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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의 윤리 (막 09: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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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평양에 갔을 때, 그곳의 지도자들이 남한 사정에 대해서 제게 여러 가지로 물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고 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매우 잘살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그런 말을 많이 들어왔는데 정말 그것이 사실이군요”라고 합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 교회 집사님들이나 친지, 친구들이 제게 북한 사정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북한에 가보니 어떻습디까” 그래서 그곳은 이렇고 저렇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역시 다 듣고 나서 하는 말이 “그런 말을 많이 들어왔는데 정말 그것이 사실이군요”라고 합니다. 양쪽에서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반응을 보이는지, 저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을 모르는게 아닙니다. 듣기는 많이 들었어요.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지를 않습니다. 믿지 않으니까 결국은 아무 능력도, 아무 결과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많이 알고, 많은 정보가 있고, 많은 지식이 있다 하지마는 결국은 믿음으로만이 결과가 있고, 열매가 있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믿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많은 대화, 그 많은 약속이 있어도 불신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신의를 구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믿어질 때만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큰 축복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책망어린 어조로 개탄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19절)”--이 말씀 속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 하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직선적으로는 열두 제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뒷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얼마나 내가 너희와 같이 있고, 얼마나 보여주고, 얼마나 가르쳐야 믿음 있는 사람이 되겠느냐’--믿어야만 하는데 어째서 의심을 하고 있느냐, 의심하니까 너희가 무능하고, 의심하니까 병을 못 고쳤고, 귀신을 내쫓지 못했고,

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니냐,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어야 참 믿음을 갖게 되고 믿음의 사람이 되겠느냐 하심입니다. 여기에 믿음의 성격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기 위하여,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 확실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위해서 무척이나 애씁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모이기도 잘하고, 또 건강에 관한 책은 잘 팔립니다. 건강의 비결이 무엇이냐, 가만히 보니까 그실 간단합니다. 음식 적당히 먹고, 운동 적당히 잘하고, 마지막으로 마음이 편안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부분이 전체의 7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조금 잘 못먹어도 마음이 편하면 건강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자, 마음이 편하면 간강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이 많으면 되느냐, 애인이 있으면 되느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믿음입니다. 믿는 자, 믿음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도 믿고, 아내도 믿고, 자식도 믿어야 합니다. 의심하면 결코 건강할 수가 없고 평안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아주 절대적이요, 큰 축복입니다.
오늘의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바로 이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믿는 자가 되어라--믿으면 건강하고, 믿으면 귀신도 내쫓을 수 있다, 믿는 자가 되면 귀신의 꾐을 받지 않고, 귀신들리지도 않고, 또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도 능히 그 속에 있는 귀신을 내쫓을 수도 있다, 그 말씀이십니다. 귀신을 추방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질 수 있습니다. 믿음은 마치 빛과 같아서 이 빛이 나아갈 때에 어두움은 자연히 물러가게 되어 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넉넉한 건강, 그것은 넉넉한 믿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참 평안이 있을 때에 온갖 질병도 다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유난히도 위생을 철저하게 여기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대학도 가정과를 나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고... 이런 것을 세세하게 잘 알고 지켜서 온 집안 식구들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말도 못합니다. 손을 씻지 않으면 절대로 음식은 먹지 못하고, 무엇은 어떻게 씻어야 하고.... 무엇이든지 깨끗하게 할 것을 늘상 강조합니다. 아, 그런데 그녀가 위암에 걸렸습니다. 그 때에 그 부인이 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위암에 걸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예요.” 하지만 그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의사도 아닌데 그 원인을 누가 어떻게 알겠습니까마는, 그저 모든 것을 깨끗하게, 깨끗하게 하려 하고, 모든 것을 의심하고.... 그것은 좋지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금 이렇더라도 이것을 먹으면 내가 넉넉히 소화할 수 있고, 균도 내가 이길 수 있고, 병도 내가 극복할 수 있는 충분한 제어능력이 있는데, 이 생각을 못했습니다. 이 믿음이 있고야 평안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정적으로 깨끗한 것만을 따지려고 하니 그게 끝이 있습니까 더구나 요새 같은 세상에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에서부터 공기까지 깨끗한 게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역설적인 것은, 점점 사람의 수명이 길어져서 걱정입니다.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먼저 믿음이 기초적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좀 특별한 이야기라서 공감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제가 결혼 주례를 많이 섭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랑 신부와 함께 사진을 찍습니다. 저는 카메라맨이 나와서 카메라를 세워놓고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한참을 웃곤 합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카메라맨은 우선 카메라의 렌즈를 열어놓고 사람들이 포즈를 취하게 한 다음에 카메라 셔터를 잠급니다. 그런 후에 필름을 놓고 필름막을 빼는 데, 바로 이 부분에서 ‘내가 확실하게 카메라 셔터를 잠갔나 안잠갔나’를 살펴봅니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 만져봅니다. 만일에 셔터를 열어놓고서 필름막을 빼면 그 필름은 그만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확실하게 내가 닫아놓았나 안닫아놓았나 해서, 들여다보고 만져보고, 들여다보고 만져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확인하는 것을 다섯번이나 합니다. 자기가 금방 해놓고도 못미더워서 또 들여다 보고 만져보고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당신 손도 당신이 믿지 못하니 어떡하면 좋아, 자기가 자기를 믿지 못하는 구나’하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경험이 많을 것입니다. 현관문을 잠그고 외출하러 내려왔다가 ‘정말 잠갔나’하는 생각에 다시 올라가서 만져보고, 또 ‘열어놓고 내려온 것 아니야’해서 다시 올라가서 만져보고.... 그렇게 한 너댓 번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믿음이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이것도 체질의 문제입니다. personality와 character는 같은 게 아닙니다. 인격이니 성격이니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인품이나 성품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불신이 반복되고, 습관화하고, 성격화하고, 마지막에는 성품화하여버립니다. 의심 체질이 되어버립니다. 이러면 구제불능입니다. 그래서 가정교육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배신당하고, 형제에게 배신당하고, 친구에게 배신당하고.... 이 사람은 자꾸만 배신당하니까 그만 믿어버릴 것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의심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의심 체질이 되어버립니다. 참으로 불쌍합니다. 마귀의 특징은 의심입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사람을 보면 그들은 그저 불안해서 잠깐도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두리번두리번합니다. 의심 체질,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 예수님 앞에 나온 이 아버지에게는 벙어리귀신 들린 아들이 있었습니다. 멀쩡한 아이가 불 속에 뛰어들고, 말도 못하고, 자기 몸을 자기가 상하게 해서 피를 내고, 그러니 얼마나 아버지가 괴롭겠습니까 이 아들을 고쳐보려고 아버지는 고칠 수 있다는 사람한테는 다 가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실패했습니다. 결국은 배신당한 것이지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드디어 이제 예수님 앞에 왔는데, 마침 예수님께서는 변화산에 올라가 계시고 산밑에는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홉 제자들에게 아들을 고쳐달라고 부탁합니다. 제자들은 한번 고쳐보겠다고 한사람 한사람 나서서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가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귀신은 아들한테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또 한번 실망합니다. ‘아이구, 그래도 뭔가 기대했었는데 여기서도 별도리가 없구나’하고 낙심합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다가 이 장면을 보시게 됩니다. 이 귀신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하는 말을 들어보세요. ‘당신의 제자에게 내 아들을 데리고 와보았지만 못고쳤습니다. 당신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사 도와주시기 바랍니다’--“하실 수 있거든(22절)”이라고 말합니다. 대단히 기분나쁜 말이지요. 다시말하면 여러 번 실망했기 때문에 예수님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고 말합니다. 이 의심은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합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동정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책망하십니다. “할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 오늘의 본문을 보니 이 아버지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당황합니다. 그래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24절)”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모순이 있습니다. ‘믿나이다’ 했으면 믿음이 있는 것이지,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워낙 급하니까 이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정말 믿음 없는 사람입니다. 사실로 믿음없는 행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이런 의심 하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 속에 엄청난 진리의 말씀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당신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당신이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귀신들린 이 어린아이 속에 있는 귀신을 내쫓을 수 있는 능력이 당신에게 있거든,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능력의 사람이거든 나와 내 아이를 불쌍히 여겨주세요”라고 아버지가 말을 하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냐, 너냐, 저냐가 아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나도, 너도 결국은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너냐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 누구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에는 엄격히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로스적인 믿음이고, 하나는 아가페적인 믿음입니다. 에로스적인 믿음은 내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면서 ‘나 중심적으로 이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을 가질 수 있음을 믿습니다’하고 이렇게 나에게서부터 출발하는 믿음입니다. 아가페적인 믿음은 암행적인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약속을 내가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시면 ‘네’하고 받아들이고, ‘네가 죄사함 받았느니라’라고 하실 때에 ‘아멘’하고 수용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내가 어떤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하는 그 수용적인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이 본문에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믿음 그 자체의 문제보다 나아가서는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 참 믿음을 가질 뿐 아니라 참 믿음의 사람이 되면 이제 귀신에게 끌리지 않을 수도 있고, 병을 이길 수도 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병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이 믿는 자,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철저한 믿음의 사람은 평안합니다. 그의 평안이 충만할 때에 그는 건강합니다. 다른 사람을 평안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철저한 믿음의 사람은 평안합니다. 그의 평안이 충만할 때에 그는 건강합니다. 다른 사람을 평안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이 말씀 뒤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는 듯 싶습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 자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믿으면 가능하고, 믿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가장 큰 이유가 불신입니다.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이데올로기가 어떻고, 철학이 어떻고,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어떻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보아도 공산주의자들은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대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람도 못믿습니다. 나 자신도 못믿습니다. 아무도 못믿어요. 그 엄격한 이념을 유치원서부터 가르쳐놓고도 그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김일성이 마지막으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세습입니다. 어째서 아들에게 이어집니까 왜 아들 혼자입니까 왜 ‘대를 이어서’ 입니까 충성이란 말도 지나쳐서 이제는 효성이라고 해요, 효도를 다한다고 해요. 왜요 믿지 못하니까요. 측근이라는 친척들 보면 김씨, 강씨 판입니다. 강씨는 전부 외가쪽이고, 김씨는 그 ‘수령’의 가계입니다. 이들은 왜 믿을 수 있는냐--간단해요. 나 죽을 때에 같이 죽을 사람들이니까요. 적어도 한 배에 실렸거든요. 운명을 같이할 수밖에 없거든요. 그들밖에는 못믿어요. 그렇게도 철저한 사상교육이라고 하면서 아무도 믿지 못해요. 그래서 무엇 하나 시켜놓고는 딴 사람을 붙여서 감시를 하고, 감시자 뒤에 또 감시자가 있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니 무능할 수밖에요. 그러니 생산도 결과도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망하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믿음은 그 뿌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내가 저를 믿어요. 내가 내 아내를 믿는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아내를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딸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남편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는 믿음이 아니고는 어떤 믿음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은 사실에 근거하고 진리 위에 세워집니다. 사실과 진리라고 하는 것은 믿을 때에만 사건이 되고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엄연한 사실이더라도 안믿으면 내게는 사실이 아닙니다. 엄연히 일어난 일이요 확실한 사건이더라도 내가 안 믿는 한에는 내게는 사건이 아닙니다. 저기서 불이 났다 하더라도 불났다는 것을 믿을 때에만 불난 것이지 “내가 안믿어”하면 그만입니다. “그런 일 없소”하면 없는 것입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증거라는 게 무엇입니까 마르튀리아증거라고 하는 이 말은 사실을 말해서, 내가 증거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실을 사실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서, 증거해서 저로 하여금 사실을 사실대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믿게 될 때에 사건이 사건 됩니다. 이제 actualige되고, 이제 능력이 되고, 이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걸 알아야 돼요.
여러분, 나이많은 어른들, 젊었을 때에 잘못한 것으로 지금 후회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과거에 이렇게 이렇게 잘못한 게 있다, 지금 후회가 많다, 너는 절대로 그러지 마라,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럴때에 저쪽에서 듣고, 그 말을 다 믿어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정말 그렇겠네요, 옳은 말씀입니다.--이렇게 믿었으면 적어도 부모가 실수한 길은 가지 않았을 텐데, 안믿으니까 결국은 그 아버지에 그 자식인 것입니다. 똑같이 가고 있거든요. 똑같은 길을 반복하고 있어요. 그러니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제발 너만은 이러지 말라고 한 충고를 믿었어야하는데 말입니다. 불신은 멸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그 능력을 믿고, 그 지혜를 믿고, 그 사랑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매 내가 나를 믿고, 형제를 믿고, 이웃을 믿고, 비로소 평안이 있고, 비로소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니 믿지 못하는 이 사람, 다 불신당했기에 예수도 믿지 못하는 이 사람도, 예수님께서는 믿어주십니다. 그래도 그를 사랑해주십니다. 그 아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책망하고 꾸짖으시면서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건들을 접합니다. 많은 고난도 당합니다. 이 많은 역사가 무얼 말해주는 것입니까 잘못된 믿음 버리게 하고, 바른 믿음 가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김일성 수령’이 죽었다고 해서 모두들 착잡한 심경을 가집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북한의 철저한 우상입니다. 우
상은 가야 합니다. 우상이 가고야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경대 출신으로 잘못을 저질러서 북한을 탈출해 북경에 와 있는 청년이 하나 있었어요. 그 청년을 제가 만났어요.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하다가 이 청년, “그래 우린 어떻게 해야 다시 고향에 돌아가고 통일도 될까요”합니다. 제가 “아, 그거야 수령님이 빨리 가야지”했더니 이것 보세요. 청년은 벌떡 일어서더니 “그는 불경스런 말씀이 어디 있어요”해요. 저도 싫어 도망해 나와놓고는 ‘김일성 수령’ 죽어야 한다니까 깜짝 놀라요. 얼마나 교육을 철저히 해놓았으면 그 꼴입니까 그래 “이놈아, 가만히 생각해보자. 김일성이라고 안죽겠느냐”했더니 눈만 꿈벅거리고 있더니 대답합니다. “죽기야 죽겠지요.” “네게는 신이 죽는 거다!”
여러분, 우상--잘못된 신앙은 버려져야 하고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요 경륜입니다. 진 케일이라고 하는 의사는 항상 “수술은 사람이 하되 하나님이 고치신다”고 하는 신앙으로 살고 그렇게 책도 써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는 가정에 태어났지마는 대학을 다닐 때에도 예수 안믿었고, 의사가 되어가지고도 간간이 교회에 그저 구경삼아 나갔을 뿐, 믿음이 없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의사가 되었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가 차사고를 당했습니다. 다들 휴가 가고 없어서 부득불 어머니를 손수 수술하게 됩니다. 그는 당황했습니다. 집도하기 전에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세요. 저는 힘이 없습니다.” 눈물로 기도를 하고 수술을 해서 효험을 보았습니다. 그후로 그는 “수술은 내가 하되,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침내 능력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없는 세대에 삽니다. 믿을 수도 없는 세대, 어쩌면 믿어서는 안되는 세대에 삽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예수님만은 믿어야 합니다. 세상사람 다 의심해도 예배드릴 때만은 의심하지 마세요. 하나님 말씀만은 의심하지 마세요. 이것까지 의심하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에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믿는 자가 되어야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도, 죄도, 사망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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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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