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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 (요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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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요 우리는 가지이며 하나님은 그 포도원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농부라는 것이 본문의 설정입니다.

본문이 주시는 몇가지 교훈을 찾아보겠습니다.

1. 가지를 치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2절은 농부이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설명해 줍니다.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 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며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교회 앞에 은행나무 가로수들이 서있습니다. 가을에 단풍잎이 떨어지고 나면 나뭇가지들을 싹둑싹둑 다 잘라 버립니다. 사람으로 말하면 손가락을 자르고 팔을 자르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는 가지를 잘라야 잘 자라고 꽃은 순을 집어줘야 제대로 핍니다. 겨울이면 보리밭에 돋아난 보리 싹을 질근질근 밟아 줍니다. 그래야 뿌리가 내려 잘 자라기 때문입니다. 농부는 필요 없는 가지, 쓸모 없는 가지를 제해버립니다. 이유는 보다 더 알찬 포도를 따기 위해서입니다. 우린 여기서 고통, 아픔, 실패, 절망, 좌절은 포도나무를 깨끗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다양한 가지치기 방법이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프랑스가 낳은 최고의 화가 르누아르는 본래 도자기 공장의 공원이 있습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탓으로 제대로 미술을 공부할 수 없습니다. 그는 도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틈틈이 도자기에 그림을 그려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그림이 불란서 화단의 인정을 받아 화가로 등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한 신경통으로 손을 거의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붓을 팔목에 붙들어 매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느 날 르누아르가 그런 모습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바라본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런 손으로 어떻게 명작을 그릴수 있습니까" 르누아르는 대답했습니다. "그림은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은 눈과 마음으로 그립니다. 교만한 붓으로 그린 그림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 고통이야 말로 내게는 소중한 스승이 됩니다"라고...
그림뿐이겠습니까 모든 예술이 그렇고 인생 삶이 그렇고 신앙이 그렇습니다. 사람은 고통과 연단과 시련을 통해 철이 들고 자신을 돌아보고 그리고 신앙이 자라게 됩니다.
욥은 견디기 어려운 시련과 고통과 실패를 겪고난 후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라고 했습니다.
채석장에 나뒹구는 돌맹이를 그냥 놔두면 돌맹이에 불과합니다만 그러나 그 돌맹이를 때리고 깨고 다듬으면 하나의 조각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좋은 나무를 만드시기 위해 때리고 다듬고 그리고 가지치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은 나무되라고 가지치고 가꾸고 키웠는데도 열매가 없으면 그때는 찍어 불에 던져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좋은 나무 만들기를 포기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4절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고 했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6절에서는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라고 했고 7절에서는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다 따라간다, 함께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안에 예수와 함께"를 가장 강조했던 사람은 바울사도 였습니다. 그는 그가 쓴 편지들 속에서 "예수 안에"라는 말을 무려 153회나 사용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때문에 부름받고 구원받고 그리고 헌신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사양하거나 주저한 일이 없었습니다.
가지의 생명은 나무에 붙어있어야 유지됩니다. 꽃꽂이를 위해 꽃가지를 꺾어 병이나 수반에 꽂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지는 얼마 지나면 시들어 버립니다. 나무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산등성이나 산자락에서 크는 특이한 작은 나무들을 화분에 옮겨 가꾸는 것을 분재라고 합니다. 산이나 들어서는 비바람 맞고 크면 죽지 않지만 분재는 좀처럼 키우기가 어렵습니다. 걸핏하면 시들고 맙니다. 이유는 땅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떠나면 죽습니다. 예수 떠나면 되는 게 없습니다. 떠났는데도 사업도 잘되고 몸도 건강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꽃꽂이에 불과하고 분재에 불과합니다. 오래 못갑니다.
물을 떠난 고기는 혹시 산다 하여도
예수 떠난 심령은 사는 법이 없어요
동남풍이 불어라 서북풍이 불어라
가시밭에 백합화 예수향기 날린다.
예수님 내 주여 내 중심에 오셔서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옵니다. 아멘.
옛날 옛적 우리신앙의 선배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입니다만 그 뜻은 오늘 우리에게도 큰 교훈으로 다가섭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프랜시스가 어느 날 제자 한사람이 물통에 물을 가득 채워 메고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통이 흔들릴 때마다 물이 출렁거리며 넘쳐흘렀습니다. 그러자 그는 물통에 나무토막 하나를 넣고 유유히 걸어갔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물통이 무거울 텐데 거기다 나무토막까지 넣었는가"라고 그의 대답은 "흔들리는 물통에 나무토막을 넣으면 물이 쏟아지거나 넘치치 않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프랜시스는 깨달은 바가 컸다고 합니다.
내 맘이 낙심될 때 내 영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심령 속에 에수님의 나무십자가를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 외에 어떤 처방이 있으며 방법이 있습니까 5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수 없음이라"고 그뿐만이 아닙니다. 7절에서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두 종류의 실패가 있습니다.
하나는 실패, 그것으로 끝나는 실패입니다. 실패 뒤에 따라오는 것은 절망, 좌절, 허탈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실패자들은 자신을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둘은 실패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딛고 일어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상에 올라갔다가 굴러 떨어지는 사람이 있고 밑바닥에 떨어졌지만 다시 정상을 향해 꾸준히 끈기 있게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지휘자로 명성을 날렸던 토스카니니는 소년시절부터 심각한 근시로 고생했습니다. 그의 소원은 두 눈으로 밝게 보는 것이었고 훌륭한 연주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19세 때 그는 어느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로 있었습니다. 그는 근시였기 때문에 남들처럼 악보를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연습하기 전에 악보를 수십 번씩 읽고 보고 암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중요한 연주회를 앞두고 상임 지휘자가 갑자기 큰 병으로 지휘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연주회는 다가오고 지휘자는 없었습니다. 그때 곡 전체를 암기하고 있던 토스카니니가 지휘자로 발탁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무명 첼리스트가 훗날 세계적인 지휘자로 명성을 날리게 된 것입니다. 그의 약점이 그의 강점이 된 것입니다.
실패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 있고 일어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일어서 긴 어렵습니다. 누군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게 누굽니까 나를 사랑하시는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십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십니다.
4절을 보면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나의 주인이 되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임산부 복중에 새 생명이 자라고 있습니다. 그 생명은 자기 힘으로 한발작도 옮기지 못합니다. 그러나 태모가 가면 태아도 갑니다. 태모가 속상하면 태아도 함게 속상하고 태모가 기쁘면 태아도 기쁩니다. 태모가 잘 먹으면 태아는 그 칼로리를 배급받아 건강하게 자랍니다. 바로 이것이 태 속에 있는 태아의 신비인 것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 있으면 걱정거리가 없습니다. 이유는 주님이 다 처리하시고 해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엘리자 히윗이 시를 쓰고 커크 패트릭이 곡을 만든 찬송입니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주님 곁에 있느냐 멀리 있느냐 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어도 행복한데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그 행복을 무엇과 비길 수 있겠습니까

둘째 결과가 좋습니다.
5절 보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는다"고 했고 7절에서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고 14절에서는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라"고 했고 14절에서는 "나의 친구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결과가 좋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광우병을 짐승에게 썩은 짐승의 고기를 갈아서 만든 사료를 먹였기 때문이고 구제역 역시 부패했거나 썩은 음식물 찌꺼기로 만든 사료를 먹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군대를 동원해 구제역에 걸린 짐승 수백만 마리를 도축했습니다.
사람도 뭘 먹느냐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와 일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멋지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슈바이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위대한 학자이며 음악가입니다. 그런데 당신 같은 사람이 이런 오지에서 생명 바쳐 일하고 계십니까"라고 슈바이쳐는 대답했습니다."저는 말로 사람들을 감동시킬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사랑을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사람들은 이해를 못하더군요 그래서 행동으로 사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라고 슈바이처를 누가 멋진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그가 예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수많은 묘비명을 보았습니다. 그 묘비명 가운데 자식을 잘 키워서, 돈을 많이 벌어서 라는 묘비명은 없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멋지게 살았느냐 보람된 삶의 자취를 남겼느냐를 새기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예수와 함께 예수를 위하여!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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