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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미가의 종교 (삿 17: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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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교회 생활을 하지 못하던 장로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 리스도인이 교회 생활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큰 비극입니 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신바람이 나야 하고, 감격이 있어야 하 고,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 나와 봐야 짜증 나기만 하고, 마주치기 싫은 사람을 보아야 한다면, 그 신앙 생활은 거짓되고 그릇된 것입니다. 이 장로님도 그런 유형의 신앙 생활을 하던 분입니다.

장로님이 그렇게 된 원인은 다음 두 가지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장로님은 본래 어머님의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교회 출석도 열심히 하고, 기도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이 축복하는 사람은 반드시 축복받고, 저주하는 사 람은 저주받는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어머니의 일상 생 활은 그리 본받을 만한 것이 못 되었기 때문에 이웃에게 손가락질 받기도 했고 그릇된 말과 행동으로 주변에서 지탄을 받기도 했습 니다. 이런 어머니 밑에서 신앙 생활의 뼈대를 잡았기 때문에 장 로님의 신앙도 올바르지 못했습니다. 말씀에 따라 신앙을 돈독히 할 만한 성숙의 기회가 없었습니다.

 둘째, 이 장로님은 마음 속에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원인은 그 분이 장성하여 어머니의 재산을 관리하게 되면서 발생했습니다. 이 어머니는 굉장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어머니와 의논하지 않고 어머니의 상당한 재산을 빼돌렸습 니다. 그 일로 마음 속에는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에는 열심히 나갑니다. 이러한 교회 생활이 행복 할 수 있겠습니까?

장로님은 불만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기보다 교회에 떠넘겼습 니다. 자신에게 바른 말하는 사람이 밉고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려 는 목사가 맘에 안 들어 교회 생활이 점점 나빠진다고 불평했습니 다. 결국 장로님은 결론 내리기를 제대로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 서는 자기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는 교회를 하나 세워야겠다고 생 각했습니다.

장로님은 개척 교회를 세우기로 작정했습니다. 재산이 많으니 먼저 교회 건물부터 지었습니다. 교인을 모으기 전에 교회부터 번듯하 게 지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집 옆에 세웠습니다.

 집 옆에 교회가 있으니까 맘 내킬 때 예배드릴 수 있어서 좋았습 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목사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교회 생활했던 것을 되돌아볼 때 모르는 사람을 데려와서 고생하는 것보다 잘 아는 사람을 목사로 세우는 것이 편하리라 생각했습니 다. 가만 보니 자기 아들 가운데 한 명이 성경도 좀 알고 기도 도 잘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목사로 임명했습니다.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훌륭하게 지은 교회에서 예배드리는데 늘 자기와 아들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제대로 된 목사가 있어야 교인이 늘겠 다는 판단이 서자 목사 한 사람을 구했습니다. 장로님이 택한 목 사님은 소속도 없이 이 교회 저 교회로 옮겨 다니는 방랑자였습니 다.

두 사람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죽이 잘 맞습니다. 서로 불 편하지 않은 관계에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이 맞아 떨어졌습니다. 장로님은 장로님대로 목사 부려 먹을 생각을 했고, 목사님은 목사님대로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장로님 비 위만 잘 맞추면 편하게 먹고 살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교회의 면모를 갖추자 교인도 한두 사람 생기고 예배도 활기가 넘 쳤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동기로 시작한 교회가 잘될 리 없습니다 . 교회 생활이 재미있어지는데 문제가 터졌습니다. 좀더 큰 규모 의 교회에서 이 목사님을 청빙하였습니다. 원래 떠돌이 기질이 있 던 목사님은 어느 날 밤 장로님과 의논도 하지 않고 그 교회의 기구와 문서, 재산 일체를 다 가지고 다른 교회로 줄행랑을 쳤습 니다. 결국 장로님이 세운 교회는 문을 닫았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한 이야기는 바로 본문 내용을 각색한 것입니다.

장로님이라고 한 사람이 미가입니다. 미가는 사사가 아닙니다. 사 사 시대의 평범한 보통 사람입니다. 사사기 저자는 그 시대를 살 던 평범한 신앙인을 통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 구조를 반영하 고 있습니다.

 당신은 앞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으 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장로까지 됐을까 의 아해 하며 분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본문을 공부하면서 미 가가 추구했던 종교와 오늘의 종교인의 모습을 반성해 봅시다.

 실용주의 종교 ^ 실용주의의 일차적 관심은 진리가 무엇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실용주의의 최대 관심사는 어떤 일 을 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에 있습니다. 앞 에서 언급했던 장로님은 교회를 자기 집 앞마당에 짓는 것이 하나 님 앞에 정당한가로 고민하지 않습니다. 아들을 목사로 세우는 일 이 정당한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려는 마음 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나 편한 대로 행하는 것이 전부입니 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신당을 교회로 바꿔서 읽을 수 있습니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는 신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신당에 드라빔이라는 신을 만들 어 놓은 것으로 보아 다른 신을 예배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 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하나님이 지정하신 예배 장소가 있었습니다. 18 장 31절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하나님의 집은 그 당시 실로에 있었습니다. 실로는 미가가 살고 있는 곳에서 별로 먼 곳이 아닙니다. 미가는 에브라임 산지에 살 았는데(17:1) 실로는 에브라임 지파의 지역에 있었습니다. 미 가는 가까운 곳에 하나님의 집을 두고도 더 가까운 곳을 찾습니다 . 그래서 자기 집에 신당을 세웠습니다.

사람이 게을러지기 시작하면 한이 없습니다. 처음에 신앙의 감격이 끓어오를 때는 모든 예배에 다 참석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흠 모하다가 차츰 열정이 식어 가면서 일주일에 세 번, 일주일에 두 번,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 번 주일 아침에 얼굴만 내밉니다.

성도들과 교제 나누는 것을 귀찮아 합니다. 미가는 신앙 생활을 편리 중심으로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어떻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묻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편리하고 유익한 것만 염두에 둡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철학이 바로 실용주의 철학 입니다. 자본주의와 실용주의가 일맥상통하는 이유는 그 근본에 개 인의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가 비뚤어진 신앙 생활을 하게 된 가장 중요한 동기는 결국 이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고자 합니까? 당신의 유익만 챙기려고 신앙 생 활을 하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고, 혹시 그런 일이 있다면 회개하 십시오.

 기복(祈福) 종교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정당한 축복을 약속하고 그 축복을 허 락하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축복을 받아 누려야 하고, 축복을 증 거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삶의 특권입니다.

오해해서는 안 될 부분은 예수 믿는 것이 축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물질적인 축복을 말합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것은 해와 달을 숭배하고 성황당에서 복을 비는 것과 매한가지입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무당을 불러다 굿하는 것과 교회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동일 선상에 있는 셈입니다.

 한국인의 의식 구조에는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는 무속 신앙이 자 리잡고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구원받아도 신앙 생활 을 잘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 생활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어야 합니다 . 신앙 생활의 목표가 오로지 복을 더 많이 받기 위해서라면 그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미가의 신앙이 기복 신앙이었습니다. 미가가 어머니의 재산 일부를 빼돌렸던 사건을 살펴봅시다. 2절 말씀입니다.

그 어미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일천일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미가는 은 천백 세겔을 훔쳤습니다. 그 액수가 어느 정도인지는 10절 말씀과 비교해 보면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미가가 제 사장 한 사람을 고용했는데 그 고용 조건을 살펴보십시오.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하여 나를 위하여 아비 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食物 )을 주리라.

1년에 은 열 세겔이 제사장의 봉급이라면, 천백 세겔은 제사장이 110년을 봉사해서 받을 수 있는 돈입니다. 얼마나 어마어마한 액수인지 감이 잡힐 것입니다.

 이렇게 큰 돈이 없어진 사실을 안 미가의 어머니는 밤에 잠을 이 루지 못했습니다. 식욕도 잃고 상심하여 삶의 의욕을 잃었을지 모 릅니다. 기도라고는 저주밖에 나오지 않았습니다(2절 참조). 옆 에서 이를 지켜 보던 미가는 자신의 잘못이 마음에 걸려 결국 자 신이 돈을 훔친 사실을 실토합니다.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취하였나이다(2절 ).

 이때 미가 어머니의 반응을 보십시오. 아들의 잘못을 나무라고 야 단 쳐야 할 어머니는 잃었던 은을 찾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영영 못 찾을 줄 알았는데 아들이 간직하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면서 오히려 아들에 게 축복을 내립니다.

어미가 가로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받기를 원하노라(2절).

 그리고 그 은으로 아들을 위해 신상을 만들고 또 하나님께 드리겠 다고 서원합니다.

미가가 은 일천일백을 그 어미에게 도로 주매 어미가 가로되 내 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 차 로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3절).

어머니는 은을 훔친 아들을 징계하고 올바른 삶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칭찬하며 그를 위해 신상까지 만듭니다.

 이 일은 그렇다 치더라도 4절 말씀은 더 한심스럽습니다.

미가가 그 은을 어미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미가 그 은 이백을 취하여…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은을 여호와께 바치겠다고 해 놓고는 겨우 은 이백만 썼습니다.

하나님 앞에 다 바치겠다고 하고는 천백 세겔 중 이백만 드렸습니 다. 어머니의 신앙과 그 됨됨이가 어떠한지 알 수 있습니다. 아 들이 어머니의 재산을 훔친 것처럼 어머니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 셈입니다.

 이래서 가정 교육이 중요합니다. 미가가 가정에서 정직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올바른 신앙을 지도받지 못했기 때문에, 이후의 삶에서도 계속 그릇된 길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아들을 제사장으 로 세우기도 하고 떠돌이 레위인을 자기 집 제사장으로 고용하기도 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13절에 미가의 속마음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에 미가가 가로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 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미가는 교회의 겉모습만 갖추면 하나님께서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신당을 짓고 제사장을 두었습니다.

진정한 신앙 생활로 그 영혼이 복받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 다.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 드리기보다 자신의 생활에 유익 을 얻고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미가의 모습을 보고 비판하기 이전에 당신의 신앙 자세가 어떠한지 점검하기 바랍니다.

 의식(儀式) 위주의 종교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 건물이 있고 그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하는 것은 신앙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내용 없이 형식만 있 으면 그 형식은 껍데기입니다. 예수께서 형식만 중시하는 바리새인 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 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형식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화려한 교회, 엄 숙한 의식, 장엄한 예배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내용이 빠진 믿음 은 위선입니다.

 미가와 그 어머니는 형식을 갖추는 데는 신경을 썼지만 정작 중요 한 믿음은 소홀히 했습니다. 신당을 짓고, 아름다운 신상을 세우 고, 제사장을 두는 것이 그들의 주안점이었습니다. 삶 가운데서 어떻게 신앙으로 살아야 할지는 그들의 고민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신앙의 내용을 상실하면, 그 교회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 니다. 복음의 감격이 있고, 신앙을 추구하는 정열이 있고, 세계 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고, 자손들에게 올바른 신앙을 유산으로 남겨 줄 수 있을 때 비로소 형식이 의미를 갖습니다.

 미가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추구하지 못하고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 채 신당과 신상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우리는 아들 을 바르게 가르치지 못했던 미가 어머니와 같은 신앙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본을 보여 자녀들이 대대손손 하나님을 경외 하며 살도록 해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어떤 것 인지 깨달아 알게 하고 그분 말씀대로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 출석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 가 중요합니다. 저는 의식 무용론(儀式無用論)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내용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신앙 생활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날만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가는 것으로 하나님이 복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미신의 차원입니다. 가게 개업식 때 목사 님이 오셔서 예배드렸으니까 장사가 잘되려니 생각하는 것은 복받을 만한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일하고, 종업원 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자세로 진지하게 사업을 경영할 때 , 하나님께서 복 주십니다. 목사님과 예배드렸다고 하나님이 축복 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은 우상 숭배에 불과합니다.

 미가의 종교의 종말을 보십시오. 18장 18,19절 말씀입니다.

 미가의 집에 들어가서 그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 든 신상을 취하여 내매 제사장이 그들에게 묻되 너희가 무엇을 하 느냐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 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

단 지파 사람들이 미가의 제사장을 자기네 지파의 제사장으로 데려 가려고 설득하는 장면입니다. 결국 그 레위인은 미가의 신당이 있 던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을 가지고 단 지파 사람들에게 갔습니다.

 기독교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가지 못할 때 우상 종교로 전 락합니다. 우상 종교는 삶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고난이 찾 아올 때 그 역경을 견뎌 내지 못합니다. 복받기만을 바라던 사람 에게 축복이 아닌 고통이 찾아올 때, 그 빈껍데기뿐인 신앙이 드 러납니다. 신앙의 내용 없이 자기의 유익만을 추구하고 복받기만을 바래서 종교 형식을 지키는 사람들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 미가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 생활을 점검하고 참된 믿음 을 소유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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