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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보편성 (갈 03: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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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요즘 교회에 어떤 성격이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교회를 세우셨을 때 마치 하나님한테 어떠한 성격이 있듯이, 그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들한테 어떤 성격이 있듯이, 교회에 아주 뚜렷한 성격이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제 옛날 사람들이 어려운 한자어를 사용하여 “속성”이란 말을 사용한 적이 있었어요. 누구누구에게 속한 성격이란 말이죠. 그럼 교회에 속한 성격이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많이 이야기해 왔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우리가 지난 주에 생각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는 하나인 교회이다라고 했어요. 그것은 교회의 단일성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지난 주에 생각했으니까 오늘 또 하나의 성격을 말씀드립니다. 그것은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인 교회니까 따라서 이 교회는 그것이 어떤 곳에 있든지 아주 보편적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두번째 속성을 보편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더 재미있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면 잘 이해하냐면 교회를 우리가 옛날 구교를 아시죠. 흔히 천주교라고 합니다. 천주 교회를 로마 카톨릭 교회 그렇게도 이야기하기도 하죠. Roman Catholic Church, 로마 카톨릭 교회. 그러면 우리가 생각하기를 Catholic 하면 그것은 구교 또는 천주 교회만 말하는 건가 보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난 엄밀하게 따져보면 교회는 그것이 진짜 교회라면 어떤 교회이든지 전부다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그 보편적이라고 하는 말이 카톨릭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천주 교회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가 보편적인 교회라는 말이예요. 그럼 그것이 도대체무슨 뜻인가. 보편적이라는 말은 크게 말해서 두가지 의미를 그 안에 함유하고 있는데 그것은 뭐냐하면 거기에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다 거기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이죠. 만일에 어떤 일정한 사람들만 거기에 들어올 수 있다면 그것은 보편적이 아니라 특수적이죠. 보편적이라고 하는 말은 누구든지, 어떤 종류의 사람이든지 계급의 차이도, 남녀의 차이도, 경제적 지위도 없는 누구든지 다 들어와서 그 회원이 될 수 있을때 그것이 보편적입니다. 또 하나 보편적이라고 하는 말은 온 세상에 다 널려 있다는 뜻을 가지죠. 만일에 어떤 지역에만 있을때는 참으로 보편성이 드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세월을 두고서야 실현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교회는 신약의 교회를 말하는 것인데 신약의 교회가 맨 처음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자기를 따라다니는 사람들한테 그 당시에는 120명 정도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 너희가 이곳에 머물러 있어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머물러서 예루살렘에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어떠한 선물을 교회에 주셨냐면 성령님을 그들에게 내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사건입니다. 구랴소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도 교회가 있었죠. 그것을 구약의 교회라고 말합니다. 이제 신약의 교회가 시작되었는데 그 교회는 보편적인 교회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시작된 그 초기에는 아직 보편적일 수가 없습니다. 왜 몇몇 안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있을 수 밖에 없죠. 따라서 이 교회는 점차적으로 온 교회를 향해 나아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점차적으로 세월의 진전을 따라서 실현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보편성을 통해서 우리는 커다란 뜻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느 한 곳에만 머물러 있어서 “ 우리는 여기 있는게 좋사오니 ” 하고 있어댜 할 곳이 아니란 말이요. 베드로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고백했었습니다. 주님의 변화된 모습을 바라보았을때, 그때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을때 “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세개를 지읍시다. 하나는 주님을 위해서 짓고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 짓고 하나는 모세를 위해서 지읍시다.” 여기 있는게 좋습니다. 교회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끼리 여기에 앉아서 우리끼리 있으니 좋다. 우리끼리 똘똘 뭉치면 우리야 아주 좋죠. 그것이 있어야 좋죠. 그렇지만 그것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교회의 보편성이 실현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이 두가지를 명심하시고 이것을 잘 설명해 주는 본문을 오늘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것이 오늘 갈라디아서 3장에 있는 이 말씀입니다. 물론 이 본문에는 그것에로 우리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다른 설명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깊이있게 생각할 수 없지만 가장 간단하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23절부터 우리가 읽었는데 거기에 보면 믿음이 오기 전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아주 역사적인 의식을 가지고 하는 말입니다. 이때의 믿음이라고 하는 말은 기독교적인 믿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옛날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는 아직 그런 기독교적인 믿음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의 앙몽리의 형태는 있습니다만은 예수를 진짜로 믿은 것은 아직 없었다는 말이죠. 따라서 믿음이 오기 전에는 어떻게 되었었는가. 두가지 현상이 있다고 본문은 말하는데 우리가 율법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쳤느니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할것 같으면 구약의 율법과 관련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빛을 받지 아니하면 빛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나와서 나는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믿음이 오고 나서 어떻게 하는 것이 되었는가. 그래서 그 시절에는 믿음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들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하려 함입니다. 율법이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 여기 이상한 말이 하나 나왔죠. 몽학선생은 쉬운 말로 하면 마치 가정교사 입니다. 가정교사는 어린 아이들한테 잘 가르쳐서 그 아이들이 진리에 이르도록 하는 일을 하죠. 마치 가정교사가 그렇게 하듯이, 이때 가정교사가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가정교사가 아니예요. 이들 가정교사는 옛날 고대 사회에서의 가정교사를 말합니다. 그러면 그때에는 공식적인 학교가 드물었기 때문에 모든 공식적인 교육을 가정교사가 다 맡아 합니다. 우리 식으로 바꿔 말하면 학교 선생님들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학교 선생님이 되어져서 학생들을 진리 가운데로이끌어 간다. 그런 거예요. 그래서 가정교사 선생님이 필요하다면 매를 들어서 때리면서 학생들을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 가듯이 그러한 역할을 율법이 했다는 말이죠. 그럼 율법도 사람들을 결국은 어디까지 이끌어 가려고 합니까.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이끌어가는 거예요. 그것이 율법의 가장 커다란 기능의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에게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거예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율법은 손을 들어서 이 사람을 보라 그렇게 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장에 갖다 놓고서는 “ 이 사람을 보라.” 그랬단 말이예요. 그래서 나중에 사람들이 이 말을 의미있게 듣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을 보라 ( 에케 호모 ) 그런 말인데 이 한 사람을 보라는 말이죠. 율법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이루어주시는 그리스도를 보게끔 하는 거예요. 율법을 읽으면서도 그리스도를 못보게 되면 그게 유대인들의 상황이었습니다. 그게 율법의 기능속에 제대로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그 상황 가운데로 인도하기 위해 율법이 그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그 구약의 상황 가운데서는 하나님과 관련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져야 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서 그 율법을 지켜야만 되게끔 되었습니다. 그때에는 보편적이지 않아습니다. 그때는 특수적이었습니다.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하나님과 관련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상황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율법안에 갖힌 거싱 아니라 어떤 이스라엘 민족이 되어야만 하는게 아니라 이제는 25절에 하는 말이 “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즉 가정교사, 율법아래 있지 아니하다. 이제는 율법을 지켜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우리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제는 이중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되어야 해요.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가지고서 율법이 지시하는 그리스도를 바라보고서는 그리고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안해도 되게끔 되어졌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제 아주 멋있는 말이 우리에게 선언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율법이 우리에게로 인도해 가는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는, 믿음이 온 후에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 26절이 한마디로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그렇게 말합니다. 무엇으로 되었다고요 열심히 노력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님이 하나님의 들이시니까 당신님을 믿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해 주신 겁니다. 성경이 그것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 대해 믿음이 있으면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자부심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서 여기 살아가는 것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것을 말하기 때문에, 성경과는 싸우려하지 마십시요. 그래봐야 여러분이 손해니까. 사람들과는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싸울 필요가 있어요. 그러나 성경과는 싸워봤자 자기가 손해입니다. 성경과는 싸우지 마시고 성경이 너희가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그러면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같지 않은데요. 내가 여러가지 문제가 많은데요. 그렇게 말하지 마시고 아!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 “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안에 있는 모든 분들이 예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그리스도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여기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했다고 여기 여자분들은 우리는 제외되는 건가. 그런게 아닌 것입니다. 여기 다 포함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으 자녀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보편성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는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누구든지 믿음만 가지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이제는 차별이 없어집니다. 유대인이라고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아니고 이방 사람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사람도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등국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등국민이고 우리는 이등국민이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나오는 함의가 있습니다. 28절이 잘 설명해 줍니다. “이제는 만일 너희가 유대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그것이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다. 헬라인을 모든 이방 사람들의 대표자로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는 말은 온 세상 전체를 포괄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대개 서구의 사상을 이야기할때 그 사상이 두개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이 유대인들을 히브리 사람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히브리 사람들로 부터 흘러온 히브리 사상. 헤브라이즘과 이 헬라 사람들로 부터 흘러온 헬레니즘 이 두가지가 합해서 서구사상을 형성한다고 대개 이야기하는데 그런 것들이 상관없이 이제는 모두다 하나이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보편적이죠. 거기에서 부터 따라나오는 함의가 있는데 그게 뭐냐면 “ 종이나 자유자나 ”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은 옛날에 종이었습니다. 남들에게 묶여서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하는 사람이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부의 사람들은 자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안에 있으면 그 구별이 없어집니다. 이게 굉장한 의미에서 혁명적인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지금 들어볼 때는 아무 이야기도 아닌 것 같죠.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요. 기독교가 맨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요. 그때 분명히 노비들이 있었습니다. 노예들이 있었어요. 상민들이 있었고 양반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한테 들려오는 이야기가 이제는 양반도 없고 상민도 없고 그런 이야기 아니예요. 그런다고 해서 이게 상민들로 하여금 무슨 무력혁명을 일으키라는 이야기입니까. 아니죠.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상에, 그 제도에 근본적인 뿌리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거죠. 근본적으로 그 차이가 없어졌다. 그러니까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다 동등하다는 의식에로 우리를 이끌어 가는거란 말이죠. 이제는 그런 차별이 없다. 또 무엇이 없습니까 남자나 여자나 없다. 남자는 더 우월하고 여자는 좀 밑에 있다는 그런 것이 없다는 거예요.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난 주에 이야기했던 우리가 모두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도 있지만 다 동등하다 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보편성의 근거입니다. 이제는 여기에는 종이나 자유자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한국 사람이나 미국 사람이나 영국 사람, 일본 사람이 구별없이 누구든지 다 들어올 수가 있습니다. 미국의 상황 가운데서 보면 백인이든지 흑인이든지 그냥 다 들어올 수 있어요. 자연스럽죠. 그래야 돼잖아요. 그러나 교회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압니까 얼마나 엉터리였는지, 성경에 보면 그렇게 해야 되는데, 딱 생각하다가 “ 흑인들하고 같이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게 있을 수 있는가” 그렇게 생각해본 거예요. 흑인들을 노예로 사용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안믿는 사람들이었나요 그런 사람도 있었죠.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이 의외로 사용했었습니다. 옛날에. 그러니까 얼마나 성경에서 배우는 것을 자기의 삶 가운데 실천하지 않는 모습입니까 교회도 하는데 여기는 백인들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여기는 흑인들이 모이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지어주기는 해요. 그런데 너희들은 저쪽에서 따로 예배드려라. 그러면 보편성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이죠. 우리가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건 그 사람들이 참 잘못했고만, 우리는 그런 잘못 안범하지. 그렇게 생각하는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까요. 우리에게 정말 보편성이 있는가. 우리가 이 공동체 안에 누구든지 다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인가. 여기는 정말 신분의 차별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모두가 정말 다 하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인가. 깊이 있게 생각해 보면 그렇지 않은 모습들을 여러분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에 그런 것이 발견되어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부 다 없애 버려야 합니다. 교회의 보편성이 드러나게끔 해야 합니다. 만일에 그것이 교회에 속한 속성이라면 교회가 힘써 나가야 할 일 중에 하난가 그런 성격이 잘 드러나도록 하는 거죠. 그게 교회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즘에 교회가 교회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도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지난 주 말씀을 적용해서 말씀드리면 교회가 하나되는 일을 잘 드러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교회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라는 의식을 가지고서 그런 성격에 맞게 움직여 나가야 합니다. 오늘 드린 말씀에 근거할 것 같으면 교회가 보편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야 합니다. 여기는 누구든지 다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어린아이나 그럼 성격이 잘 드러나야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여기는 오직 젊은 사람들만 올 수가 있습니다. 그게 효과적이니까. 왜냐하면 젊은 사람들이 이해도 빠르니까. 그러면 그 교회의 성격이 드러납니까 안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어제 선교단체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선교단체가 나중에 교회로 전향하려고 할때 부딪치는 문제가 그거란 말이예요. 그렇게 되면 거기에는 주러 젊은 사람들이 중심이니까 교회의 보편성이 드러나디 않는단 말이예요. 그래서 우리 교회 안에는 나이 드신 분도 있어야 되고 나이 어린 사람도 있어야 되고, 돈 많은 사람도 있어야 되고 돈 없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다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보편적입니다. 그 성격이 파괴되면 교회의 교회다운 모습이 이루어지지 않는단 말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게끔 누가 노력을 해야 됩니까 목사님이 노력해야 합니까. 장로님이 노력해야 됩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이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강조해 온 말입니다. 만일 우리가 “내가 교회의 한 부분이다.” 라고 하는 의식이 없으면 교회는 없는 것입니다. 호산 교회가 여기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호산 교회가 없는 거예요. 호산 교회가 있으려면 우리 모두 이 예배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 또 어떻게 오늘 무슨 일 때문에 못나왔을지라도 그분들이 우리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 내가 호산 교회이다. 내가 한 사람이 호산 교회가 아니고 우리 전체가 다 모여서 호산 교회이다 라고 생각할 때에야 비로소 거기에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어떤 경우에는 이 건물이 우리에게 없어질 수가 있어요.그래도 우리는 호산 교회로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만일에 으리가 건물이 업어져서 우리가 누구네 집에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것도 없어서 이 밖에서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해도 호산 교회는 있는 거란 말이예요. 어떻게 할때 교회가 교회다운 것일까요 교회에 보편성이 드러날때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 속에 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 안에 누구든지 다 들어올 수 있는가 지금은 그런 문제가 많이 없어졌지만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점 중의 하나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다웁게 생각을 바꿔야 하는데 아까 미국에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믿으면서도 노예 갖다 쓰고 말이죠. 또 흑인들 교회를 따로 만들어 놓고 “ 너희들은 여기에서 예배 드려라.” 그랬듯이 남아프리카 공화국 사람들이 그렇게 했듯이, 한국사람들도 그래가지고서 이 세상에 오늘날 한국 교회나 한국 사회 전체를 망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문제점 중위 하나가 뭐냐하면 “ 어머 저 사람들은 전라도 사람이다.” 이게 가장 커다란 문제인데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도 똑같이 생각합니다. 그래가지고서는 교회안에도 전라도 지방에 전라도 사람의 교회가 되는 것은 당연하지요.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 살면서도 여기는 경상도 교회다. 여기는 전라도 교회다. 물론 그것을 말로 하지는 않죠. 그런데 가만 들여다 보면 그 움직이는 게 다 그렇게 돌아간단 말이예요. 그렇게 되면 그것이 교회의 성격을 잘 드러낸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드러내지 않는 짓이예요. 교회를 허물어 뜨리는 짓이예요. 거기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도 있고 거기에 뭐 굉장한 일이 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의 성격을 드러내지 않는 일이니까 교회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어떡하겠어요. 그리스도 믿는 사람들이 극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주 심각함 문제입니다. 한국사회 전체를 무너뜨리고 있는 문제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그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 사도 방울의 이 말 “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없이 전라도 사람이나 경상도 사람이나 없이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이나 서울 사람이나 없이 다 하나니라.” 그것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서울서나서 서울서 쭉 자라났는데 내가 마음속에 여기는 서울 사람들만 와야 된다. 그렇게 하면 그게 교회겠어요. 그런게 없다는 말이지요. 그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는 것이 교회의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세워놓은 모든 장벽, 모든 걸림돌을 다 무너뜨리면서 다 똑같은 사람들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역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다 이런 장벽을 가지고서, 마음 속에는 다 그런 장벽을 가지고, 그런 가시덤불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사실 십자가를 옳게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교회의 이 보편성을 드러낼려고 하시길 바랍니다. 맨 처음에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강조했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교회여야 하죠. 그런데 또 하나 여기서 퍼져나가야 할 것은 우리가 여기 모여 앉아서 자! 우리가 서로 이렇게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 좋다. 그러고만 앉아서는 교회의 보편성이 아닙니다. 보편성이 이루어지려면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저 인도네시아에서 아프리카에도 복음이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거기도 우리와 똑같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보편적인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교회의 보편성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보편성이 드러나야 합니다. 또 이 교회를 통하여서 온 세상에 이 보편적인 교회, C 교회가 넓게 퍼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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