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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마 24: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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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고라고 하는 한 남자가 플로라다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여러 시간동안 그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침울하고 근심에 싸여 있었습니다. 초조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친절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굳게 닫혔던 입을 열고 자기 마음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나는 죄를 짓고 4년 동안 뉴욕 형무소에서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바로 지금 형량 만기로 석방이 되어서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나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기에 4년 전에 아내에게 나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하라고 권유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아내로부터 아무 소식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출감일이 가까워지고 딱히 갈 데도 마땅치 않은 나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내 집은 브로크릴이라고 하는 마을에 있는데 그 곳은 차가 지나다니는 길가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을 어귀에는 큰 참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이 차를 타고 지나갈 때, 만일에 당신이 나를 영접해준다면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하나 매달아놓으라고, 그것이 나를 영접해주는 표시인 줄 알고 집에 들어 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만일에 손수건이 없으면 이미 당신은 다른 사람과 결혼한 줄로 알고 그저 지나쳐서 내 갈 곳으로 가겠노라고 했습니다. 이제 내가 살던 집에 거의 다 왔는데 걱정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차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같이 초조해졌습니다. 모두들 창밖을 바라보면서 이제나 저제나 참나무가 보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차 안에서 함성이 터졌습니다. 그 큰 참나무가 온통 노랗게 꽃피어 있는 것입니다. 손수건 하나만 묶으면 혹시 남편이 못보고 지나 갈까봐 아내가 그 나무에 온통 노란 손수건을 묶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초조하게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우리 앞에 있는 무엇을 생각하며 걱정하는 것입니까
과거지향적 성격의 사람이 있습니다. 과거의 실수, 과거의 잘못되었던 것, 이것들이 싹이 나고, 이것들의 후속 결과로 인해서 내게 어떤 보응이 주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과거가 자신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후회와, 낙담과, 공포에 싸여 그렇게 일생을 삽니다. 가만히 보면, 그 전부가 과거에 다 매여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돌이킬 수 없는 불행입니다. 또 하나는 ‘에라 모르겠다’고 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집착형입니다. 한끼 먹었으면 그만이고 한잠 잤으면 되는 거다, 사는 데까지 살아보자, 하며 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떠내려가는 나무토막처럼 그렇게 살아 갑니다. 목적도 의미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 미래지향형의 사람이 있습니다. 미래에 있습니다. 목적과 의미와 뜻과 그리고 삶의 가치와 모든 가치 기준이 미래에 있습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있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의 생각만은, 그의 지향하는 바는 저 미래에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 거리의 미래냐 하는 것입니다. 저녁에 자면서 아침을 생각합니까, 아침에 일어나면서 저녁을 생각합니까,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을 때를 생각합니까 그 미래가 어디까지냐, 그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우리는 지금 불확실한 세대를 삽니다. 참으로 불안합니다. 신문을 보면서 이것 하나 해결되면 이제 다 되는가보다, 이것 뭐 되는가보다 하지만 연이어 사건들이 벌컥벌컥 튀는 데에는 정신 못차립니다. 가끔 보면 초조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정책이 흔들리느냐, 어떻게 그렇게 확실한 정책이 없느냐’하는 얘기들을 합니다마는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벌컥벌컥 튀는 세상에 사는데 누가 미래를 점칩니까 누가 확실한 얘기를 할 수 있습니까 확실한 얘기를 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확실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대로 북한 핵 문제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게 될듯한데도 안되요. 무엇이 될 것도 같은데 어느 나라는 다 된것 같고, 어느 나라는 오늘 아침에 상황을 보니까 근본적으로 글렀습니다. 정신 없습니다. 누가 확실한 얘기를 할 수 있습니까 확실한 얘기를 하라는 사람 자체도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 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역사 끝에 있는 종말을 말씀합니다. 세상은 여러 가지로 변하겠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마지막은 오직 한 마디, “인자가 오리라(44절)”입니다. 이것은 물질적 문제가 아니요, 인격적인 문제입니다. 마치 집을 나서는 어머니가 ‘내가 몇 시간 후에 다시 오마’하는 것 같은 아주 다정한 말씀입니다. “인자가 오리라”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종말 의식입니다. 그 경로는 묻지 마십시오. 북한에서는 남몰래 지하에서 고생하면서 예배드립니다. 그런데 이것이 한번 발각되면 도깨비 작전에 걸립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루 아침에 온 집안 식구와 집이 싹 없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도깨비 작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토록 위험한 일이 닥친다 하더라도 몰래 예배 드리는 지하교회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곳과 연락이 닿아서 거기서 편지가 옵니다. 저는 그런 여러 장의 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습니다. 우리 남한에서 편지를 보낸 것들을 보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대충 이렇습니다. 첫마디가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심지어는 “은혜 중에 안녕하십니까” 어떤분은 “할렐루야”라고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북한에서 오는 편지는 그렇지 않습니다. 똑같이 첫마디가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때에 목사님 안녕하십니까”입니다. 종말론적입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때이렇게 시작됩니다. 이외에 소망도 없고, 이외에 바램도 없습니다. 깨끗한 소망, 오직 하나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때’이렇게 믿고 이렇게 삽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복잡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십니다. 너절하고 시시한 것은 더이상 생각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그리스도인은 깨끗하게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 때를 기다립니다.
요새 우리는 변변치 않는 지식을 내세워가지고 생각이 많습니다. 정치학적으로 생각을 해서 인구 문제가 어떻고, 경제학적으로 생각을 해서 자연자원의 고갈이 어떻고, 또 생태계를 생각해서 오존층이니, 지진이니, 뭐니, 복잡합니다. 심지어는 윤리학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심리학적 차원에서 인간의 종말을 말하기도 합니다. 너무 시끄럽습니다. 여러분, 무슨 말을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마는, 이런 것들을 탁탁 걷어버리고 맙시다. 남는 것은 오직 하나, “인자가 오리라”입니다. 마태복음 24장 8절을 보십시오. 세상에 난리가 있고, 지진이 있고, 전쟁이 있고, 배신이 있고, 배교가 있고, 타락이 있겠다,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모든 사건을 통하여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리라, 그제야 인자가 오리라,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합니다. 기독교인은 과거, 현재를 통해서 미래를 보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 약속에 의해서 미래를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에 대한 이해는 단순합니다. 아주 초연합니다. 깨끗합니다. 내가 다시 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가 예비하고, 다시 와서 너희를 나 있는 곳에 영접하리라’얼마나 단순합니까 얼마나 선명합니까
2차 대전 때의 일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갑자기 쳐들어 오는 바람에 맥아더 장군은 할수없이 비율빈이라는 곳에서 후퇴를 합니다. 그 때에 그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비율빈사람들에게 약속을 합니다. “나는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전세가 호전되어서 2년 후에 그는 비율빈의 레이트만 해안에 상륙을 합니다. 그 때에 처음으로 한 말이 이것입니다. “약속한 대로 나는 다시 왔습니다.” 여러분, 인자가 오리라 하신 것은 확실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생각을 집중해야 합니다. 많은 혼선도 있고, 시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생각합니다. 이 하나의 약속, ‘내가 다시 오리라’하신 것을 생각합니다.
다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시다. 인자가 올 때에 사람들은 노아의 때와 같으리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중요한 교과서입니다. 중요한 교훈입니다. 노아의 때가 우연입니까 노아 홍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 노아의 때가 무엇입니까 물론 죄 때문이요, 타락 때문이요,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예비하라이 방주를 예비하라 하시는 그대로가 곧 설교입니다. 노아가 산꼭대기에다가 방주를 만드는데 사람들은 그를 정신나간 할아버지 취급을 합니다. 이 무슨 미친 짓이냐고 하면 ‘홍수가 날 것이오. 이 배가 이제 뜰 것입니다’하고 120년 동안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홍수가 내리는 그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모든 죄를 여전히 범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매였고, 현재에 매였습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홍수에 대해서 아무 대비가 없었습니다.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얘기입니까 미래의 일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고로 준비가 없었습니다. 오직 노아만 준비했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밭에서 함께 일하고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졌다, 두 여인이 맷돌질을 하고 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사람은 버려졌다’이 얼마나 실제적인 말씀입니까 우리가 다같이 삽니다. 같은 서울에 살고, 같은 강남에 살고, 심지어는 같은 부부간에 둘이 앉아서 함께 맷돌질을 해도 하나는 그리스도인이요, 하나는 아닙니다. 하나에게는 깨달음이 있고, 하나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하나는 준비가 있고, 하나는 준비가 없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생각나는 주님의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열 처녀 비유입니다. 열 처녀가 신랑을 기다렸다, 다섯은 지혜로워서 기름을 준비하고, 다섯은 어리석어서 기름 준비함이 없었다, 그런데 신랑이 너무 더디 오는 바람에 전부 잠들었다저는 전부 잠들었다는 그 말이 그렇게 매력이 있어보입니다. 전부 잠들었어요. 그런데 지혜로운 처녀는 기름을 준비해놓고 잠들었어요. 졸리면 자야지요.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는 준비 안하고 잠들었어요.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스운 얘기입니다만 어떤 부부를 보면 부인은 교회에 나오고, 남편은 안 나옵니다. 그런 집에 심방을 가서 남편을 딱 만나게 되면 이렇게 권합니다. “교회에 나오셔야죠.” 그러면 그 남편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목사님, 가히 걱정을 안하셔도 될 텐데요. 제 아내가 잘 믿지 않습니까 교회봉사도 잘하지 않습니까 그 절반은 내 공로거든요. 내가 번 돈으로 헌금하고, 내가 집을 봐주니까 교회 나가고....이게 보통입니까 틀림없이 나도 천당에 갈 것입니다.” 여러분, 믿는 사람의 남편이 되었다고 자기도 같이 따라갈 줄로 생각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이 그런 경험을 했답니다. 이 사람은 우리나라의 유명한 신학대학의 교장 아들이자, 또 자신도 목사입니다. 그가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학생들끼리 얘기를 하던 중에 “당신, 기독교인이요”하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좀 짖궂어서 이런 질문을 많이 합니다. 속으로는 ‘아니, 내가 목사인데 기독교인이냐고 묻다니’하며 의아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신학교 교장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뜸하는 말이 “그것과 당신과 무슨 상관이요” 하더랍니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어떤 타이틀을 가졌든지, 어떤 신분을 가졌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다시 묻습니다. 당신 예수 믿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중생했느냐 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맷돌질을 함께 하는데 하나는 구원받고 하나는 버림받고, 밭에서 같이 일해도 하나는 구원받고 하나는 버림받고심각한 얘기입니다. 부모자식도 관계가 없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종말적인 얘기입니다. 생각과 의식과 목적과 믿음이 정말 그리스도에게 향하고 있느냐, 이것을 묻는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 지혜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예지하고, 예감하고, 예측하고, 예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언제나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지혜로운 사람들을 봅니다. 여름에 겨울 옷을 삽니다. 겨울에 여름 옷을 준비합니다. 그러면 정가의 반도 안 될 만큼 싸게 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꼭 이상하게 크리스마스에 겨울옷을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쌀수 밖에요. 유행을 따라가는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끝을 생각하고 시작하십시다. 영원을 생각하고 오늘을 살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아침을 생각하며 자야되고, 저녁을 생각하며 깨야 됩니다. ‘인자가 오리라’--주님께서 오시면서 문을 두드리십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소라가 들립니다. 어떤 한 젊은이가 경건한 마음을 가진 노교수님을 찾아가서 얘기를 합니다. “사람이 죽기는 꼭 죽는가보지요” “그럼.” “그럼 죽기 전에 미래를 위해서 준비해야 되겠군요.” “그럼.” “그 준비하는 데에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그거야 그저 몇 분이면 되지.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데 옆에 있던 강도가 죽기 몇 분 전에 딱 한마디 말하고 구원받지 않았나 그렇게 시간 많이 안걸려. 죽음 준비하는 것은 그저 몇 분이면 돼.” “간단하군요. 그러면 더 좀 실컷 놀다가 마지막 죽기 전에 예수님믿으면 되겠군요.” 노교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한가지 묻겠는데 자네, 언제 죽을 줄 아나” “그게 문제군요.” 여러분, 항상 현재적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오늘날이 나의 마지막날이 될수도 있고, 오늘이 주님을 맞이하는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갔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알건 모르건 현재는 지나갑니다. 미래는 다가옵니다. 바라든 바라지 않든 맞이해야 합니다. 끝은 있습니다.
인자가 오십니다. 이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취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간단히 말씀합니다. ‘깨어 있으라, 그리고 예비하라.’ 그 다음 본문에 비유로 말씀합니다. ‘행동하라.’ 충성되게 일하면서 그 시간을 예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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