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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릴리에서 다시 만난 예수님 (막 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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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노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해마다 부활절이 되면 갖게 되는 고민이 있습니다. 다른 주일은 몰라도 최소한 오늘 같은 부활주일만이라도 흥분이 되고, 뭔가 가슴이 뜨거워져야 할 것 같은데, 아무런 특별한 느낌도 없고 가슴속에서 울려나오는 감흥도 없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교회 임원쯤 되면, 부활절 감사헌금은 얼마쯤 해야 적당할까 고민되기도 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왠 절기는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부활절 지나 두달 있으면 맥추감사절, 맥추감사절 지나 석달 있으면 추수감사절, 또 두달 지나 성탄절 이래 저래 고민이 됩니다. 감격과 기쁨과 흥분으로 가득차 있어야 할 부활절. 뭔가 감격해 보려고 노력해 보지만 무덤덤한 날. 뭔가 나의 부활 신앙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의심도 해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보면, 2,000년전 부활절은 우리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의 현장, 그곳을 가보면 복음서는 공통적인 정보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흥분이 없습니다. 감격이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의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1. 부활-믿음의 사건
1,-4절을 보십니다.
막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2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찌기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3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4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활동하지 않는 날이므로,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여인들은 안식일이 지나 어두움이 걷히기 시작하자마자 곧 예수님의 시체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간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다시 사실 것이라는 믿음, 혹은 확신이 전혀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단지 사랑했던 스승의 시신을 좀더 곱게 모시기 위해 향품을 가지고 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지진이 나며 천사들에 의해 움직여 무덤이 열린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5절을 보십니다.
"무덤에 들어가서 흰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여인들이 열려진 무덤 속을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는 없고 예수님의 시체가 누였던 곳에 흰옷 입은 청년처럼 보이는 천사가 대신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며 떨며 있었습니다. 어두움이 걷히기 시작한 때, 내가 무덤 속의 여인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왠 만큼 담 큰 사람 아니면, 기절이라도 할 상황이었습니다. 여인 둘이 서로 끌어안고 벌벌 떨고 있는데, 천사가 놀라운 소식을 전해줍니다.
6절입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이 빈무덤 앞에서 여인들은 비로서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셨다는 엄청난 사실을 천사의 통고를 받고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날 새벽, 성경의 증언은 부활의 현장에 가장 먼저 가서 확인했던 그 여인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부활에 대한 어떤 기대감도, 또한 빈무덤의 현장을 목격한 사람의 미칠 것같은 감격과 흥분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자들이 심히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여러분!
이 사실이 이해가 되십니까 어떻게 그렇게 예수님을 3년동안 그림자처럼 좇아다녔던 여인들이, 그리고 누차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다시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건만, 빈무덤을 보고서도 믿지 못하는 여인들을 이해하실 수가 있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저는 이 장면을 상상하면서 여인들이 참 그래도 용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같으면 새벽 동터오르는 그 시간에,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그때, 전설따라 삼천리도아니고 으시시한 무덤에 아예 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역시 여인들은 대단합니다. 세상은 남자가 정복하고 세상을 정복한 남자를 좌지우지하는 자가 여자라는데 정말 그 말은 맞습니다. 제자 12명 다 남자인데, 아무도 먼저 무덤에 간 자들은 없었습니다. 설사 떠밀려 제비 뽑혀 갔더라도 천사를 보고 빈무덤을 보는 순간 도망도 못쳤을 것입니다. 발이 딱 얼어붙어 심장마비로 죽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었겠다 생각됩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도망쳤습니다. 빈 무덤에서 발걸음을 떼어 도망친 것도 대단한 용기가 아니면 안됩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와 그 충격이 너무 커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감격과 기쁨, 흥분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계속 되는 본문을 보아도 성경은 부활의 흥분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감격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계속 부정적인 기록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13절을 보십시오.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14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서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이라"
성경은 거듭 제자들이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말을 믿지 아니함이라" 이 부활의 엄청난 소식을, 예수님과 같이 다닐 때 죽음을 앞두고 부활에 대해 이야기했건만, 지금 듣고도 제자들이 믿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24:11에도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니"
성경은 예수님의 역사적인 부활의 순간, 흥분과 감격을 기대했던 우리들을 실망시키는 정보만 계속 나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니 제자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귀신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고 믿지 않았습니다.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를 눈으로 목격한 이들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죽음에서 살아난 나사로를 보며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또한 예수님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 전에 [내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었을 때, 조그만 흥분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야 했습니다. 너무 기뻐 눈물 흘리며 손을 들고 찬양이라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마디로 잘라 말합니다. "저들이 믿지 아니하더라"
여기서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기록하며 매우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감격과 흥분이 먼저가 아니라 먼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으로 먼저 받아들일 때, 부활은 감격이 되고 흥분이 되며, 기쁨이 되고, 평강과 승리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수많은 학자들이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한다고 해도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바보 나라에서 1더하기 1이 2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그것이 어떻게 2가 되느냐고 우기면, 어쩔 수 없듯이 예수님의 부활을 아무리 이야기하고, 과학적인 증명을 해 주어도 못 믿겠다고 우기면 할 수 없습니다. 우기고 고집하면 못 말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 이전에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받느냐가 더 중요함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2. 갈릴리-부활의 감격과 흥분, 기쁨을 경험하는 곳
또 한가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주시는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읽어보면 빈 무덤과 동시에 아니 어쩌면 빈 무덤 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를 천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7절을 보십니다.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가서 빈 무덤을 전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빈 무덤보다는 갈릴리에 초점이 맞추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빈 무덤이 중요했다면 가서 빈 무덤을 전하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빈 무덤에 강조점을 두고 있지 않고 갈릴리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8:7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또한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마28:10에 보면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예수님 역시 갈릴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6절에는 이를 더욱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눅24:5,6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사람들은 지금까지 예수님의 무덤에 초점을 맞추고 계속 예수님의 무덤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빈 무덤에서 나를 찾지 말고 갈릴리에서 나를 만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의 감격과 흥분, 그리고 기쁨은 빈 무덤에서가 아니라 바로 갈릴리에서 체험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빈 무덤을 찾는 데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갈릴리에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갈릴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감격을 체험해야 합니다.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확인되는 곳입니다. 부활의 기쁨과 흥분과 감격을 경험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감격은 역사적인 현장인 빈 무덤에 가만히 앉아서 체험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직접 갈릴리로 가서 부활의 주님을 감격적으로 포옹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가야할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그것은 주님이 나를 부르신 그 현장입니다. 처음 제자들이 부름 받았고, 예수님을 좇기로 결심했던 장소, 그물을 버려두고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기로 결심했던 바로 그 장소. 처음 예수님 만났던 그 장소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장소에서 예수님은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말씀하셨던 것과 똑같이 "이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너희는 가서 만 천하에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의 예수님을 확인하고, 감격과 기쁨과 흥분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은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야 하고, 생명을 살려야 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바울은 부활장이라 불리워지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부활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부활의 결론을 이렇게 맺습니다.
고전15: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러므로 오늘의 부활의 감격과 기쁨을 체험하는 사람은 우리의 삶의 현장인 세상 속에 나아가 주의 복음을 전하고, 주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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