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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검을 주러 오신 예수 (마 10:3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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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연중 가장 좋은 계절을 살고 있습니다. 춘 3월은 옛부터 계절의 여왕이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 환경에서 3월은 가장 소망적인 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력으로 볼 때도 이 3월은 가장 뜻이 있는 달입니다. 3월은 사순절과 수난절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이 3월이 아주 소중한 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순절과 수난절은 기독교에서는 그만큼 중요한 절기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고난도 받으셨고, 수모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끝내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죽음으로써, 조화가 깨진 세상으로 하여금 조화를 이루게 하셨고, 죄 많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닦아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을 주셨고, 질병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는 치료와 자유와 기쁨을 주셨고, 죄와 무지와 가난과 억압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일대 혁신의 삶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를 모르고 살던 사람들에게는 깨달음과 죄 사함과 변화의 삶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구세주라고 부르고, 구속주라고 부르고, 메시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거기에 깜짝 놀랄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지금까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10: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고 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주님은 검을 주고, 불화를 주고, 십자가를 주고, 싸우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로 검을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34절을 보면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님은 이해 못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오셨다 해도 사람들이 예수 믿기가 어려운 세상인데 오히려 검을 주려고 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검은 분명 칼이라는 말인데 주님께서 칼을 주려고 세상에 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칼이 무딘 칼이겠습니까 그 칼은 예리하고 날카롭고, 도려 내고, 찔러 대신 날선 그런 칼일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이 말씀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이 세상에 칼을 주려고 오셨습니다. 여러분, 곰곰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까지 이 세상은 그런 대로 화평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모르고 살 때는 그런 대로 마음도 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예수께서 오신 후부터는 칼로 찌르는 것 같은 아픔이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또 피 흘림과 고통과 고민들이 처처에서 나타났습니다.
그 첫 희생자가 마리아입니다. 시골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이 처녀 마리아가 어느 날 갑자기 성령에 의해서 잉태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사건으로 인해 이 처녀가 얼마나 고된 곤욕을 치러 냅니까 그 수모와 오해와 욕을 먹어 가며 아이를 낳기까지 그 고통, 고민, 이것이 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또 시골 바닷가에서 조용히 고기나 잡아 먹고 살던 제자들, 어느 날 예수께서 오시더니 “나를 따르라” 해서 멋 모르고 따라 나선 후에 그들이 또 얼마나 곤욕을 치릅니까 죽을 때도 곤히 죽습니까 하나는 십자가에서 죽고, 또 하나는 목이 잘려 죽고, 또 하나는 외딴 섬에 유배되어 쓸쓸히 죽어 갔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지 않았던들 이 사람들은 조용히 살다가 갔을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광장에 모여 있던 3천 명의 군중들에게 베드로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한결같이 가슴을 쥐어 뜯어 가며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울부짖었다고 했습니다. 그게 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얼마나 예리한 칼 같은 말씀이 그들의 가슴을 후벼댔으면 “우리가 어찌 할꼬”하고 탄식했겠습니까

그것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예수를 모르고 살때는 그런 대로 마음 편하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때는 죄가 뭔지, 천국이 뭔지, 심판이 뭔지 알고나 살았습니까 모르면서 잠도 잘 잤고, 마음도 편하게 살았고, 할 짓을 다하고 마음 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주님을 알고 나서부터는 어떻습니까 양심의 고통과 영적인 갈등과 죄책감들 때문에 마음들이 얼마나 아픕니까 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을 가지 못하고 절제하고 끊어 버리자니 그게 쉽게 끊어집니까 거기서 오는 부담감, 갈등, 아쉬움, 고통이 얼마입니까
확실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부터 이 세상에는 큰 파문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 검은 곪은 곳을 찌르는 검입니다. 썩는 곳을 도려내는 날카로운 검입니다. 무딘 양심을 사정없이 찔러 대는 검입니다. 끊어야 할 것을 끊도록 내려 치는 그런 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검을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불화를 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35-36절을 보면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했습니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에는 자식과 부모 사이에 갈등이 많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갈등이 많은 세상인데 화합시키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더 불화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으면 불화하던 가정도 화합이 되어야 합니다. 싸우던 가정은 화합을 하여야 하고, 울던 가정은 웃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조용하던 가정에 불화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 때문에 불화한 가정이 얼마나 많습니까 조용하게 살던 집에 예수를 잘 믿는 며느리가 시집을 왔습니다. 그 집에 어떤 현상이 벌어졌겠습니까 믿지 않는 남편이 이해를 해주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이 이해를 안해 줍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니 그 가정이 얼마나 불화하겠습니까
그 가정이 예수를 모를 때는 그 문제에 관한 한 화평했습니다. 그 가정에 예수를 믿는 며느리가 들오오기 전까지는 무지하게 살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화평을 유지하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조용하던 가정에 예수가 들어오면서부터 화평이 깨지고 불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내가 불화를 주러 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가정은 그 며느기라 모든 몰이해와 찌든 관습과 무지를 깨우치고 그 가정을 복음화시키기까지는 불화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한 가정이 맏아들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이 아들이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는 제사 때만 되면 불화가 일어납니다. 집사이다 보니 제상 차려 놓고 지방을 붙여 놓고 거기에 절하며 제사를 지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추도 예배를 드리자니 완고한 어른들이 이해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어정쩡하게 지냅니다. 그러다가 “이럴 수는 없다”하고 우겨서 추도 예배를 드립니다. 그랬더니 가깝던 친척들이 한 사람도 참석을 하지 않습니다. 가깝던 친척들이 자꾸만 멀어져 갑니다. 그리고 뒤에서 조상도 모르는 자식이라고 욕을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외톨이가 됩니다.
그 가정에 예수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친척들이 모여서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뜻을 알고 지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간에 웃으면서 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그 집안에 들어오면서부터 불화가 시작되었습ㄴ니다. 그래서 어떤 집은 제사 지내지 않는 자식은 자식도 아니라고 해서 족보에서 빼 버린 집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다고 구타를 당하고, 수모를 당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같은 것은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오늘도 있습니다. 지금 한창 이 과정을 거치고 있는 가정이 있고, 이 단계를 이미 넘긴 가정도 있고, 또 앞으로 이 단계를 넘여야 할 가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0: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비로소 이 단계를 극복해야 제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십자가를 지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어떤 십자가냐 하면 세 가지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10: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라는 맹목적 순종을 부정해야 하는 십자가입니다. 이 말은 부모에게 순종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고, 받들고, 효도하라고 누차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모를 욕하고 경히 여기는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 말은 부모가 무지하고 완고해서 자녀들로 하여금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을 한사코 막을 때 할 수 없이 이 길을 포기하고 마는 그런 용기 없는 사람은 내게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에 따라야 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뜻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날 때는 납득시키고, 이해시키는 인내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맹목적 순종의 부정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십자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마10:37)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맨목적 사랑을 부정하는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부모는 모두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는 그 사랑이 지나쳐서 자식이 우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 때문에 신앙 생활을 포기하는 사람까지 생겨 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아이들을 키우느라고 신앙 생활을 못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을 학교에나 들어가게 해 놓고 나서 신앙 생활을 하자 하고 됩니까 그때는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하느라고 학원으로, 학교로 열심히 뛰어 다니는 일로 바쁩니다. 그때는 또 아이들이 학교를 마치고 시집이나 보내 놓고 시작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쉽니다. 그러면 또 신앙 생활 할 이유가 주어집니까 이번에는 손자 손녀들을 키우느라고 정신이 없고, 그 아이들이 또 커서 학교를 갈 때가 되면 이번에는 또 집을 지켜 주느라고 바쁩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이것이 아니다 싶어 용기를 내서 신앙 생활을 다시 하자해서 시작해 보지만 이제는 다 늙고, 힘이 없어지고, 흔들리는 무릎으로 무슨 일을 할 것입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종말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 때 모두 후회하고, 당황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제는 할 수 없이 죽을 시간은 다가왔는데 갈 준비는 되어 있지 않고, 가기는 가야 하겠고, 얼마나 당황이 될 것입니까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용기 없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일제 때 신사 참배한 것을 놓고 평생을 후회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때 왜 참배를 했는가 하면 처자식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처자식이 염려가 되어서 할 수 없이 신사 참배를 하고 나서 후에 그때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자식이 우상입니다. 처자식 때문에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면 이렇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하면 이렇게 맹목적인 사랑도 부정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는 자기가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들이 목에 걸고 다니는 그런 십자가가 아닙니다. 이 십자가는 희생의 십자가이고, 자기 부정의 십자가입니다. 자기를 부정해야 할 때, 그리고 자기를 희생하여야 할 때 희생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고, 주저주저 하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진정 우리들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생활은 그래서 용기 없는 사람은 갈 수 없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나를 위해서 나머지는 모두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를 위해서 나머지를 과감히 버리면 버릴 때는 아쉽고, 아깝고 미련이 남아 있지만 그 후에는 버린 부분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삶은 버리는 생활입니다. 버려야 얻어지고, 죽어야 살아나는 생활입니다. 이를테면 십자가의 삶은 버려야 비로소 얻어지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검을 주러 오셨습니다. 불화를 주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우러 오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의미를 잘 알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사순절 기간에 우리들이 묵상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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