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이렇게 기도하라 (마 06:9-15)

첨부 1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가까이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헌신생활을 통해서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이고 봉헌생활을 통해서 가까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생활일 것입니다. 기도생활은 신앙생활에서 가장 좋은 생활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유명한 “주기도문”입니다. 주기도문이라는 말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모범적인 기도문”이라는 뜻입니다. 이 문장은 문학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상적으로 말하면 세계 최고의 사상문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이 주기도문은 그런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기도문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기도자들에게 몇 가지 기도의 법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먼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입니다. 기도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대화 목적의 기도가 있고, 또 하나는 간구 목적의 기도가 있습니다. 대화식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영적 깊이를 이루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앉아서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되면 사랑과 이해가 깊어질 수 있듯이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깊은 이해를 이루어 냅니다.
그리고 간구 목적의 기도는 우리들이 지금 흔히 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필요를 위해서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는 반드시 하나의 조건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듯에 가깝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도에는 반드시 응답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아버지의 뜻과 다르면 소용이 없습니다. 응답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아버지의 뜻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것은 하고 싶은데 하나님의 뜻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내가 하는 일을 막으십니다. 가는 길을 막으십니다. 그래서 하는 일이 안 되는 때가 있고 가는 길이 자꾸만 막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들이 그 뜻을 모르면 불평하기 쉽습니다.
우리들이 아이들을 기르면서 조그만 생각하면 하나님의 그런 심정을 너무나 절실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아이들은 때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부모에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 입장에서 보면 그 일은 아이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막습니다. 하는 일을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이가 그 뜻을 모르면 불평 불만을 하게 됩니다. 부모를 원망합니다. 그것은 부모의 뜻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그 아이들의 성숙지 못한 뜻을 들어주면 곧바로 나가서 사고를 치게 됩니다. 오늘날 아이들이 자꾸만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알고 보면 여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정신이 바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내게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라 해도 그것이 선한 방법이 아니면 그 요구를 들어주면 안 됩니다. 그때에는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아이가 절제를 할 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보면, 돈은 있고 자식은 하나뿐이니까 하고 싶다는 대로 다 들어줍니다. 마음껏 돈을 쓰게 하고 또 하고 싶다는 것을 다 해주다 보니 그 아이가 나가서 무슨 짓을 하겠습니까 나가서 무절제한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사고를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참 깊습니다. 거기에는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배려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의 요구를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부모가 냉정하게 거절하면 그때는 잠시 서운한 것 같아도 그것이 진정 자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는 먼저 아버지의 뜻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매일 매일 먹을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것은 주시려면 한꺼번에 많이 주셔서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도록 하지 않고 조금씩 매일 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이 얼마나 번거로운 일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여기에 하나님의 성도들에 대한 깊은 애착이 들어 있고 특별한 배려가 포함됨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매일같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우선 몇 가지 마음이 표현되게 되어 있습니다.
먼저 “매일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매일같이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한다면 매일같이 하나님을 찾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은 하루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또 “매일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매일같이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매일같이 기도생활을 하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잊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매일같이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 속에는 너희는 내 곁을 떠나지 말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인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들의 육신의 부모의 생각과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도 가능하면 자식들을 곁에 두고 함께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이 곁에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곁에 두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육신의 부모의 마음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 같은 부모들의 바람과는 정반대로 자식들이 흩어지는 시대입니다. 자식들은 부모 곁에서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부모 곁을 멀리 떠나지 못해서 안달을 합니다. 부모들은 시대가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수용은 하지만 속마음으로는 서운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는 아들보다 딸들이 더합니다. 약혼이라도 하면 정신이 나가 버립니다. 부모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쯤 되면 물건 하나라도 더 가져 가려고 안달을 합니다. 시집을 간 후에도 어쩌다 친정에 한 번 오면 그냥 가는 법이 없습니다. 꼭 물건 하나라도 가져 갑니다. 그런 때 부모의 마음은 서운한 법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애착을 가지고 계시지만 사람들은 그 곁을 떠나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그 곁을 떠나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장치를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매일같이 하나님을 찾으라 그 말입니다.

세 번째는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기도 가운데서도 가장 근본적인 기도일 것입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데 가장 심오한 부분은 죄사함을 받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 가운데서 가장 본질이 되는 기도는 죄사함을 위한 기도입니다. 사람은 죄를 짓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크고 작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약점입니다. 제아무리 큰 소리를 쳐도 우리는 죄를 떠나서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어떤 분은 “나는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교만이고 무지입니다. 사람이 반드시 살인을 하고 도적질을 해야만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사함을 받지 않으면 죄의식 때문에 우선 마음에 평화가 깨져 버립니다. 사람은 죄를 짓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영적인 세계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의 감정을 잘 이용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사탄은 사람의 마음속에 대고 자꾸만 약점을 기억나게 만듭니다. 잊어버리는가 싶으면 또 찾아와서 기억나게 해놓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은혜를 받고 나서 성경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하루는 밤에 조용히 앉아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사탄이 찾아왔습니다. “거룩한 체하지 말아, 당신은 위선자야”라며 벽에다 그 동안 지은 죄목을 죽 적어 놓았습니다. 루터가 보니 자신이 생각지도 못한 죄들을 모조리 적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책상 위에 있던 잉크병을 집어서 사탄의 머리에다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재빨리 피해서 없어져 버렸습니다. 던져 버린 잉크병이 벽에 부딪히면서 깨지는 바람에 새까만 잉크가 온 벽에 펴져서 사탄이 써 놓은 죄목들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때 루터가 한마디합니다 “모르고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사탄이 와서 이렇게 고발을 합니다. 자꾸만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음을 불화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사탄이 와서 고발을 하면 주어지는 것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감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맨 먼저 나타나는 증상이 바로 자신감의 상실입니다. 마음에 떳떳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그때부터 어두움을 좋아하게 되고 사람들을 피하게 되고 기쁨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죄는 사람을 망가트려 놓습니다.

또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자꾸만 거짓말하게 됩니다. 이것이 두 번째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당신 뇌물 먹었느냐”하고 물으면 100%의 사람은 절대로 먹지 않았다고 대답합니다. 우선 우리고 봅니다. 나는 그런 사람은 보지도 못했고 그런 사람 알지도 못하며 그를 만난 일도 없고 금시초문이라고 잡아뗍니다. 잠시 후면 금방 탄로날 일인데도 불구하고 우선 우기고 봅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은 순순히 자백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사이에 틈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들이 죄를 지으면 곧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먼저 마음에 자괴감이 생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아담이 그래서 하나님을 피한 것입니다. 그런데 죄도 큰 것은 생각나는데 작은 죄는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말합니다. 마음이 어두워서 보지 못해 그렇습니다. 물도 컵에 따라 어두운 데서 보면 모두 생수같이 보이고 깨끗해 보입니다. 어두워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밝은 곳에서 보십시오. 그렇게 깨끗하게 보이던 물 속에 불순물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좀 어두운 데서 사는 것이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우리들의 눈이 좀 어두운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들의 눈이 현미경처럼 밝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보지 않아도 될 것은 보지 않고 그냥 먹는 것이 좋습니다. 먼지도 적당한 먼지는 그냥 먹고 하는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 병균도 적당히 먹고 살아야 면역성이 생깁니다. 지나치게 맑으면 면역성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선 볼 때 자신 없는 분은 좀 어두운 곳에서 보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그리고 데이트할 때는 가급적 밤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어지간한 결점은 모두 감추어집니다. 사람이 외모에 아무리 자신 있어도 밝은 곳에서 보면 얼굴에 잔주름까지 다 보입니다. TV에 나오는 텔렌트들을 보십시오. 탤렌트들은 TV에 나올 때 모두 얼굴을 포장하고 나오지 않습니까 밝은 빛에 비추니까 잔주름까지 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사함받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고상한 기도는 죄사함의 기도입니다.

네 번째는 용서하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내가 사함받은 것같이 너도 용서하라 그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주기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지은 죄를 사함받는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축복은 나에게 죄 지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들이 그렇게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모두 한이 많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에 맺힌 것이 많습니다. 형제간에 맺힌 것이 많습니다. 교우간에도 서로 맺힌 것이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1부 예배에 나오고 또 한 사람은 4부 예배에 나옵니다. 보기 싫어서입니다. 언제까지 그러겠습니까 그래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것처럼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우리는 하나님께 당당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얼마나 당당한 기도입니까 “내가 남의 빚을 탕감해 주었으니 내 빚도 탕감해 주옵소서. 내가 남을 도와주었으니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옵소서.” 사람이 이렇게 당당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을 바구어 말하면 내가 남을 용납하지 못하면 누구로부터 용납받을 수가 없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웨슬리가 길을 가다가 잘 아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친구와 원수로 지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지금은 친구를 용서했습니까” 그랬더니 하는 말이 “그 놈은 죽어서도 용서 못합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