고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내다 버리는 법이 있었다.
어린아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인정하지 아니하는 모습은 어쩌면 오늘날에도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은 그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하셔서 축복하시고 그 어린이를 통하여 깊은 영적인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다.

1.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교훈 해 주셨다.
여기서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이런 자란 어떤 자인가 어린 아이와 같은 자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 같이 받들지 아니하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니라”
과연 이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저 어린아이를 귀중히 여기라/사랑하라는 말씀을 좀 강력하게 표현하신 것일까 결코 본문은 단순히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같이 받들지 아니하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매우 심각한 교훈이 담겨 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러면 이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1)어린아이는 완벽한 인간의 모델이 아니다
과연 어린아이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든다는 말씀은 /어떤 사람들은 이말씀을 근거로 어린이를 찬양하기 시작한다. 어린이는 순수하다, 어린이는 깨끗하다, 어린이는 거짓을 모른다, 어린이는 욕심이 없다 등등.
우리가 잘못하면 어린이를 하나님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린이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이 필요없는 것처럼 오해할 수가 있다.
과연 어린아이가 순수하기만 하고 죄악을 모르는 완벽한 인간의 모델인가/ 그러나 우리가 생활 속에서 보고 느끼는 바와 같이 어린아이는 그렇게 순진하지도, 순종하는 습성을 가진 존재도 아님을 우리가 알수 있지 않는가오히려 우리가 어린 아이를 통하여 느낄 수 있는 것은, 사람은 본성적으로 강팍하다는 것이 아닌가 선한 행위는 아무리 가르쳐도 잘 되지 않고 나쁜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행하는것을 느끼게 된다.

다윗이 시편을 통하여 고백했듯이 죄악 중에 태어난 인간임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어린 아이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육하고 바른 삶으로 인도해야 할 타락한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2)어린아이의 신뢰하는 자세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신 것은, 어린 아이를 죄 없는 자로 여기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는 속성 중에서 전적으로 의지하고 신뢰하는 모습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가장 이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시절을 언제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광야시절이다.과연광야시절 그들은 하나님을 늘기쁘게 하는 자들이었나 그렇지 않다 늘 불평하고 원만하고 애굽을 그리워하는 어리석은 이스라엘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아서나 구약 여러 성경에 보면은 그시절은어린아이 처럼 순수한 시절이었고, 소년시절의 우정과도 같았고, 신혼때의 사랑을 가졌다고 하고 있다.
왜 비록 연약하고 헛점 투성이였지만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신뢰를 가지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먹을 것 없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어려운일 만나면 여기서 못살겠다고 투정부리는 이스라엘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를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과 같은 이러한 자세로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3)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신뢰하는 자가 되라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드는 자란 / 하나님 나라에 전적인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희망이 없는 자그래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자/ 그런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의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는 자의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치 어린 아이처럼 그 나라를 기꺼이 그리고 온전한 신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가 되려 하기 보다는 어색하게 어른 흉내를 내려고 한다는 것이다./예수님 없어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자가 되고자 한다.

2.천국은 섬기는 자의 것 (막9:33-37)
어린이와 관련한 또하나의 교훈은 막9:33-37의 말씀이다.
한번은, 예수님 일행이 가버나움에 도착했을 때였다. 갑자기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가 오는 길에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제자들이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린다. 왜냐하면 길에서 자기들 중에 누가 더 높으냐 더 크냐하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기 때문이다.
그 때,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놓고 말씀하시기를,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라고 하셨다.

본문의 의미-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나라
예수님의 이 교훈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섬기는 자들의 나라라는 것이다.
오해말라! 이말씀은 높아지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낮은 위치로 내려가라는 말이 아니다./잠시 낮은 자리로 내려가면 마침내는 높임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섬김은 도덕적 교훈이 아니다.
그러므로 “섬긴다” “겸손해 진다”라는 말은 단순히 도덕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계속하여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36절이하)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그리고 나를(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함이라고 하신다.
꺼꾸로 생각해 보자 하나님을 영접하려면 누구를 영접 예수님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누구를-->어린아이와 같은 자를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어린아이 배척하면 하나님과 상관 없다는 말

너 자신을 알라
자기를 낮춘다는 것은 자기 본질을 아는 것이다./본래 모습이다.그러므로 겸손은 자랑거리가 아니다예수님께서 낮추신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야 말로 낮아질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것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예수믿는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자신이 낮은 자임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말씀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씀이다.
어린아이는 무엇 (요즘은 어린아이가 왕이다) 약한자,무가치한 자,영적으로 연약한자를 상징함./무시해도 상관없는 자너는 그런 어린아이에게도 굽신 거릴 수 밖에 없는 자라는 말씀이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강조하시는 옛추억이 있다.너는 애굽의 노예였다는 말씀/왜 자꾸 그 어두운 과거를 들추어 내는가 /너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지금의 모습이 이것이 너의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말씀지난 수요일도 말씀 우리가 구원얻기 이전의 우리 모습을 자주 상기할 필요가 있다.죄책감에 사로 잡히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을 알아야 감사가 있고 감격이 있다는 것이다.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으므로 어린아이를 영접할 믿음의 태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섬김의 정신을 나타내어야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의 원리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사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삶의 방식과는 거꾸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실현하며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사는 공동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이다. 바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크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참된 의미에서 큰 자는 높은 위치에서 뭇 사람들에게 호령하며,높은 위치에서 자기를 높이며,교만한 태도로 남을 멸시하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위대함은 다른 사람들의 부족을 채워주는 일에 힘쓰며, 그들을 사랑하고, 할 수 있는 한 도우려고 애쓰는 모습에 있는 것이다. 아무런 힘도 없고 권세도 없는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고 그를 섬길 수 있는자가 참으로 큰 자인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 언약의 공동체라면 교회는 어떤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겠는가 어떤 사람이 대접받고 존경을 받아야 하는가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이듯이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그와같은 사람이 높임을 받고 소중히 여김을 받아야할 것이다.

결언
새신자가 처음 교회에 들어와서 무엇을 느끼면 좋겠는가 교회 건물이 아름답다 사람이 많다 교인들 말잘한다더니 목사 말잘하네요 아니다.
교회는 왜 이렇게 질서가 없습니까 지금까지 내가 살아오던 세상과는 너무나 달라서 혼란스럽습니다.
“왜 어른들이 아이들을 섬기고,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굽신 거리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군요!”라는 이야기가 나와야 하지않겠는가
이웃 불신자들의 입에서 침산제일교회는 이상한 곳이다.라는 말을 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익숙하게 느끼던 그런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는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이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지극히 당연히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드러내는 곳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섬김을 받고 높임을 받으려는 자가 아니라 섬기고 낮아지는 자가 되자.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이런 모습을 나타내며 증거할 수 있기를 위해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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