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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좁은 문 좁은 길 (마 0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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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응 이 땅에 오셔서 모범적인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다하는 하나의 모범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면에서 모든 사람의 모델이고 삶의 기준이고 원칙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구세주라 하고 목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비신자들은 그분을 가리켜서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주님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기준입니다.
사람은 살아가는 데 하나의 모델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모습에 기준을 삼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일찍이 좋은 모델을 발견한 사람은 평생을 그 기준의 틀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아주 려러서부터 좋은 아버지 밑에서 자랐거나 아주 좋은 스승을 만난 사람은 평생 동안 그 영향을 받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그만큼 좋은 모델을 통해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좋지 않은 모델을 발견한 사람은 그 부정적인 영향이 평생 동안 미치게 됩니다. 술주정이 심하거나 노름을 하거나 폭행을 일삼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이 있다면 그 영향은 알게 모르게 평생 동안 미치게 됩니다. 아버지의 부정적인 모습을 보고 눈물로 자란 아이들은 자란 후에 그런 생활을 하지 않을 것같이 생각되지만 자란 후에 보면 그 아버지의 부정적인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모델이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악영향이 그대로 알게 모르게 지성과 정신적 기초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은 이렇게 이 땅에 오셔서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의 살의 모델로서 살아가셨습니다.

삶의 기준이었습니다. 삶의 표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성자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모든 삶의 기준이 되고 정신적인 지주가 되고 하나의 모델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삶의 한 방법도 제시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살되 어디에 관심을 더 두고 살아가야 하는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되 어떤 부분에서 더 비중을 두고 어디에 더 악센트를 두고 살아가야 할지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본위의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본위의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 보통 사람들은 모두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지극히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손해를 보면 다투고 싸우고 고발하고 소송을 걸고 그럽니다. 우리 보통 사람들은 이 차원을 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한계입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엉망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매일같이 다투고 싸워서 이 세앙은 혼란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사람들이 모두 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이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50억 원이라는 거액의 재산을 부모 없이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해서 써 달라고 선뜻 내놓았습니다. 몇 백억의 재산 중에서 50억을 내놓은 것이 아니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50억 재산을 모두 내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런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보면 가끔씩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곤 합니다. 알고 보면 이런 사람이 몇 명 되지는 않지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이 세상을 힘있게 유지시키고 지탱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삶의 방향을 이렇게 제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의 공생애 기간을 보내실 활동 지역을 택하실 때 갈릴리를 택하셨습니다. 그곳은 당시로서는 가장 소외된 지역이고 낙후된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 사회에서 실패하고 낙오된 사람들은 모두 그곳으로 몰려와서 살았습니다. 그곳에 병자들이 많았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많았던 이유도 알고 보면 낙오된 사람들이 몰려와 살았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낙오된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은 병자들이 많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에서 그들을 위로하셨고 병을 고치셨고 전도하셨고 먹을 것을 주시면서 3년 동안 함께 살아가셨습니다. 그 생활은 쉬운 생활이 아닙니다. 고되고 수고로운 생활입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어 주어야 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베풀어야만 하는 생활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런 생활을 마다하지 않고 스스로 그곳을 선택하여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넓은 길은 넓고 가기가 편하지만 그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다”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을 쉽게 살려고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은 잘 살고 풍요롭게 살고 편안하게 살고 문화를 즐기고 풍부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수고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그런 삶을 살아가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죽음의 시범”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모습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사람이 저렇게도 죽을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명분 있는 죽음입니다.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은 개인적인 이유만 지닌 채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되 명분 없이 죽는 일보다 더 슬픈 일은 없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의 죽음의 모습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도 중요하지만 종말의 모습은 더욱 멋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죽음에는 분명한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평생 신앙생활하고 천국을 소망한다고 했으면서도 죽을 때에는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서 무서워 떨고 두려워하고 어쩔 줄 몰라한다면 그것은 수치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진가는 종말 때 나타납니다. 임종 때에 그 사람의 신앙의 진면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죽음의 모습에는 무엇인가 메시지를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죽기 전에 30분짜리 테이프에 녹음을 했습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그 녹음기를 틀어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귀기울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김장로님, 그 동안 참 고마웠습니다. 목회를 잘 하도록 도와줘서 참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그런데 김장로님 설교 시간에 하품 좀 하지 마세요” 그럽니다. 그 순간 조용하던 식장에 순간적으로 폭소가 터졌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장면입니까 그곳에 해학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유가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최권사님, 그 동안 참 고마웠소, 나를 위해서 불철주야로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 것 감사드립니다. 권사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을 것이오” 하고 감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조객들에게 인사의 말씀도 있었습니다. “여러분, 나 먼저 갑니다. 부디 열심히 신앙생활하시다가 이 다음에 기쁘게 만납시다” 그러고는 육성이 끝났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종말 모습입니까 거기에 어떤 느낌을 주는 메시지가 흐르고 있지 않습니까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죽음은 모두 부정적인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죽음에 대해서 또 다른 느낌을 갖게 되고 신앙인의 멋을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종말의 때가 가장 중요한 때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소위 가상칠언이라고 하는 십자가상에서 외치신 일곱 마디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내용들이 모두 공적언어들입니다. 공인다운 말씀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진실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고 진지하게 신앙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부활 시범도 보여 주셨습니다. 사실 엄밀히 생각하면 죽음이라는 것은 두렵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누구도 죽음 이후의 세계를 보고 온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죽은 사람만이 그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망한다고 찬송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죽기는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의 세계를 확실하게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다음의 과정을 시범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자리에서 보란 듯이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이 종말이 아니고 끝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시범적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영광의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이고 과정임을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길을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의 모범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사람이 살아가되 어디에 뜻을 두고 살아가야 하며 어느 부분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가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삶의 모델이십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살아가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길을 좁은 문이라 했고 좁은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 삶의 내용을 마태복음 5,6,7장에서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모두 어려운 삶의 원리들입니다. 어렵기에 그 길이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살아가는 데는 힘겹지만 주어지는 상이 크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2. 그런데 사람에게는 이렇게 수고하고 힘들게 살려고 하지 않고 쉽게 살려고 하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 속성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좁은 길보다 넓은 길을 가려는 속성”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생리입니다. 사람은 좀더 편안하고 쉽고 화려하게 살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게을러지고 가난해지고 놀기를 좋아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그 속성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려운 일보다는 쉬운 일을 하려는 속성”도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3D직종이라 해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런 경향은 요즘 신세대들에게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즘 신세대들은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비스업이나 술집에 들어가서 쉽게 일하며 편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곳에서 일을 하게 되면 살아가기는 쉽고 편안하겠지만 평생 가도 장래성은 없습니다.
사람이 쉬운 일을 좋아하면 장래성이 없습니다. 상급도 없습니다. 올림픽 경기를 보면 쉬운 경기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렵기에 그만큼 상급이 크고 영광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운 경기는 인기도 없고 상급도 없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기술을 누가 인정해 줍니까 사람이 이렇게 쉽게 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노자는 “대방무우(大方無隅),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큰 인물이나 큰 그릇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수련하고 노력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발명왕 에디슨에게 와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리 쉽게 물건을 만들어 내느냐, 당신은 천재다.” 그 말을 들은 에디슨이 말합니다. “천재는 99%의 땀과 단 1%의 영감으로 구성됩니다.” 이 말은 세상에 쉽게 무엇이 이루어지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천재들은 저절로 생각이 떠오르고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천재는 남들이 무사안일하게 허송 세월하고 편안함의 잠에 취해있을 때 밤을 새워 수고하고 노력하고 연마해서 천재다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 고사성어에 보면 “백련천마(百鍊天馬)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번 연습하고 천 번 갈고 닦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그렇게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 길은 수고의 길이고 고독의 길이고 배반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얼마든지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 길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에게 부활이 주어졌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고 했습니다.

또 사람에겐 “돌아가는 길보다 지름길로 가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원칙적인 길은 모두 돌아가는 길입니다. 보다 안전한 길은 모두 돌아가는 길입니다. 지름길은 편법입니다. 그 길을 가면 일시적으로는 쉽고 편리하지만 후에 가서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지름길이나 편법은 권장할 만한 길이 아닙니다. 사람이 편법을 쓰고 지름길을 좋아하면 일시적으로는 횡재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큰 손해를 보게 됩니다.
요즘 당산철교 철거로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그 다리는 10년밖에 안 된 다리입니다. 정상적이라면 5,60년을 사용할 수 있는 다리입니다. 그런데 왜 헐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편법으로 건설되었기 때문입니다. 꼬박 3년 걸려서 건설해야 할 다리를 2년도 안 되어서 건설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기간은 그만큼 이득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00억을 들여서 지어야 할 다리를 사람들이 돈을 다 떼어 먹고 50억 가지고 건설했습니다. 모두 편법입니다. 그러니 그 다리가 어떻게 수십년씩 수명이 연장되겠습니까
그렇게 떼어먹을 때는 좋았는데 이제 와서 다시 건설하려니까 기간은 더 오래 걸리고 경비는 몇 십 배가 더 소요되는 것입니다. 결국 시간적으로 손해 보고 돈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고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을 겪어야 합니까 좀 늦어도 바른 길로 갔더라면 오늘 이런 일은 발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지름길을 택하여 가다가 낭패를 당하는 일이 그뿐입니까 콩나물 장사가 콩나물을 기르려면 맑은 물을 줘서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그 콩나물을 먹는 사람들이 건강하고 파는 사람들도 보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보람이라는 것이 상실된 세상입니다. 모두 농약을 쳐서 콩나물을 기릅니다. 그래야 빨리 자라고 또 그래야 돈을 단기간내에 더 벌어들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편법입니다. 지름길을 가는 것입니다 오늘 발생되는 사건들을 보면 모두 사람들의 이런 사고 때문에 발생되는 것입니다.

3.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하나의 흔적을 남겨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생활이 어렵기에 주님은 그런 생활을 좁은 문을 들어가는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슈바이처는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30세까지는 자기 학문을 하고 자기 철학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만 사람이 30세가 넘으면 모두를 위해서 살아갈 줄 알아야 한다.” 그 말을 남기고 그는 아프리카 랑바레네로 떠났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것이 주님이 주시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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