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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인미답의 길에서 (수 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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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12살쯤, 초등 학교 4,5학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몇 학생을 앞에 놓고 특별 지도를 하시던 담임 선생님께서 느닷없이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참 좋겠다. 너희들 나이로 봐서는 2000년이 되는 해를 볼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나는 틀렸어.' 그런데 그 분 연세로만 보아서는 만일 장수만 하셨다면 충분히 2000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일찍 떠났습니다. 저는 그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선생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나'라며 전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항상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공부한 것은 다 까먹었는데 그 말은 남아 있습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세상 경험을 하면서, 함께 공부하던 급우들이 젊은 나이에 세상 떠나는 것을 여러번 보게 되면서, 2000년이 되는 해를 바라보고 그 정상까지 올라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교회 20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일찍 불러 가신 분들이 벌써 2천명이 넘습니다. 그 가운데는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대부분이지만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신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 비하면 소위 말하는 뉴밀레니엄이 라고 하는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는 이런 기회를 함께 누리고 되었다는 것, 그것도 자유와 평화와 번영이 어느 정도 보장이 되고 있는 환경에서 새해를 맞게 되었다는 것은 참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 새해라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달력을 새 것으로 갈아서 1월말을 펼쳐 놓고 쳐다보면 달라진 것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뜨고, 우리는 똑같은 집에서 하루 세끼 먹고, 똑같은 일을 합니다.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이야기 한 것처럼 해 아래서는 새 것이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이야기하면 해 아래는 새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앞에 새로운 도전과 새로운 사건이 기다리고 있고, 새로운 제품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새로운 변화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희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우리는 새로운 시간을 시작했고, 새로운 천년을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서 새해에 경험하는 것들이 다를 것입니다. 해를 거듭하면서 앞으로 수 십년 동안 각자 나이에 따라 경험하는 것이 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산을 오르는 젊은이들처럼 힘차게 도전하는 생을 사는가 하면, 금년에 벌써 정상에 올라가 있는 것처럼 인생의 절정을 맛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벌써 금년부터 하산하는 사람들처럼 인생의 내리막길의 쓴맛을 은근히 맛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겪을 수많은 사건을 새롭게 경험해야 하고 거센 도전에 힘겨운 응전을 하면서 새롭게 하루하루를 맞아야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길은 아무도 가 본 길이 아닙니다. 이런 의미에서 전인미답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길을 열고 첫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어떻게 가야 하겠습니까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는 이 길을 나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이 거기에 대해 나름대로 중요한 진리를 가 르쳐줍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을 벗어나 40여년 동안 광야에서 연단을 받는 사이에 태어난 신세대들이 있었습니다. 40년 동안 인간이 살만한 조건은 하나도 갖추지 못한 광야에서 연단과 훈련과 고통을 맛본 신세대들이 '여호수아'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앞세우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꿈에도 그리던 가나안 땅을 향해 계속 진군해 왔습니다. 이제 요단강 변에 도착했습니다. 물론 이미 통과한 땅도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의 일부에 속하기는 하지만 참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요단강을 건너면서 시작되는 땅이었습니다. 여기 까지 왔는데 그 앞에는 요단강이 가로 막고 있고 요단강 건너에는 난공 불락이라고 알려져 있는 여리고성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이런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4절에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 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옛날에는 가보지 못한 길, 처음 발을 내딛는 길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전인미답의 길에 들어섰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새로운 세대들에게 두가지를 특별히 명령하셨습니다.
첫째는 '너희들 스스로를 성결케 하라'는 것입니다. 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서 기사를 행하시리라.' '성결케 하라. 너희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는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의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의식입니다. 먼지를 뒤집어 쓴 옷, 땟국이 흐르는 옷을 요단강 물에 시원하게 빨아서 말린 후 깨끗하게 입도록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외에도 성결케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의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왜 성결케 하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하나님이 이적을 행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리라.' 그 기사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요단강을 갈라서 그 강바닥을 마르게 하시고 백성들이 아무 어려움 없이 건너도록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적을 행하시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먼저 성결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룻배를 만들거나 밧줄을 양쪽 끝에 매달아 놓고 요단강을 힘겹게 건너가는 것을 허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 서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설혹 그렇게 해서 건너간다고 해도 건너가는 도중에 여리고에 있는 군대들이 쏟아져 나와서 공격하기라도 하면 마치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 대첩 때 중국 군인들을 전부 물 속에 장사 지낸 것과 같은 비극이 벌어질 확률이 참 높았습니다. 2백만 명이 어떻게 밧줄을 타고 나룻배로 건너갑니까 그 당시만 해도 겨울 우기를 맞아서 강물이 불어나 둑위를 넘실거리며 큰물이 흘러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라고 해서 큰 기대를 갖고 갔다가 제일 실망하는 곳 중에 하나가 요단강입니다. 기회를 내서 가 보셔야 되겠지만,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하고 찬양하면 환상적인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요단강이 얼마나 파랄까 얼마나 크고 넓은 물이 되어서 흘러갈까' 이런 상상을 하고 가보면 실제로는 조그만한 개천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놓고 요단강, 요단강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3500여 년전의 사건입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합니다. 30,40년 지나서 고 향에 한번 가 보십시오. 옛날에 그렇게 커 보였던 개천이 지금은 하수 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3,500년 전이었으니까 이 강이 만만치 아니한 강이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강을 건너가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안됩니다. 그 많은 대군이 적의 공격을 받지 않고 무사히 건너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임하셔서 '내가 건너게 해 주마.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들 자신을 성결케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옷을 빨았습니다. 옷을 빨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임하셔서 기적을 베푸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합니다. 더러운 곳에 하나님이 임재할 수 없습니다. 더러운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결하게 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이 요구하신 것은 언약 궤를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언약 궤를 따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언약 궤는 법궤라는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궤짝 하나를 만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궤짝 안에 하나님이 직접 써 주신 십계명의 돌판을 넣도록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40 년 동안 먹여 살렸던 신비의 양식,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서 넣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봉한 후 금으로 장식을 해서 특별히 구별하여 모셔놓게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그 법궤 앞에 와서 기도도 하고 예배도 드렸습니다. 이것이 법궤입니다.
이 법궤는 두 가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물건이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이는 않는 하나님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법궤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는구나. 저기 계신다.' 이렇게 항상 고백할 수 있도록 만드는 상징물이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그 안에 율법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우리를 교훈하시는 곳이다' 하는 것을 법궤를 볼 때마다 그들은 알았습니다. 이와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 법궤는 절대 보통 사람이 만 지면 안됩니다. 항상 하나님이 따로 구별한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고 운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사장들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갈 때 이스라엘 백성은 그 뒤를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구름 기둥을 보고 따라오라고 하셨는데, 이번에는 구름 기둥은 없었습니다. 대신 법궤를 보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법궤를 보고 따라와도 2천규빗 정도의 거리를 두고 따라 오라고 했습니다. 2천 큐빗은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약 1km가 되는 거리입니다. 1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백성들이 따라 오도록 했습니다. 그 법궤를 따라가면 요단을 건널 수 있고 하나님이 약속한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천여m 거리를 두고 따라오라고 했을까요 아마 하나님의 거룩을 범하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간격을 두신 것 같습니다. 또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는가를 좀더 신중하게 보려면 거리를 두고 보아야 하는 이유때문인 것 같습니다. 너무 바짝 다가가면 법궤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빨리 갈 것인지 늦게 갈 것인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잘 못하면 백성들이 법궤 앞으로 성급하게 달려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리를 두고 하나님이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면밀히 조사하여 하나님이 빠르게 가시면 그들도 빠르게 따라가고, 하나님이 천천히 가시면 그들도 천천히 따라오고, 하나님이 오른쪽으로 가시면 그들도 오른쪽으로 가는 식으로 법궤를 따라 오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두 가지 진리가 있습니다. '성결하라. 기적을 행하겠다.' '법궤를 따라 오라. 그리하면 네 길이 열리리라.' 이 두가지 였습니다. 전인미답의 길을 향해서 발을 옮겨 놓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두 가지를 요구하셨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진리들을 새로운 천년, 전인미답의 길에 들어선 우리에게 적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절대로 필요합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앞에도 요단강이 소리를 지르면서 흘러내려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기적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내보내시면서 아무 것도 못하는 무능한 존재로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 나올 때에 자기 먹을 것 가지고 나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홉 가지는 내 힘으로 했다고 할지라도 한 가지는 내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할 수 없는 이 한 가지 때문에 내 인생의 운명이 좌우되는 수도 많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 보다 내가 하지 못한 한가지가 더 중요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럴 때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7전8기하면서 오늘날까지 악착같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일어 설 힘조차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면 못 일어납니다. 그렇게 믿었던 건강을 갑자기 잃어버렸을 때 모든 것이 다 날아갑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기적만이 나를 다시 회복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믿었던 자녀들이 갑자기 탈선 하고 잘못됩니다. 아무리 구슬리고 아무리 협박하고 아무리 매를 때려도 소망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지도 모르는 시험에 빠졌을 때 내 힘으로 그 벼랑을 타고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만만치 않은 도전들을 받을 때에 준비가 안돼 있다든지 나에게 도전할 능력이 없을 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우리 앞에 도도하게 흘러 내려 가는 요단강을 말려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할 때가 우리 생애에도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영원하신 우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홍해를 갈라 이스라엘 백성을 건너가게 하신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광야에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내려 40년 동안 수 백만 명의 백성들을 먹여 살린 분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메마른 광야에서 바위를 깨뜨리시고 강물처럼 물이 솟아나게 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십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을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 오시 옵소서. 요단강을 갈라 주옵소서. 기적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시편105 편 4절의 말씀처럼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호와와 그 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자신을 스스로 성결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보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그 마음에 오십니까 미워하고 증오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더러운 생각을 가슴에 품고 있는 마음에 하나님이 어떻게 기적을 행하십니까 가정에 죄가 있을 때, 그 가정의 어려운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수 있을까요 냄새가 온 사방에서 진동하는 가정에 어떻게 하나님이 앉아서 이적을 행합니까 어떻게 요단강을 말려 주십니까 죄를 끌어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불의와 항상 짝 하면서 돈을 벌어야 되는 생계에 몸담고 있습니까 그 직업을 당장 내버려야 될지 어떻게 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 자신에게는 이런 확신이 있습니다. 아무리 형편없는 직업이라도 내가 빛과 소금의 역할만 제대로 하면 그 직업 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일단 죄와 짝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래서 내 직업을 거룩하게 하나님의 제사가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우리 하나님이 능력 있게 임하셔서 필요할 때마다 기적을 주십니다.
어떤 유명 인사가 일간지 기자와 함께 인터뷰한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정치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양해하고 들으십시오. 사실이니까요. '요사이 우리 나 라 정치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십계명 중 세계명은 식은 죽 먹기로 범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 대체 무슨 십계명을 그렇게 범하는 가 살펴보았더니, 첫째로는 '도적 질 하지 말라.'는 계명이었습니다. 그들은 지능적으로 도둑질하면서 자기 배만 채운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인데 그들은 정적이나 자기에게 거추장스러운 사람들은 무조건 보복하고, 집어 넣고, 중상 모략해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죽여놓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인데 거짓말을 얼마나 잘 하는지 꼭 참말처럼 들리게 하기 때문에 거기에 다 넘어 간다는 것입니다.
정치인들만 이렇습니까 오늘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얼마나 더럽습니까 이런 나라에 하나님이 어떻게 임하셔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겠습니까 거짓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와 사회 전체가 거짓으로 가득차게 되어 이제는 누구 말이 옳은지, 무엇을 믿어야 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야에서 옳은 것과 거짓된 것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전문 수업을 특별히 받아야 될 정도의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가격표를 보고 그것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물건의 생산지 표시를 보고 믿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약품의 정량도 다 속이지 않습니까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하고 전통 있다고 하는 제품일수록 더 가짜가 판을 치는 이 세상입니다. 거기에 기독교인들도 다들 한 몫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런 기막힌 현실 속에서는 아무리 새벽에 나와 기도해도, 아무리 주여 삼창하며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천장이 날아갈 듯이 아우성을 쳐도, 하나님은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렇게 기도 많이 한다고 떠들어대도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성결케 해야 되는데, 성결케 하지는 않으면서 '하나님 오시옵소서. 기적을 행하시옵소서.'라고 기도만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장5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가까이 한다는 말은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회개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그렇게 해야만 하나님의 도우 심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결에 실패하는 이유는 약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손에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성령이 거하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교회를 통해서 양육 받게 하시고 훈련받게 하셨습니다. 어지간한 것은 다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성결에 실패합니까 왜 죄와 손을 잡습니까 순종하려고 하는 의지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겠다는 결심만 바로 서면 어지간한 것은 다 우리가 정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결하지 못해서 이적이 없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내 삶 을 성결한 환경으로 만들고 하나님이 오셔서 이적을 베푸시는 생을 살고 싶습니까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인구의 1/4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이 나라의 꼴이 이게 뭡니까 밤이 되면 너무나 많은 십자가의 네온사인 때문에 이미지가 이상하게 보이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이 이게 뭡니까
유럽 어느 나라에서 지난 몇 년 사이에 환경이 다시 좋아지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럽도 한 때는 환경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살기 좋고 쾌적한 나라로 바뀌었는지 알고 싶어서 기록을 보니까 전체 인구의 3%에 해당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환경 보호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쓰레기를 분리 수거하는 것과 같은 아주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정성을 다해 환경을 살리려고 노력한 덕분에 오늘 유럽 사회가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 고 있지 않습니까 바다 물이 저렇게 짜고 썩지 아니하는 이유는 3%의 염분 때문이라는 것 말입니다. 바닷물의 95%가 소금이 아닙니다. 겨우 3%의 소금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는 영원히 썩지 아니하고 항상 짠맛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3%만이라도, 사랑의 교회만이라도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거룩한 환경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한다면 이 나라가 깨끗해 질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임하실 수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소한 예입니다만 한번 들어보십시오. 1930년, 프로펠러 하나 달린 단발기를 몰고 대서양을 처음 횡단 한 영웅이 있었습니다. 린드버그 대위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생 명 걸고 한 모험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그 일에 도전했다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린드버그 대위는 조그마한 비행기를 타고 서른 몇 시간 동안 대서양을 횡단했습니다. 그리 고는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가 영웅이 된 다음에 파리를 한번 방문했는데 그가 온다는 말을 듣고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렸습니다. 어느 큰 담배 회사 사장이 '이것 참 좋은 기회다.'라는 생각이 들어 자기 회사 담배를 광고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린드버그에게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담배 한 개피를 주면서 '선생님, 이것을 손에 끼어도 좋고 입에 물어도 좋습니다. 포즈 한 번만 잡아 주십시오. 그러면 사진 한 장을 찍는 대가로 5만불을 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반세기 전에 5만 불이라면 대단한 액수입니다. 담배라는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담배라는 용어가 성경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피워도 그만이고 안 피워도 그만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죄가 된다, 안 된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반세기 전에 미국 그리스도인들은 대단히 엄격했습니다. 술과 담배를 철저히 금했고, 심지어 죄라고까지 이야기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사회를 더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깨끗한 공기만 들이쉬라고 구멍 두개를 뚫어 주셨는데 그것으로 연기통을 만들고 있으니 좋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할 수 있으면 피우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담배 회사 사장이 그렇게 엄청난 제안을 하자 린드버그가 얼굴 표정을 싹 바꾸고 이런 말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세례받은 교인입니다.' 이 말이 파리 신문에 기사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그 당시에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 자기들이 성금을 모아 서 10만 불을 린드버그에게 갖다 주었습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담배끊으시지요. 그리스도인답지 못합니다.'라는 말을 들어도 코방귀도 안 뀌던 사람 이 병원에서 내과 의사에게 진찰을 받은 후에 '당신 폐에 큰 문제가 생 길 수 있습니다. 끊으십시오.'라는 말을 들으면 그 다음날부터 당장 담배를 싹 끊어 버립니다. 순종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담배나 술은 금방 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죄도 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만한 은혜는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적을 원하십니까 요단강이 가로막힐 때 하나님이 그 요단강 물 사이를 끊어서 마른땅을 열어 주시기를 원합니까 거절할 것은 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끊을 것은 끊을 줄 아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일에는 힘쓰지 않고 급할 때만 '하나님, 하나님.' 하고 찾는 식의 흔해 빠진 무속 신앙을 믿는 신앙 생활은 하지 마십시오.
다음에는 우리에게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전인미답의 길은 확실한 안내자가 앞서 가야 합니다. '21세기 사전'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쟈크 악달리라고 하는 사람인데, 21세기에 일어날 수 있는 새로운 일을 전부 모아서 정리를 하다 보니 그만 사전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21세기 사전'입니다. 그 책을 보면 21세기 사람들의 특징은 도 시유목민이 된다는 말이 나옵니다. 살기는 도시에서 삽니다. 초원에 사는 것도 아니고, 산에 올라가서 짐승을 키우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살기는 번화한 도시에 사는데 그들의 정신 세계, 그들의 마음은 전부 유목민의 것과 같습니다. 정착이 안되는 것입니다. 안정이 안되는 것입니다. 눈만 뜨면 '무엇을 하고 살까 오늘은 어디를 갈까 이 아파트는 이제 진저리 나니까 팔아치우고 좀더 좋은 데로 가면 안될까' 하며 날마다 생각이 붕 떠있습니다. 방랑인이요, 유목민입니다. 21세기 사람들이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만약에 우리 모두가 그런 성향으로 변한다면 날마다 어느 길을 가야하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는 안내자가 얼마나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안내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21세기 사람들은 유목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벌써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기업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앞으로는 아마 재벌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우수한 인력들은 재벌의 그 숨막히는 분위기에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빠져나갑니다. 재벌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반면에 벤처산업이 점점 점점 활기를 띨 것입니다. 그러나 벤처 자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우수한 인력들은 제 마음대로 빠져나가 버립니다. 이처럼 기업의 모든 환경을 바꾸어 버립니다. 인터넷은 문화를 바꾸어 버립니다. 가치관까지 바꾸어 버리는 세상이 이제 우리 눈 앞에 왔습니다.
온 사회가 점차 디지털화 되어 가면서 생활 방식이 완전히 바뀝니다. 완전히 180도로 달라집니다. 힘들게 시장 바구니 들고 왜 백화점까지 가서 돌아다닙니까 집안에서 키보드만 두드리면 무엇이든지 다 구입할 수 있고 배달까지 되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합니까 전화기를 들고 ' 여보세요. 114지요. 무슨 무슨 회사 전화 번호 좀 가르쳐 주세요.' 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디지털화 된 컴퓨터만 켜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가 온통 바뀝니다.
최근에 신문에서 '소익부 노익빈' 이라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저도 처음 듣고 여러분도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이제 갓 결혼한, 젊은 사람들은 작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깁니다. 가지고 있는 돈도 얼마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차도 작은 것을 타 고 다니는 것이 상식이라고 알고 있어요. 그리고 적어도 50대 이상 되면 그 사람의 경력과 경험에 의해서라도 지금까지 노력한 그 결과에 의해서라도 큰집에서 살고, 큰 차를 굴려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이처럼 나이가 조금 들고 안정된 세대는 돈이 많고, 나이가 어리고 이제 갓 출발하는 신세대는 돈이 없다고 항상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앞에 이제 막문을 연 21세기는 불과 10년 안에 거꾸로 됩니다. 젊은 사람일수록 돈이 더 많아집니다. 큰 차를 타고 다니고 큰 맨션에 삽니다. 40대 후반만 되어도 벌써 그 사람은 밀리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는 작은 집을 찾아야 되고, 작은 차를 타야 됩니다. 여러분, 이런 세상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경험이나 경력을 중요한 자산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그까짓 것들은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지식, 새로운 것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앞에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가 그 사람의 장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변화가 심하기 때문에 그 변화에 얼마만큼 신속하게 응전하는가 하는 순발력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0대, 30대를 40대, 50대가 따라 잡을 수 있습니까 경쟁할 수 있습니까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벌써 40대 중반만 넘었다 하면 손털게 생겼습니다. 요즘에 정치가들도 그렇고 기업 재벌들도 그렇고 전부 나이가 낮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살아 남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이런 요지경 같은 세상이 우리 눈앞에 문을 열고 있는데 우리 힘으로 길을 찾아서 걸어가겠습니까 우리 힘으로 선택을 잘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믿을 만한 안내자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제 나이쯤만 되어도 그렇게 잘 하던 컴퓨터인데 손가락 하나도 대고 싶지 않습니다. 적어도 나이가 40대만 넘어가도 쫓깁니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기가 벅차 집니다. 머리가 빠르게 회전이 안됩니다. 밀리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안내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법궤가 안내를 했듯이 우리에게도 법궤가 필요합니다. 그 법궤가 오늘날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법궤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하나의 상징물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법궤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흔적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살아 계신 하나님입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는 영원한 말씀입니다. 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의 안내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을 나의 인생 여정의 안내자로 삼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없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습니다. '주여, 나의 안내자가 되어 주시옵소서.' 라면서 두 손을 흔들어도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나를 인도하고 계시는지 알기가 오히려 더 어려워집니다. 이 예수님을 안내자로 삼고 따라가는 방법이 없을까요 하나님께서 방법을 하나 주셨습니다. 성경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펴면 우리는 우리 인생 길을 안내하기 위해 준비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 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듣고, 말씀을 배울 때에 성령이 우리 마음을 감동하십니다. 그리고 깨닫게 하십니다. 잘 들으십시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살아계 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는데, 그 음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깨달음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성경 말씀을 통해 설교를 듣고 성경 말씀을 공부할 때에 성령이 우리 마음에서 역사 하십니다. 그래서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그 음성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깨달음이라고 했습니다. 유달리 나를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라는 확신이 생기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 깨달음이 바로 주님이 나를 안내하시는 손길입니다. 그 깨달음으로 인하여 '이것을 해야 되겠다, 안해야 되겠다. 혹은 이 길은 가지 말아야지 좀더 기다려야지. 아니야.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 이 길은 어려워도 하나님이 가라고 하는 길이 야.'라는 것을 나름대로 다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나이다.'라고 말한 위대한 선배들의 말씀, 간증을 마음에 잘 담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놓고 이렇게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여, 나에게 듣는 법을 가르쳐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런 기도가 항상 우리 가슴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 주님이 나의 안내자 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 주일 예배를 등한히 하지 마십시오. 이 시간에 아무리 형편없는 설교자가 설교를 해도 하나님께서는 여러 분의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아, 그렇구나.' 하 는 깨달음이 계속해서 오고, 집에 돌아가서도, 자동차를 타고 갈 때도 그 말씀이 자꾸 반복이 되어서 생각이 나고 그 말씀이 이상하게 나를 끌고 가는 것 같이 느껴질 때는 벌 써 여러분을 인도하는 분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설교 듣는 것을 등한히 하지 마십시오. 수요일 저녁 도 열심히 나오십시오. 다락방에도 열심히 나가서 배우십시오. 할 수 있는 대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주님을 나의 안내자로 삼고 그가 제시 하시는 길을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데 등한히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잠언 3장 5절, 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앉는 것입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놓고 살아 계신 주님 의 음성을 들으려고 겸손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기다리면 주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제는 내가 이 세상을 따라 잡을 수가 없어. 경쟁에서 도무지 살아남을 길이 없어. 도무지 안되겠어. 포기해야 되겠어. 손털어야 되겠어. 그런데 내 가족들은 어떻게 하지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야 되는데 나는 어떻게 하지' 이런 암담한 상황에 빠질 때마다, 요단강 물이 내 앞에서 우뢰소리를 내면서 흘러가는 답답한 상황 앞에 놓일 때마다 하나님 말씀을 펴놓고 '주여,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 주소서.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깨닫게 해 주옵소서.' 하고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면 우리 주님은 우리 모두를 인도하십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은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정확한 길을 인도하십니다.
우리 모두 전인미답의 길을 들어섰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필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성결케 합시다. 우리 모두는 눈 뜬 봉사와 같습니다. 전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겸손한 자세를 날마다 가집시다. 이럴 때 우리는 절대 잘못된 길을 걸어가지 아니할 것입니다. 홍해는 반드시 갈라질 것이고, 요단강은 반드시 마를 것이고, 여리고성은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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