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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 생활은 행복한 것 (요일 0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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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잘 믿는 성도들에게서 가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예수 믿는 재미가 없이 무슨 맛으로 세상을 삽니까 잘 생각해 보면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재미없이 무슨 맛으로 세상을 삽니까 이 말은 예수 믿는 신앙 생활이 굉장히 행복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고백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행복해야 됩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정말 행복해서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사람처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예수를 믿는다. 신앙 생활을 한다' 라는 것은 갈라디아서 2장20절에 나오는 말씀을 그대로 우리의 삶에서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고, 체험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20절에 보면 '이제 예수 믿은 사람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 이렇게 고백한 다음에 이런 말씀이 뒤따라 나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사랑 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러므로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다른 말로 하면 죽도록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와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습니까 사랑에 눈이 어두워진 두 연인에게는 둘만 있으면 집이 좀 작아도 괜찮습니다. 가난해도 괜찮습니다. 어떤 때는 고생을 하고 남에게 욕을 들어도 괜찮습니다. 그저 사랑하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 죽도록 사랑하신 예수님하고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행복해야 됩니다. 누구에게나 이 행복이 마음에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입니다.

제가 살던 시골 마을 바닷가에는 제가 좋아하던 조그마한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만조가 되어서 물이 가득하게 해면을 채우면 그 바위는 보이지 않습니다. 멀리서 보면 바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보면 유리알처럼 맑은 물 속에 그 바위 는 여전히 앉아 있습니다. 아름다운 고기들이 넘나들고 청초한 미역들이 춤을 추는 그런 모습을 지닌채 그 바위는 앉아 있습니다. 파도가 칩니다. 바람이 붑니다. 밖에서 보면 바위는 없는 것 같지만 여전히 그 바위는 그 자리에서 파도와 싸워 이기고 50년 전에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앉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행복도 이 바위와 같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평상시에는 '저 사람이 세상 사는 재미로 저렇게 행복해 하나 아니면 예수 믿는 재미로 저렇게 행복해 하나' 가리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예수 믿는 재미 때문에 행복해 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에 행복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끔은 눈물과 한숨과 잠못 자는 고통을 안고 씨름 할 때도 있는데 그러면 '저 사람 마음에 그 행복이 있을까' 하는 의심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파도가 넘실거리는 물 속에 그 바위가 여전히 있듯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행복의 바위가 있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를 다니는 분들 가운데 이 행복을 모르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 믿는 것이 따분하고 지루하고 너무나 힘겨워서 '어떻게 하면 이것을 좀 벗어버릴 수 있을까' 라는 생각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다가 끌려 들어와서 이 젊은 나이에, 주일날 어디 가지도 못하고 교회와서 지루하게 한 시간을 꼬박 앉아 있어야 되고, 그것도 재미있는 설교나 하면 모르지만, 어떤 때는 기분 나쁜 말도 듣고, 욕도 먹어야 하다니! 내가 무슨 팔자가 사나워서 이 꼴이 됐나.' 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이왕 예수를 믿을 바에는 한 60살 넘어서 믿었어야 하는 건데. 그 때는 할 일도 별로 없으니까 정말로 재미있게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텐데. 이 나이에 이게 뭐냐' 예배 시간도 지루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릴 때 눈을 감는 것만 해도 답답해서 빨리 뜨고 싶은 생각이 자주 들고, 성경 말씀을 읽는다는 것도 정말 부담스러운 그런 분들이 많습니다. 비정상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재미없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행복하고 재미있는 것인줄 모릅니다.
물론 믿음이 작으면 이렇게 신앙생활에 행복을 못느낄 때도 있습니다. 또 믿음이 병들어 있으면 문제도 생깁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볼 때 믿음에는 전혀 하자가 없는데도 신앙생활의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는지 안 믿는지 따져 보면 다 믿고 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체크해 보면 틀림없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 것 하나 흠을 잡을 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행복은 꼭 믿음하고만 연계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좋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아니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꼭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하십니까 정말 행복합니까 예수 믿는 재미가 없이 무슨 세상 살 맛이 있느냐고 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예수 믿는 것 그 자체가 무거운 짐이 되어 버린 그런 분들은 아닙니까 자기를 한번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읽은 말씀이 정확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것이 답입니다. '왜 나는 예수 믿는데 재미가 없을까 왜 행복하지 못할까' 그 이유는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될 사람이 세상도 동시에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음이 갈라졌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 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이 말은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또 달리 표현하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절대 신앙생활은 행복하지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행복을 원하느냐 정말 신앙생활의 기쁨과 능력을 체험하기를 원하느냐 마음을 나누지 말라.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 마음을 드려라.' 하는 말입니다.

여러분, 두 여자를 한꺼번에 사랑하는 남자 치고 행복한 사람 보셨습니까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뿐이기 때문에 아무리 두 여자를 사랑하고 싶어도 둘을 한꺼번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진짜 사랑은 한 쪽에게만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쪽을 다 가슴에 품고 마음이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해 보십시오. 갈등밖에 더 있겠습니까 고통밖에 더 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내 마음을 채울 때는 항상 행복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세상에 주기 시작하면 그 마음은 갈등과 고통밖에 남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경 말씀 보아도 그 마음에는 평안히 없습니다. 마음이 나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완전하고 무궁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자기 아 들을 우리를 위해 희생하지 않았습니까 그 대가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지 않았습니까 요한 일서 3 장1절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진지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그 은혜가 흘러 넘치는 것을 봅니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 하도다.' 우리가 보통 사랑을 받은 사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도 나를 사랑해라. 한 마음으로 나를 사랑해라.'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마태복음 22 장37절, 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구약을 인용해서 너무나 우리를 긴장시키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러분, 기가 막히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가 무슨 재주로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예수님을 사랑합니까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또 마태복음10장37절에 보면 더 기가 막힌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말을 바꾸면 이렇습니다. '네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너는 나하고 관계없어.' 그것은 좀 가능할지 모릅니다. 요사이 아버지, 어머니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말입니다. 세상이 하도 사나워서 부모에 대한 사랑은 이미 끝장났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의 말씀,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너는 나를 사랑할 수 없어.' 하는 이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답답하게 만듭니까 여러분, 자녀들은 엄청나게 사랑하시지 않습니까 자녀를 사랑하는 그 사랑을 뛰어 넘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마리아처럼 값진 향유를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그 발을 씻기면서 주님 앞에 자신을 드려야 만이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배도 내 버리고, 잡은 고기도 내 버리고, 자기의 집도 내 버리고 예수님을 평생 따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혹은 바울처럼 장가도 가지 아니하고 평생 동안 매 맞고 감옥에 가서 고생하며 이리 저리 쫓겨다니면서 주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확장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쳐야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해야 만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할까요 어떻게 하면 아들, 딸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이삭 와츠가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들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라고 노래한 것처럼 진짜 그렇게 해야만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알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사랑을 드릴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순수한 사랑을 우리에게서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도 이것은 될까 말까 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세상적으로 슬그머니 돌려서 세상에 마음을 주고 사랑을 주고 정을 주면 하나님 사랑이 되겠습니까 그 마음이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세상, 이 두 곳으로 나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5절을 다시 한번 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서 떠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원문 상 두가지가 다 가능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라는 뜻도 되고, 또 하나는 나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 입니다. 둘 다 맞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주고 사랑을 주기 시작하면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아도 실상은 그 사랑이 떠나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순한 마음에는 거하시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가슴에 담고 꼭 기억해야 됩니다. 나는 둘을 다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 사랑해요. 그러나 세상에 마음을 좀 준다고 해도 그것이 그리 큰 문제가 됩니까' 우리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지하십니다. '네가 세상에 마음을 주면 내 사랑이 네 마음에 거할 공간이 없어져. 둘 중에 하나를 택해라. 둘 다 네 마음에 담을 수 없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세상은 대단히 매력적인 대상입니다.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매력이 있습니다. 세상의 매력 앞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면서 체험하고 즐기는 이 모든 것들이 세상으로부터 오는데, 이 세상이 얼마나 매력이 많은 지요! 그 세상이 주는 부귀와 영화와 권세와, 세상이 주는 그 모든 쾌락을 거부할 힘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16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이는 세상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세 마디로 요약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첫째는 무엇입니까 육신의 정욕입니다. 둘째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셋째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은 소유욕을 의미합니다. 소유욕이란 무엇이든지 갖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갖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점점 더 갖고 싶어하는 무서운 욕망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릅니다. 이 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솔로몬이 직접 체험하고 나서 한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솔로몬만큼 금은 보화를 많이 가지고 산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손에 넣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쌓아 놓고 산 사람입니다. 그가 다 해 보고 나서 뭐라고 합니까 전도서 5장10절입니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물렸다 하면 끝까지 끌려가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아무 것도 얻지 못하고 파산하는 것이 이 소유욕입니다.
안목의 정욕은 무엇입니까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입니다. 일종의 쾌락 욕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즐기기를 원하고, 만족하기를 원하는 이 쾌락 욕도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모릅니다. 한번 즐겼다고 만족합니까 즐기면 즐길수록 더 큰 것을 즐기기를 원하고, 작은 쾌락을 맛보았으면 그 다음에는 조금은 더 큰 쾌락을 찾고, 그 다음에는 마약처럼 끝없이 끌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점이 무서운 것입니다. 이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1장8절은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 도다.'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다 해 보지 않았습니까 솔로몬이 자기 주변에 아름다운 미녀를 몇 명이 나 두었는지 아십니까 몇 명이나 있었습니까 천명입니다. 그것도 공식적으로 천명입니다. 그러므로 비공식적으로는 도대체 얼마가 되는지 모릅니다. 눈에 보여 아름답다, 좋다하면 언제든지 자기 옆에 데리고 올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즐긴 사람입니다. 즐겨 보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구약을 한번 보십시오.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입는 것, 그 다음에 집 짓는 것, 즐겨 보지 아니한 것 이 무엇입니까 온통 부귀 영화를 다 즐겨 보았지만 끝이 없었습니다. 그래 서 '눈은 아무리 보아도 만족이 없더라. 귀는 아무리 들어도 차지 않더라.' 하고 말한 것입니다.
송구영신 그러니까 금년을 마무리짓는 12월31일 저녁에 시드니에서는 뉴 밀레니움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어느 식당, 가장 좋은 위치의 테이블에서 그 날 저녁 식사 한끼 먹는데 270만원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270만 원짜리 먹으면 무엇합니까 또 화려하게 펼쳐지는 그 축제를 눈으로 본들 무엇이 그리 대단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이생의 자랑은 과시욕입니다. 자기가 얻은 명성, 자기가 쌓은 부, 자기의 어떤 잘난 것, 똑똑한 것을 가지고 무대 기질을 발휘해서 사람 앞에 자랑함으로써 다른 사람 기를 죽이는 것이 과시욕이 아닙니까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과시욕이 있습니다. 무대 기질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대여섯 살만 되면 앞에 서서 노래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보십시오. 이것이 무대 기질이라는 것입니다.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세상에 호피 무늬 반코트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동이 납니까 이것이 사람들 눈을 끌고 무엇인가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허파에 바람든 여인들의 행태인 것입니다. 이것도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16절입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모두 가 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유욕이라든지 과시욕이라 든지 쾌락욕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세상에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굉장히 아름다운 매력이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아니하면 금방 그 쪽으로 마음이 돌아갑니다. 우리가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액시던트(accident)가 아닙니다. 사고가 아닙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쓰다가 언젠가는 완전히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틀림이 없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금씩 조금씩 가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자꾸 갑니다. 무서 운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행동이 먼저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먼저 가고 그 다음에 행동이 따라옵니다. 그러므로 행동은 교회로 오지만 마음은 세상으로 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마치 이민을 간 사람이 처음에는 한국인으로서 자기의 고유한 전통이나 언어나 여러 가지 습관 같은 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지만, 5년 살고 10년 살고 20년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점점 그 본토 사람들의 언행을 닮아 가 버리지 않습니까 이것을 세속화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겉으로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하나님만 사랑하고 살아야 된다' 라면서 성경 말씀을 들고 기도하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마음을 조금만 놓고 긴장이 풀려 버리면 자신도 모르게 자꾸 세상을 닮아 가고 동화되어 버립니다.
이 세상이 살기가 어려워서 정말 만 정이 다 떨어지면 괜찮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날마다 피를 보고 죽음을 보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 대해서 정이 떨어져 세상을 사랑하라고 해도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무릎 꿇고 하나님을 향해서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만 이 세상에 기근이 심하고 너무나 살기가 어려워서 '저녁에 자면 다음날 아침이 돌아오지 말았으면 좋겠다. 날이 새지 말았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 도면 사람들이 마음을 세상에 안 줍니다. 자연히 하나님 앞에 마음을 줍니다. 그러나 전쟁도 없이 평안하고, 먹을 것이 수두룩하게 많고, 입고 즐길 것이 너무 많은 세상이 오래 계속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자기도 모르게 세상 쪽으로 마음이 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 긴장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끌어내어 저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실 때 그곳 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정말 거기는 굉장한 땅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먹을 것이 모자람이 없는 땅이요,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입니다. 그런데 그 땅에 아직 이스라엘 백성이 도착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몹시 불안해하는 모습을 봅니다. 신명기 8장 12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그 땅에 들어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잊어버린다는 말은 무신론자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무신론자가 된 적은 없습니다. 마음이 세상으로 빼앗긴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세상으로 돌아간 이스라엘을 놓고 음행한 여인으로 비유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너무나 평안하고, 너무나 잘 살고, 너무나 모든 것이 만족스러울 때 세상으로 끌려 들어간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롯을 보십시오. 롯의 아내를 보십시오. 삼손을 보십시오. 솔로몬을 보십시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데마와 후메내오와 알랙산더와 니골라를 보십시오. 모두가 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었지만 마음을 세상에 주다가 다 끌려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스스로 불행한 종말을 자초한 것을 우리가 봅니다.
역사적으로도 보십시오. 선진국들을 한번 보십시오. 유럽이나 미국을 한번 보십시오. 기독교의 메카라고 하는 화란과 벨기에를 한번 보십시오. 얼마나 믿음이 좋은 선조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러나 요즘에 벨기에 같은 곳은 열 사람 중 한 명이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모두가 다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불란서는 천명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다 가버렸습니다. 얼마나 세상에 마음을 주는 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가를 다시 한번 기억해야 됩니다.
교회 안에서 세상에 마음을 자꾸 주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 교회는 회색 지대가 되어 버립니다. 세상인지 교회인지, 교회인지 세상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그런 이상한 장소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런 자리에서는 영적 의미가 애매 모호한 이중구조를 가진 언어가 난무하게 됩니다. 듣기에는 옳은 말씀 같은데 가만히 살펴보면 잘못된 말씀을 함부로 쏟아 놓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설교합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마음껏 쌓고 즐기는 것은 우리의 축복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니까 설교를 듣고 있는 성도들이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아멘했습니다. 정말 헷갈리는 소리입니다. 진짜 그 말이 옳습니까 성경을 가지고 비추어 보면 그것은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적인 축복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지, 그것이 장수든지, 자식이든지 뭐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세상적인 축복은 받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축복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지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은 이 모든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헷갈리는 소리입니다. 도대체 들으면 옳은 말 같은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설교를 하는 분들은 벌써 마음이 세상으로 간 것입니다. 듣는 성도들도 '아멘' 하면 간 것입니다.

우리 나라 교단 중에서 60년대, 70년 대, 80년대 중반까지 불꽃이 튀듯이 성장한 교단이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 교단 교회에 가서 은혜를 받고 병도 낫고 또 너무나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만 90년대 들어와서 그 교단에 부흥이 그렇게 신통치를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교회는 점점 자꾸 줄어들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 교단의 지도자 되는 목사님 한 분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목사님, 왜 그럴까요 왜 그 교단이 부흥이 잘 안되세요 이 분이 반 농담으로 그러나 언중유골이라고, 의미가 있는, 가시가 있는 말을 했어요. 우리 나라 사람들이 못 살 때에는 예수를 잘 믿으면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메시지가 굉장히 호소력을 가졌기 때문에 구름떼와 같이 그 말씀을 듣고 예수 믿으려고 모였지요. 그러나 목사님, 요즘엔 다 잘 살지 않습니까 잘 사는데 뭘 그렇게 열심히 교회 나갈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서 교회가 부흥이 안되는 것입니다. 상당히 의미 있는 진단이라고 생 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마음을 주면 우리의 행복을 잃어버립니다. 예수 믿는 자만이 알고 있는 행복을 우리는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119편 36절, 37절의 기도입니다. '내 마음을 향하여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을 하나님에게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 게 하시고'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또 잠언 저자가 기도한 기도를 우리는 해야 합니다. 30장 8절입니다.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니 주여 나에게 너무 많은 것 주지 마세요.'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똑바로 알아두십시오. 기독교가 말하는 변화는 소유욕, 쾌락욕, 과시욕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변화를 받았습니까 제자 훈련하면서 변화를 받았습니까 다락방에 가서 은혜를 받았습니까 설교를 듣다가 은혜를 받 았습니까 내가 은혜를 받고 변화되었다고 한다면 그 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 줄 아십니까 물질욕에서 자유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바늘 귀를 뚫고 나가지 못하고 있는 부자 나귀가 되어서 남아 있으면 그 사람은 아직 변화가 안된 사람입니다. 많은 재물을 가진 부자라도 예수를 믿고 변화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삭개오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이 세상에 선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물질을 흩어 줄줄 알아야 그 사람이 변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변화는 받았다고, 은혜는 받았다고 하는데 돈 이야기만 하면 얼굴이 달라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가 막히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돈에 붙은 그 마음에서 자유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놓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 겠습니까
기독교의 변화는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변화를 체험한 사람은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 같은 인간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돈을 많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사업이 복을 받고 경제적으로 풍성해졌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 왜 이렇게 많이 주십니까 하나님, 제가 이것을 어떻게 할까요' 라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흩어 쓸줄 알아야 됩니다. 이 사람이 변화 받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물질에 마음을 안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짓고 있어도 집에 마음을 안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위가 올라가고 명예가 올라가도 거기에 마음을 안 주는 것입니다. 오직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에게만 내 마음을 고스란히 바치는 것입니다. 흩어 주는 자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에 마음이 매이기 시작하면 하나님에게 사랑을 줄 수가 없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은 분뇨와 퇴비와 같아서 그것을 쌓아 두면 악취가 나지만 그것을 흩어 버리면 땅을 비옥하게 만든다.' 돈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쌓아 두면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소똥, 개똥, 말똥, 다 끌어 모아 가지고 그것을 썩힌 후 논에 뿌리면 땅이 비옥해져서 많은 추수를 하게 됩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쌓아 놓으면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흩어 버리면 엄청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돈에 마음을 안 주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이 깃들 수 있고 하나님만이 주시는 감미로운 교제가 그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진짜 변화 받은 사 람입니까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그래서 행복합니까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서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한번 진단하고 추호라도 우리의 마음이 한 쪽으로 기울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 랍니다.
여러분, 17절을 한번 보십시오. 우리 같이 읽습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러분이 이 말씀을 마음에 담고 음미하십시오. 여러분, 무엇이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며, 무엇이 영원한가를 우리는 똑 바로 구별할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 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 소유욕이든 과시 욕이든 쾌락욕이든 모든 것 은 다 잠깐 있다가 지나가는 안개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놓고 생명을 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것에 내 마음을 줄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금방 있다가 없어지는 것에 내 마음을 빼앗기고 내 한 평생을 바친다고 한다면 그 사람만큼 바보스러운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없어 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1세기를 앞에 두고 우리는 지나간 20세기를 돌아봅니다. 20세기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많은 스타들을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보십시오. 케네디가 어디 있습니까 마를린 몬로가 어디 있습니까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어디 있습니까 다 어디 있습니까 20세기 초반에 세계적인 기업이 한 100여개가 되었다고 합니다. 70년도 지나기 전에 그 100여개 중에서 지금 남아 있는 것이 10여개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 많은 부자가 어디로 갔습니까 그들이 지은 고대광실 같은 집들이 다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지나갑니다. 지나가서 없어지는 것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팔면 자기도 불행해지고 하나님 앞에도 영광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영원히 남는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돈을 주시면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쓰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명예가 올라가면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려고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제가 1부 예배 마치고 우리 교회 집사님하고 또 우리 교회 교인은 아닙니다만 어느 교회 장로님하고 두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다 법조인들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은 대구 고검에 지금 부장 검사로 있습니다. 대구 시내가 그 사람 때문에 떠들썩합니다. 한 1,2년 있다가 다시 올라올 텐데, 대구 시내가 떠들썩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면 워낙 예수를 잘 믿는 검사이기 때문에 교회마다 방문해서 목사님들하고 대화를 나누고, 교인 들이 찾아오면 상담해주고, 여러분, 제자훈련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야 됩니다라면서 반 목사 같은 소리를 하고 다니니까 떠들썩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외롭겠습니까 검사들 9명중에 1명 꼴로 크리스챤이 있을까 말까 한다고 합니다. 사실은 크리스챤이 더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다 음성적인 크리스챤이고 양성 크리스챤은 한 사람 정도 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열중에 하나, 얼마나 고독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지위와 자기의 입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바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이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영원히 남는다고. 하늘의 별처럼 영원히 남는다고.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을 사랑하지 맙시다. 돈은 열심히 버십시오. 힘껏 버십시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경쟁 사회에서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하여 밤낮 없이 씨름하고 노력하십시오. 게으르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경제계에 들어가든지 정치계에 들어가든지 연예계에 들어가든지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지도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우리가 써야 될 것이지 거기에 마음을 주어야될 대상은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주면 우리 가슴속 의 행복은 깨져 버립니다.

여러분, 눈을 감을 때 사랑하는 주님이 내 마음에 와서 조용히 내 마음 을 터치하는 행복을 아십니까 '세상 사람들은 믿을 것이 못돼. 잘해 주려 다가 다 원수가 되는 세상, 누구 하나 믿을 사람이 없어.' 이런 생각이 들 때 하나님 말씀을 펴놓고 마음에 묵상하면서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만이 내가 영원히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라고 고백하면 우리 하나님은 조용히 다가 오셔서 내 영혼을 쓰다듬어 주시고 내 안에 새 힘을 주십니다. 그 감미로운 행복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눈앞이 캄캄하지만 기도하고 일어났더니 '하나님이 인도하셔. 분명히 해결해주셔.'라는 확신이 가슴속에서 확 일어 나는 행복을 아십니까 이런 행복을 가지고 사는 자가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는 정상적인 크리스천입니다. 여러분 이런 행복이 내 마음에 별로 없다면 진단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한 쪽으로 가지 않았는지, 세상에 마음을 주고 있지 않은지, 여러분 스스로를 검증해 보고 다시 한번 제자리로 돌아오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리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고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 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2:15-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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