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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는 나를 보고서 믿느냐 (요 20: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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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신 말씀에서 우리는 도마의 불행과 행복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그들을 만나 주시는 이 감격스럽고 엄청난 사실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은 도마에게 있어서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도마에게 한 번 기회를 주시고 도마를 만나 주셨으며 그의 불신앙을 신앙으로 바꾸어 주신 것은 도마의 행복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는 왜 주님을 만나 뵙는 영광스러운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까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1.도마는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4절에 보세요.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했습니다.
19절에는 뭐랬어요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이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문을 다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 박은 저희들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에게 무슨 일을 할는지 알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두려웠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19-20절에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혹시 유령이 나타난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상처받으셨던 옆구리와 선을 보이시며 예수님 자신인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20절 하반절에 보면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당연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만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에 칠흑 같은 절망 속에 있던 이 제자들에게 주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은 정말 상상 못할 일이요 놀라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사회로부터 받아야 할 수모와 조롱과 박해에 대한 두려움 속에 빠져 있었던 제자들 가운데 갑자기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이 놀라운 장면에 도마는 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다른 동료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오셨을 때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성경은 밝히고 있습니다.
왜 그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 이유를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래 도마는 독립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고 개인적으로 다니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마 다른 제자들은 다 모여 있는데 혼자서 뛰쳐나가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다른 제자들은 다 문을 닫고 지금 혹시 나가면 유대인들에게 붙잡히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갇혀 있는 상태인데 반해 도마는 남달리 용감하고 담대하기 때문에 자기 혼자 뛰쳐나가서 전세를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열두 제자 가운데서도 도마가 가장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도마의 성격의 한 단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베다니 동네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병든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이들은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주님은 웬일인지 늑장을 부리면서 바로 베다니에 가시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도마의 성격의 한 단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베다니 동네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병든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이들은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주님은 웬일인지 늑장을 부리면서 바로 베다니에 가시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1장 6절 이하를 보세요.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이렇게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대 지방으로 가시는 것을 만류하였습니다. 거기에는 주님께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주를 박해 하려는 기도를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했습니다.
얼른 들을 때 이해하기 어렵지요
이 말은 어쩌면 주님이 사지로 향해 가시니까 “에라, 모르겠다. 다 가서 같이 죽자”하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또 어쩌면 “주님이 그 위험한 곳으로 가시는데 혼자 가시게 할 수 있겠는가 죽음을 무릅쓰고라고도 우리 다 같이 가자” 이런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용기에 찬 말 같기도 하지마는 허무한 말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도마는 아주 빈정대는 스타일의 사람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굉장히 용감한 사람 같기도 합니다.
하여간 도마였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은 다 집안에 모여 있는데 도마 혼자만 그 자리에 있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만은 다른 제자들과 행동을 함께 하지 아니한 것이 도마에게 큰 불행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그 자리에 나타나셨던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영광스러운 축복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뭐랬어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모임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임의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빠져버리면 우리의 모임은 단순히 어떤 사회적인 모임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우늘도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겠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두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다른 종류의 모임과 의미를 전혀 달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그리스도를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그 같은 말씀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는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모일 때 주님께서 거기에 임재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집에서 기도할 때와 이렇게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할 때 다른 느낌을 가지지 않습니까 예배당에서는 기도도 잘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더 깊이 맛보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 세 사람 이상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는 주님의 신실한 약속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함께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어떤 모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강렬히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왜 항상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편의 잘못 때문입니다. 주님은 항상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지만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간절한 기대가 없을 때 우리에게 그다지 큰 감동이 안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복음서를 읽어보시면 느끼시겠지만 주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면서도 나사렛에서는 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사렛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믿지 않았다’고 하는 말은 요샛말로 하면 ‘기대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향한 아무런 기대가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기대가 없을 때 축복도 없습니다.
여러분, 예배당에 나오실 때 내게 다시 말씀하실 주님을 기대하며 설레는 가슴을 안고 나오세요. 그럴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축복을 안겨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늘 주신 말씀에서 보는 대로 주님의 제자들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기대는 고사하고 모든것을 포기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돌아가심으로 주님의 역사는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주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이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은 제자들이 모여 있다는 그 사실 자체를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흩어지지 않고 모여서 그 절망 중에서도 서로를 위로하고 있던 그들 가운데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으므로 부활하신 주님을 뵙는 그 놀라운 특권, 감격에서 제외되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이 단 한 번만 나타나셨다면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디두모라 하는 도마에게 또 한 번 기회를 주셨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오늘 주신 말씀 26절을 보세요.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었고” 이 구절을 자세히 보세요. 24절에서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은 것을 강조했는데 여기 26절에서는 사실을 성경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지난 주일 저녁에 엄청난 사건이 있었는데 도마는 그 축복을 받지 못해서 아쉽다고 말했는지 모르겠습니다.“이 사람 도마,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셨어. 상상 해봐, 그 감격, 그 놀라움을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겠어”하면서 아직도 감격과 흥분에 쌓여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흥분된 말에 도마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아니, 도저히 자기의 이성으로는 ‘주님의 부활 사실’을 믿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대를 가지고 이 날은 집안에 머물러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마는 그 날 제자들과 함께 집안에 있었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제 2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 은혜, 이 사랑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자리에 있는 것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옛날 청교도의 생활신조 가운데는 “어떤 집회에도 빠지지 않는다”는 신조가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언제 주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실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에 주님이 오셔서 영광과 축복을 그들에게 주실는지, 언제 그들 가운데서 기적을 행하시고, 삶의 놀라운 변화를 주실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특별한 의미에서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시간이 있습니다.
어느 예배나 다 소중하지만 어느 날 우리 가운데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삶의 놀라운 변화와 영광의 주님을 목격하는 체험들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런 놀라운 모습으로 역사하실 때 내가 그 자리에 없음으로 그 축복에 동참하지 못하는 일이 없기 위해서 청교도들은 어떤 집회에도 빠지지 않는 것을 생활 신조로 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기를 바랍니다.

2.도마는 자신의 체험을 지나치게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란 사건 자체는 인간의 경험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믿지 못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5절에 보면,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하자 도마가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못하고는 믿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믿지 않겠다’고 강하게 부정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회의가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회의와 불신앙은 전혀 다릅니다. 믿을 수 없는 정도가 회의입니다. 그러나 도마는 믿지 않겠다고 강력하게 부정했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불신앙의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것을 의심하는 정도를 가지고 우리를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회의나 의심이 없다면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의심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의심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도마는 불신앙의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도마의 성격이 냉철하고 이성적이어서 자기 이성의 영역으로 수락할 수 없거나 자기 손으로 만져 보지 않으면 수락할 수 없다는 평소의 철학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9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어떤 기적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해서 믿는 것이 가장 정당하고 타당한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기적을 보고 싶어합니까 ‘아무개처럼 예수님이 꿈에 한 번만이라도 나타나셔서 내게 말씀해 주시면 좋겠다’고 소원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그것은 좋은 소원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보고야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도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면 믿을 수 없다는 경험주의적 신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부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부활의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회의 가운데 보내야만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도마와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3.도마는 의심하는 습관에 젖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이나 그 상황을 바로 파악하기 위해서 한두 번 질문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바람직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의 곁을 떠나 십자가로 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이 하신 말씀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제 제자들의 곁을 떠나 십자가로 가셔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주님이 하신 말씀의 뜻을 분명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독 도마만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뭐라고 물었습니까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어떻게 보면 이 질문은 자기가 모르기 때문에 솔직하게 묻는 질문이라고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런데도 도마가 그 의미를 충분히 알아채지 못했거나 알고도 던져 보는 어떤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십니까”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시니까 그 처소란 “저 모퉁이에 있는 저택을 말합니까”라는 식으로 던져 보는 질문입니다. 말씀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트집 잡고 캐묻는 것이 도마의 습관이었습니다. 이런 도마가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도마의 의심이나 도마의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도마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은혜이십니다. 도마가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문제의 해결을 받은 것입니다.
두 번째 찾아오신 주님을 보지 않고는 믿는 믿음이 타당한 신앙의 길임에도 불구하고 도마를 위해서 한 번 은혜를 베푸신 주님, 어쩌면 의심 많은 도마의 입술을 통해서 부활의 주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이 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강력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의심 많던 도마가 믿을 수 있었다면 너도 믿을 수 있다”는 사살을 보여주기 위해서 도마가 의심하는 기사를 성경에 기록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얼른 보면 도마가 예수님 옆구리에 손을 넣어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자세히 보면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었다는 기사는 없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도마는 당장 주님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주님이 나타나신 것만으로도 그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이미 도마의 마음속의 의심은 다 사라졌습니다. 그의 앞에 나타나신 그 주님께 압도당하여 그분 앞에 엎드리며 도마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너무 감격해서 문장도 채 끝내지 못했습니다.
스펄전 목사는 이 대목에서 도마가 한 손으로는 ‘나의 주’, 다른 한 손으로는 ‘나의 하나님’을 붙들고 싶어서 외쳤다고 말했습니다. 도마는 두 손으로는 주님을 깍 붙들고 싶었습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 놀라우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오늘 나의 하나님이 되심을 고백할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도마처럼 의심 많은 나를 변화시켜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확신을 가지고 힘차게 이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4년 4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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