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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마가렛 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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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다한 사회복지 지출과 노사분규로 멍들어가던 70년대 영국 경제를 되살려낸 마가렛 대처 수상을 세계인들은 '철의 여인' 이라고 부른다.
1979년 '파업으로부터 국가 경제를 구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며 대처가 정권을 거머쥐었던 당시 영국의 경제는 한마디로 비참함 그 자체였다. 나날이 늘어나는 재정 적자와 끊이지 않는 노사분규로 병들어 가는 영국 경제에 대해 영국병이라는 말이 유행어처럼 떠돌고 있었을 정도였다. 대처 총리의 가장 큰 업적은 영국병의 근원이었던 노사분규를 강력한 지도력으로 평정시킨 데 있다. 그녀는 1980년부터 84년까지 4차례 노동법을 개정, 부당한 파업으로 피해가 발생했을 때 노조측에 배상책임을 묻는 초강경 대책을 마련했다. 이는 당연히 당시 절대적인 힘으로 군림하던 노조와의 대립과 결전을 몰고 왔으며 결국 1년 동안 끈질지게 파업을 계속하는 석탄노조와 대립 때문에 7조원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대처의 노동정책은 결과적으로 노조에도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을 계기로 영국의 노사분규는 반세기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으며 근로자의 실질소득도 20% 이상 향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처리즘으로 불리는 또 하나의 정책 성공은 경제부흥 정책이다. 기업 활동의 폭을 확대시키고 국영화되어 있던 많은 사업을 과감하게 민영화하였다. 또한 강한 리더십과 능란한 외교정책으로 대처 총리는 세계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대처는 1979년 5월 수상에 오른 이후 하루에 19시간씩 일주일 내내 일하는 초능력을 과시했다. 가까운 친구도 별로 없고 말수도 적은 대처는 가족들과 둘러앉은 시간 이외에는 거의 정치를 하는데 시간을 할애했다. 당장의 일보다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일을 추진하는 뛰어난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자존심을 되찾게 해준 여성 지도자 마가렛 대처는 1925년 영국 중부 지방에서 잡화상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학창시절 특출하게 뛰어난 성적의 학생은 아니었지만 꾸준하게 복습하고 노력하는 성실함으로 옥스퍼드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대처가 총리로 재직하던 시절 다우닝가 10번지 수상관저의 하루일과는 언제나 오전 6시 30분께 시작되었다. 남편의 아침상을 손수 차리는 검소함과 소박함을 가진 보통 주부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 대처는 수상관저에서 일하는 직원을 하나도 두지 않았을 정도로 부지런한 여성이었다. 대처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녀가 '철의 여인' 이라는 닉네임과는 달리 자상하고 부드러운 영국의 보통 어머니와 같은 모습이라고 말한다. 또한 대처는 공과 사를 분명하게 구분하여 특히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것으로 유명하다. 야당 관료시절부터 모든 서류를 자신이 두 번 이상 검토하지 않고는 남에게 절대 충고를 하는 법이 없는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자신의 솔선수범을 강조했던 대처 수상은 국민에게 허리띠를 졸라 매도록 요구한 자신의 입장 때문에 각료들과 똑같은 봉급만 받은 외고집 통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철의 여인' 대처도 시대의 흐름에 밀려 3선을 한 후 수상의 자리를 내놓고 하야를 하게 된다. 성장 위주의 경제정책때문에 발생된 인플레와 미국 위주의 외교정책 등 대처의 치적에 불리한 현상들이 나타나자 그녀는 주저 없이 수상 자리를 내놓았다. 국가의 위기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권력을 가졌을 때와 권력을 떠날 때를 아는 훌륭한 정치인, 대처 수상은 영국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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