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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아들을 바친 사람 (창 22: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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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유럽은 광우병 공포로 떨고 있습니다. 광우병이란 소가 미쳐 날뛰다가 쓰러져 죽는 병입니다. 광우병으로 죽은 소의 뇌를 해부해 보았더니 스폰지처럼 납작하게 녹아 있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그 병이 프랑스, 영국 국경을 넘어 독일과 스페인으로 번져가고 있으며 소고기를 먹는 전세계로 확산될 조짐이어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이태리 같은 경우는 경찰력을 동원해 국경을 지키는가 하면 소고기 수입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어서 광우병과 유사한 병이 보고된바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광우병의 정확한 원인, 실태, 감염 경로 등이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두려움이 가속되고 있습니다. 소비자는 소고기 먹기가 두렵고 축산농가는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소고기 수입을 금지하는 나라들 간에는 통상마찰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그 동안 미국이나 호주, 아시아 등에서는 사료로 콩이나 옥수수 등 식물성 원료를 사용했습니다. 우리나라는 풀을 먹여 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창 광우병이 번지고 있는 유럽국가들은 동물성 사료를 사용했습니다. 죽은 소, 죽은 개, 죽은 고양이를 갈아서 사료로 만들어 먹였습니다. 죽은 소나 개나 고양이는 대부분 병 걸려 죽은 것들 입니다. 광우병이 번지자 유럽국가들은 소에게 동물 사료를 먹이지 못하도록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광우병의 원인이 동물성 사료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소는 본래 초식동물입니다. 들판에서 풀을 뜯고 먹고 사는 동물입니다. 그 소에게 썩은 고기로 만든 동물사료를 먹이면 무게는 무거워지고 빨리 자라긴 하지만 결국 병들어 죽는 재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광우병 사태를 지켜보면서 느낀 게 많습니다. 광우병은 소로 끝나지 않습니다. 양, 개, 고양이, 닭 그리고 사람에게까지 전염이 됩니다. 광우병의 종말은 사람도 짐승도 죽는 것으로 끝납니다.
성경을 보면 '하라, 하지 말라' '먹으라, 먹지 말라' '마셔라, 마시지 말라'는 명령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대로 하면 국가도, 개인도,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안 하면 국가도, 가정도, 개인도 복 받는데서 제외되었습니다. 소가 날마다 사료를 먹어야 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양식을 제대로 먹지 않고 먹어선 안 될 것들을 먹게 되면 영적 광우병에 걸려 교회도 무너지고 가정도 무너지고 개인의 심령도 무너지고 맙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물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흐르리라" "내가 주는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하리라(요6:35)"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마시는 사람은 영적으로 건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주여 말씀대
로 이루어 지이다" "주여 옳습니다" 아멘.
본문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다. 창세기 22장은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쳤다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번제란 여러 제사 가운데 가장 힘든 제사입니다. 온전히 불태워 드리는 제사여서 holos kaio라고 불렀습니다. 번제단에 불을 피우고 제물의 껍질은 벗기고 고기는 각을 떠 불태워 드립니다. 내장도 씻어서 불태우고 피는 제단에 뿌립니다. 그러니까 송두리채 불태워 드리는 제사인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를 번제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외아들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외아들"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외아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밖에 없는 아들, 더 낳을 수 없는 아들입니다.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나이 많아 이미 아들을 낳을 수 없는 나이 100세였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낳은 아들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기쁨이었고 낙이었고 웃음이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더 낳을 수 없는 외아들입니다. 아브라함으로서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건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아브라함의 응답입니다. 창세기 22:3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는 곳으로 가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9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 아들 이삭 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10절을 보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우린 여기서 하나님이냐 이삭이냐를 선택하는 아브라함의 결단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이삭이 더 소중하면 바칠 수 없습니다. 그 날 하나님의 관심은 이삭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22:1을 보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라고 했고, 12절을 보면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했습니다. 16절 역시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은 단순했습니다. 100세에 주신 하나님이 다시 바치라, 다시 가져오라 명하시는데 누구 왜 거역하겠느냐는 것이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점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이삭 그 자체가 필요했다면 이삭을 데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필요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이었기 때문에 22:13을 보면 대신 수양을 준비해 주셨고 아브라함은 그것을 하나님이 준비 하셨다는 뜻으로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본문 17절 이하를 보면 그 사건 이후에 임한 하나님의 축복을 설명하고 잇습니다. 17절을 보면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삭의 씨가 번성하여 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바다의 모래처럼 왕성하다는 것입니다.
히틀러가 아히히만을 앞세워 유태인 박멸작전을 펼쳤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지구상에서 유태인의 씨를 말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독일 사람들이 남긴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유태인은 씨말리기 힘든 백성이다"라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미국 상하양원에 유태인 국회의원이 65명이라고 합니다. 노벨상 수상자, 세계적인 로비스트들, 이름난 은행가, 학자들, 유태인들이 수두룩합니다. 이삭 하나 바치고 얻은 축복인 것입니다.
17절 끝을 보면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거기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삭의 씨가 이긴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악마와 죽음의 세력을 이길 것이며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역사의 현장에서 이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수를 셀 수 없는 외침으로 수난을 겪었습니다. 바벨론, 헬라, 로마, 애굽 등 강대국의 침략이 잇따랐습니다만 그 나라들은 망해도 이스라엘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화약고 중동의 복판에서 강원도 크기의 영토를 가진 나라입니다만 건재를 과시하고 있습니다. 요르단, 이집트, 시리아, 이란, 이라크에 에워 쌓여 있습니다만 당당하게 버티고 있습니다. 이삭 하나 때문에 받은 축복의 결과인 것입니다.

18절은 더 중요합니다.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이삭 때문에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되는데 중요한 것은 그 씨가 누구를 의미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주경가들은 여기서 말하는 '씨'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삭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아이십니다. 예수 때문에 천하 만민이 살 길을 찾게 되었고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삭도 외아들이었고 예수님도 외아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요한복음 3:16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17을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내주셨고 아브라함은 독생자를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는 세상 만민을 구원하셨고 아브라함의 독생자는 그 후손들을 구원하는 초석을 만들었습니다.
외아들은 누구에게나 아깝고 소중합니다. 하나님도 외아들은 아깝고 귀합니다. 그 외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하나님도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을 바칠 때 뛰며 춤춘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셨고 하나님께 바치라는 명령이 자식 사랑보다 우선이어야 한다는 신앙 때문에 결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탄절은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날입니다. 우리로서는 축제의 날입니다만 보내신 하나님이나 오신 예수로서는 희생의 날이며 자기 낮춤의 날인 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매년 성탄카드를 만들어 성도들 가정과 해외 교우들 가정에 전달하곤 했습니다. 카드 내지에 늘 성탄과 새해 인사말을 넣고 붓으로 글귀를 써 넣곤 했습니다.
금년 카드에는 붓으로 아멘이라고 써 넣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아멘하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아멘하고 이삭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아멘하며 살자는 것입니다. 예, 아멘하고 살면 아브라함처럼 복을 받고 형통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명하시든지 아멘, 뭐라고 하시든지 아멘, 외아들도 아멘, 나의 생명도 아멘 합시다. 그래야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 내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위대한 신앙은 그대로 했기 때문이며 하나님께 삶의 우선권을 드렸기 때문이며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쳤기 때문에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배웁시다. 아브라함처럼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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