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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다의 욕망 인생 (마 2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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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참 수모스런 인생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를 보면 그렇게 구차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도 알아주지 않는 가운데 마구간에서 초라하게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초라하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일생이라야 33년밖에 안 되는 짧은 인생이지만 그 인생마저도 얼마나 구차하게 살았습니까 “참새도 제 집이 있고 보금자리가 있건만 나는 오늘 밤 머리 둘 곳조차 없다.” 이 한마디가 예수님의 일생이 얼마나 구차했는가를 말해 주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그렇게 초라했습니다.
또 죽으실 때는 얼마나 수치스럽게 죽으셨습니까 강도들 틈에 끼어 죽으셨습니다. 죽은 다음에는 묻힐 곳도 없어 남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죽어서조차 누울 곳이 없는 아주 초라한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로부터 받은 대접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들보다도 더 큰 수모는 뭐니뭐니 해도 제자로부터 배신당한 일일 것입니다. 이 수모는 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수모 가운데 가장 대표되는 수모일 것입니다. 배신 가운데서 가장 큰 배신은 제자가 스승을 팔아먹는 배신일 것입니다. 이런 수모가 세상에 또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아주 짧은 기간을 사셨는데 어떻게 생각하면 그 인생도 참 기구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부하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말은 있어도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했다는 말은 처음입니다. 그것도 그냥 배신으로 끝나지 않고 배신을 당해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했다는 경우는 이것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기구한 인생이 있습니다.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이 가룟 유다는 참 한심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인생”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스승을 다 팔아먹습니까 무슨 기막힌 사연이 있길래 자기의 선생님을 다 팔아먹습니까 그 결과 이 가룟 유다에게 주어진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불명예가 주어졌습니다. 사람은 명예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세상을 일시적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이 명예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세상을 막 살아갈 수 없는 것은 이 명예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세상을 막 살아갈 수 없는 것도 이 명예 때문입니다. 명예가 땅에 떨어지면 그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과 같습니다. 사람은 명예가 땅에 떨어지면 그때부터 숨어 살게 됩니다. 누구를 만난다거나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용기를 잃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죽은 목숨이지 뭡니까
이 유다는 명예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원래 이 사람은 당시 엘리트였습니다. 욕망도 있었고 야심도 있었던 꿈 많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쪽 지방 가룟에서 당돌하게 북쪽에서 일하시던 예수를 찾아와 스스로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이 나라의 지도자만 되면 무엇인가 한 자리 할 것르로 믿고 용기 있게 고향을 떠나 예수께 찾아와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얼마나 용기 있는 젊은이입니까
젊은이에게는 이 같은 꿈이 있어야 합니다. 야심도 있어야 하고 희망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야심이 잘못 사용되면 유다와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유다는 꿈이 있었던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꿈에 너무 집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스승을 팔고 배신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유다는 자신의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이 불명예는 당대뿐이 아니고 이 세상의 종말의 날까지 없어지지 않고 치욕스럽게 따라다닐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뭐가 되겠습니까
사람은 무엇보다도 명예가 있어야 합니다. 명예를 소중히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잘 살고 잘 먹으면 무얼 합니까 그 이름이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짓밟히고 살면 그 잘 살고 잘 먹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잠언서에서는 “무엇보다도 명예를 소중히 하라”고 했습니다. 가룟 유다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습니다. 그에게 어떤 불명예가 주어졌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그 죽음이 불명예스럽습니다.

가룟 유다는 출발은 참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용기도 있었고 꿈도 많은 젊은이였습니다. 그 꿈을 펼쳐 보겠다고 고향을 떠나서 예수를 따라다녔습니다. 거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습니다. 자기 스승을 배반하고 팔아 십자가에서 죽도록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유다는 굉장히 후회를 했던 것 같습니다.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고 송구하기도 해서 그만 나가서 목을 매 죽어 버렸습니다. 그 꼴이 뭡니까 “사람이 자살했다.” 이 얼마나 불명예스런 죽음입니까 그것도 “스승을 팔아먹고 자살했다.” 참 불명예스러운 죽음입니다.
기독교 윤리로 보면 자살은 타살과 맞먹는 범죄입니다. 중근세의 유럽에서는 자살자는 살인자와 똑같은 죄목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래서 자살한 사람은 그 시체를 말에 매어 끌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구경을 시켰고 그 사람의 재산을 몰수해서 국고에 귀속시켰다고 합니다. 또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는 목을 매 자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람은 상처가 낫기를 기다렸다가 다 나으면 데리고 가서 교수형에 처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 자살을 엄히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사람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게 자살을 합니다. 조금 살기가 힘들고 좀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쉽게 자살해 버립니다. 실연을 당해 죽어 버리고, 시어머니가 보기 싫어서 죽어 버리고 아이 못 낳아서 죽어 버리고, 남편과 싸우다 약 먹고 죽어 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죽은 사람이 지난 한해 동안 2,367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들어오면서 나타난 사회병 가운데 하나가 이 인명을 경시하는 풍조입니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꾸중만 들어도 아이들이 나가서 죽어 버리고 입시에 낙방만 해도 목을 매서 죽고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내려 죽습니다. 사람은 마지막이 중요합니다.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마지막을 마쳤느냐 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스데반은 죽을 때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돌에 맞아 죽었지만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주께서 지켜 보시는 가운데 죽었습니다. 그 죽어 가던 모습은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엄청난 용기를 주었고 강한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베드로도 평소에는 실수를 많이 했던 사람이었지만 마지막 죽을 때는 그 실수들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죽었다고 합니다. 야고보도 첫 순교자로서 그 시대에 아주 명분 있게 죽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가룟 유다는 목을 매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자실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도행전 (행1: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고 했습니다. 유다는 힌놈 골짜기 절벽 나무에 목을 맸는데 그만 줄이 끊어져서 낭떠러지 바위에 부딪히는 바람에 배가 터진 것입니다. 유다는 이렇게 아주 비참한 모습으로 인생을 끝냈습니다.
이것은 특히 우리나라의 정서로 보면 참 비극적인 일입니다. 우리나라는 비록 자살을 할지라도 육신은 소중히 했습니다. 서양인들은 총을 사용해서 자살을 합니다. 헤미웨이 같은 사람은 총구를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겨서 자살했습니다. 그러니 그 죽은 몸이 얼마나 흉칙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예로부터 자살을 해도 몸을 상하지 않게 했습니다. 조용히 목을 매서 죽었고, 물에 빠져서 죽었고, 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죽어도 피를 흘리거나 몸이 찢기거나 망가지거나 상하지 않도록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죽었어도 몸은 상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습니다. 사형을 시켜도 몸을 상하지 않도록 교수형에 처하지 목을 치거나 화형을 시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예로부터 몸을 소중히 여기는 풍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사람들이 모두 악해져서 고층 건물에서 떨어져 죽고 몸에 기름을 끼얹고 분신자살을 하고 그럽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비록 자살을 해도 이렇게 해서 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배가 터져 창자가 흩어졌다니 이 얼마나 처참한 죽음입니까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 잘 죽어야 합니다. 모양새 있게 죽어야 하고 명분 있게 죽어야 하고 고상하게 죽어야 합니다. 사람은 죽음의 모습에 따라서 그 인생이 새롭게 평가됩니다.

2. 그가 남기고 간 유산이 불명예스럽습니다.

유다가 남기고 간 유산이 무엇입니까 은 삼십아닙니까 은 삼십은 은 30세겔이라는 말입니다. 은 한 세겔은 노동자 4일 품삯입니다. 노동자 하루 품삯이 5만원이라고 하면 30세겔은 600만원입니다. 이 금액은 당시 황소가 노예를 받아서 죽이면 배상해 주는 노예 한 사람의 몸값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배반하고 돈을 받으려면 4천억 원쯤 받아 먹고 죽지 예수의 값을 고작해서 은 삼십에 팔고 죽을 것이 무엇입니까
요즘 뇌물을 받고 감옥에 가는 사람들을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왕 받으려면 많이나 받지 그 몇 푼 받고 하루아침에 명예 짓밟히고 인생 망치고 가족들 보는 앞에서 감옥에 끌려가니 그게 무슨 꼴입니까 그 정도의 돈은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살 수 있는데 고작해서 그 정도 받고 그런 종말을 맞습니까 받았으면 또 받았다고 할 것이지 한사코 뇌물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그 모습은 더욱 비굴하게 보입니다.

가룟 유다도 참 한심한 사람입니다. 고작 노예 한 사람 몸값에 자기 스승을 팔아 죽게 만듭니까 가룟 유다는 그때 자살하지 않고 끝까지 살았어도 죽을 때 아마 다른 사람들처럼 순교도 못하고 마지막에 째째하게 죽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째째하면 예수 믿는 모습도 째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피를 흘려서 순교를 하고 그러겠습니까
가룟 유다는 나중에 스승을 팔아먹은 것이 후회가 도어 그 돈을 가지고 제사장들에게 찾아갔습니다. 가서 그 돈을 제사장들에게 반환했습니다. “나는 이 돈 못 받겠으니 다시 받으라.” 그러나 제사장들이 받습니까 거절합니다. 그러자 유다가 말합니다. “그러면 이 돈을 헌금하겠다.” 그런다고 그들이 그 돈을 받겠습니까 그 더러운 돈은 헌금으로 받지 않는다고 또 거절합니다. 그러자 유다는 그 돈을 집어 던지고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길로 나가서 목을 매서 죽어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 돈을 주워다가 땅을 사서 가룟 유다의 묘지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땅을 아켈다마라고 했습니다. “피밭”이라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는 스승을 팔아서 받은 은 삶십으로 산 묘지에 묻혔습니다. 그러니 그 인생이 얼마나 한심한 인생입니까 이것이 가룟 유다의 종말입니다.
여러분, 스승을 팔아서 죽게 하고 받은 돈으로 잘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그 종말이 그렇게 비참한 것입니다. 불명예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을 남기고 가느냐 하는 것은 더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유산은 뜻이 있어야 합니다.

3. 그 이름이 불명예스럽습니다.

유다의 이름을 가룟 유다라고 하는데 가룟이라는 말은 유다의 고향이름입니다. 말하자면 남쪽 지방의 가룟 사람 유다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들이 많이 등장하듯이 이 유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유다 이름 앞에는 반드시 가룟이라는 지역 이름을 꼬 붙입니다. 그래서 유다를 지칭할 때는 으레 “가룟 유다”라 ㅎ바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하면 언뜻 더 오르는 생각이 배신자라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이름은 이렇게 불명예의 상징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가룟 유다도 귀한 집의 아들입니다. 그 부모가 아들을 낳아 놓고 큰 기대를 하면서 그 이름을 유다라고 지었습니다. “그를 찬미하자”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좋은 이름입니까 그 이름 속에 부모들의 기대와 희망이 들어 있지 않습니까
이 유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떠나려 했을 때 그 부모들이 얼마나 기대를 많이 했겠습니까 아마 부모들은 아들이 크게 성공해서 돌아오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보면 참 불명예스럽습니다. 가룟 유다, 본디오 빌라도, 헤롯, 이 세 사람의 이름은 참 불명예스러운 이름들입니다. 사람은 이름이 깨끗하고 명예가 깨끗해야 하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욕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나가서 전도하자 병자가 낫고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이 나갔습니다. 그때 얼마나 신이 났겠습니까 그래서 돌아와서 예수께 당당하게 보고를 했습니다. “우리들이 병자도 고쳤고 귀신 들린 사람에게서 귀신도 쫓아냈습니다.”하고 신이 나서 보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런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내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그것을 더 기뻐하라“ 그 말입니다. 내 이름은 소중한 이름입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이것이 이름입니다. 사람은 이름만 들으면 그 사람의 일생을 평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가룟 유다라는 이름은 들으면 금방 배신자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라는 이름은 배신자의 대명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인생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인생을 책임 있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도 받습니다. 사람은 나 좋다고 나만을 위해서 살아갈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적어도 인생은 먼 훗날의 아름다운 평가를 위해서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가룟 유다는 자기 한 사람의 욕망을 위해서만 살아가다가 그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스스로 인생을 포기한 저주스러운 인생의 모델로 우리에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욕망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의 결국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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