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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2 (왕상 19: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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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야는 BC 9세기 북왕국 이스라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는 일정한 주거가 없이 광야에 기거하면서 털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띠고 다녔습니다(왕하1:8). 그는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으로 아합왕의 잘못을 서슴치 않고 책망했고 그 당시 유행하던 바알신 우상숭배 척결에도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용기, 신앙, 정의감, 애국심을 갖춘 당대 최고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엘리야의 활동에 관한 기사는 구약성경 열왕기상 17장에서 21장 사이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그의 활동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가 행한 능력과 기적들입니다. 열왕기상 17:8-16을 보면 사르밧 동네에 사는 과부집을 찾아가 가루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통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기적을 행했습니다. 열왕기상 17:17-24을 보면 병들어 죽게된 한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었습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아 가물었던 땅에 비가 오게 했습니다. 아합왕을 책망하고 기적을 행하고 바알우상의 전을 무너뜨리던 엘리야가 열왕기상 19장으로 건너가 보면 탈진과 무력감과 상실감에 빠져 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 당시 아합왕의 왕후는 이세벨이었습니다. 본래 이세벨은 바알우상을 섬기는 이방 여자였는데 아합이 왕비로 간택했습니다. 왕을 책망하고 바알우상을 척결하는 엘리야를 아합 왕보다 이사벨이 더 증오하고 죽이려 했습니다.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사람을 보내 "내가 반드시 너를 죽이겠다" 는 통첩을 했고 그 통첩을 받은 엘리야는 죽음이 두려워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는 것이 열왕기상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가 크면 부딪쳐오는 파도도 큰 법입니다. 큰사람, 큰 인물은 큰바람을 맞게 됩니다. 신앙도 큰 신앙이 되려면 시련도 겪고 풍파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왜 엘리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가 탈진과 위기에 빠지게 됐을까요 첫째, 나만 홀로 남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열왕기상 19:10을 보면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홀로 있기 때문에 고독한 것이 아닙니다. 홀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고독한 것입니다. 55세 된 남편이 성인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미망인은 슬픔과 절망에 빠진 채 고통하다가 극심한 우울증에 걸렸습니다. 그러다가 일년이 지난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가 남긴 유서에는 "나는 혼자다. 내 곁엔 아무도 없다. 나는 그이 곁으로 가고 싶다. 그이가 나를 기다린다" 는 요지의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대학에 다니는 딸과 직장에 다니는 아들이 함께 살고 있었다고 바로 옆집에는 시집식구들이, 가까운 이웃동네에는 친정 집이, 여기저 기 친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 주변에는 그녀를 이해하고 돕고 싶어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나는 혼자다. 나는 홀로 남았다" 고 생각했기 때문에 외로웠고 고독했고 우울했고 그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 것입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19:18을 보면 "바알을 숭배하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지킨 자 7,000명이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엘리야 곁에 앞에 위에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오직 나만 남았다(19:10)" "오직 나만 남았거늘(19:14)" 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결정되고 행불행이 갈라집니다.
뇌는 약 천억 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경세포끼리 연결되어 있어서 그 신비함이나 복잡성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합니다. 고래의 뇌 무게는 8,000g으로 체중의 2천분의 1, 코끼리의 뇌는 5,000g으로 체중의 2천분의 1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뇌 무게는 약 1,500g으로 자기 체중의 40분의 1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다른 동물에 비해 사람은 뇌의 무게나 크기가 크다는 것입니다. 오른쪽 뇌는 직관, 감성, 예술 분야를 그리고 왼쪽 뇌는 언어, 수리, 분석, 논리적인 면을 담당합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뇌를 연구해도 그 정체와 신비를 아는 것은 1프로 미만이라고 합니다. 과학자들은 뇌를 소우주라고 합니다. 뇌 세포는 한번 생겨나면 다시 그 세포수가 불어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재생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0살이 넘으면 하루에 10만개 이상의 뇌 세포가 죽어가고, 늙을수록 죽어 가는 뇌 세포 수가 늘어납니다. 전문가들은 뇌 세포를 놀리지 말고 자꾸 써야 뇌 세포가 죽고 뇌가 쪼그라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혼자다. 나는 홀로다. 나는 아무도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뇌 세포를 죽이는 비결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부모가 있고 자식이 있고 형제가 있고 친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충신교회가 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십니다.
사람이 한번 큰소리로 쾌활하게 웃으면 우리 몸 근육 650개중 231개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병원의 이차크 프리드 박사는 사람의 뇌 속에서 4㎠ 되는 웃음보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리버크 교수는 "놀람, 짜증, 불안은 교감신경을 과민하게 만들어 심장을 상하게 하는 반면 웃음은 부교감 신경을 자극해 심장을 천천히 뛰게 하고 몸 상태를 편안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윌리엄 프라이 교수는 "10초 동안 배꼽을 잡고 깔깔거리며 웃으면 3분간 힘차게 노를 젓는 것과 같은 운동효과가 있으며, 잘 웃지 않는 사람보다 잘 웃는 사람이 오래 산다" 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홀로 있다. 나는 혼자다 그래서 외롭고 슬프고 고독하다고 생각하면 웃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집단고독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빈둥지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서울시민 1,200만 인파 속에 묻혀있어도 외롭고 고독합니다. 집이 있고 직장이 있고 주머니 속에 지갑이 들어 있는데도 마치 빈집에 홀로 앉아 있는 것처럼 처량합니다. 이것이 바로 집단고독 증후군이며 빈둥지 증후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그리고 많은 사람이 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60세 동갑내기 부부가 친구들과 함께 생일파티를 하고 있었습니다. 파티가 끝나갈 무렵 천사가 나타나더니 부부에게 생일 축하한다며 무엇이든지 소원을 말하면 생일 선물로 주겠다고 했습니다.
부인이 말했습니다.
"천사님 제 소원은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세계 일주를 하는 것입니다. 세계일주 할 수 있는 비행기표를 주십시오." 그 말이 끝나자 팔락거리며 세계일주 비행기 표 두 장이 부인 앞에 떨어졌습니다. 남편에게 천사가 물었습니다.
"그대 소원은 무엇인가 내가 들어 주겠노라" 그러자 그 남편은 "천사님 저는 늙은 마누라가 실증이 났사옵니다. 저보다 30세 젊은 예쁘고 팔팔한 아내를 주십시오. 30세 젊은 아내와 사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천사가 "참으로 어렵고 힘 든 소원을 원하고 있구나. 그러나 네가 그토록 원하니 네 소원을 들어 주겠노라." 그 말이 끝나자마자 60세 남편이 90세 된 영감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90세 된 영감 곁에는 60세 된 젊고 팽팽한 아내가 서 있었습니다. 천사가 떠나며 하는 말은 "잘 먹고 잘 살도록 하여라" 였습니다.
우리에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결코 절대로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생각을 바꿉시다.

둘째는, 생명의 위협 때문이었습니다. 19:10끝을 보면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라고 했고 14절 끝에서도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죽을까봐 겁내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19:4를 보면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산 것 만으로도 넉넉합니다. 이세벨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하나님의 손에 죽고 싶습니다. 저를 데려가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일까요 실패, 이별, 고통, 원한, 억울한 것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입니다. 그것은 생의 종지부이며 마침표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워하고 떠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담담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종착역이고 끝이라고 생각하면 두렵고 떨립니다. 그러나 죽음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새로운 출발이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입성식이라고 생각하면 담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살, 자학, 자해는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스스로 끊는 피가 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권사님 아버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빈소엔 많은 조화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화들 중에 눈길을 끄는 조화들이 있었습니다. 아버님 천당 가신 것을 축하합니다. 딸, 사위...... 할아버지 천국가신 것은 축하드립니다. 손자....... 참으로 감동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죽음은 끝도 종착역도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소망인 것입니다. 절망과 실의와 탈진과 위기 앞에 서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9절을 보면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1절을 보면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섰으라"(19:12). 그 날 그는 조용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탈진과 절망과 위기는 끝난 것입니다.
우리들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내가 겪고 있는 탈진과 침체와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건강한 생명도, 재산도, 명예도, 권력도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합시다. 그리고 그것들은 하나님의 지키시고 보호할 때 내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신뢰합시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입시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 여기 있느냐"(19:3) "내가 네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리라"는 말씀을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드립시다.
위기와 탈진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신뢰하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탈진과 위기를 극복시켜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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