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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나흘의 의미 (요 11:3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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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공생에 3년 동안에 죽은 사람 3명을 살려 주셨습니다. 오늘 은 그 중의 한 사람인 나사로 살리신 내용입니다. 성경에는 이 나사로 의 가족이 마르다 마리아 이렇게 3명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 이상의 다른 식구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냥 3남매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삼남내가 살던 곳은 베다니! 베다니는 동쪽과 서쪽에 각각 하나씩 있 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삼남매가 산 곳은 베다니 중에서도 동편 베다 니! 예루살렘서 약 2km 상거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동쪽 베다니 동네 입구에 감람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 식일에 자기 알맞는 것이라 했습니다. 안식일에 자주 나가 쉬신 곳입 니다. 마태복음 21:17에 보면 성전에서 비둘기 파는 자를 채찍질하시 고 노여움을 푸시며 쉬신곳도 이 베다니라고 하셨습니다. 거리는 예루 살렘에서 5리쯤 된다고 요한복음 11:18에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동쪽 베다니 동네 입구에 들어 섰습니다.

 동쪽 베다니와 서쪽 베다니 사이는 42km 정도의 거리가 있었습니다.

 하룻길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위급할 때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람을 예수님께로 보내어 속히 오셔서 나사로를 고쳐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 다.

 나사로, 마르다, 마리아 이 삼남매는 예수님을 평소에 끔찍히 사랑하 고 존경하고 잘 대접했습니다. 예수님도 이 삼남매를 끔찍히 사랑하고 귀여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볼 일이 있어 올라 오셨다가 자주 이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들려 쉬어 가시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가 보낸 사람편에 나사로가 위급하 다는 소식을 듣고도 계시던 곳에 그냥 더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 사 이, 나사로는 죽어 장례까지 치뤄졌습니다.

 마르다가 달려와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조금 뒤 마리아 역시 같은 말을 주님께 했습니다.

 여러분!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런 말은 악의에 찬 가시돋친 통한에 맺힌 원망 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벼운 실상과 아쉬움은 동반한 원망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과 신뢰의 마음이 뿌리채 흔들리지는 않았 으나 역시 인간적인 섭섭함은 어쩔 수 없었기에 가졌던 원망입니다.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원망을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 습니다. 내 아쉬움,나의 필요, 나의 체면을 살리는데 보탬이 되지 않 았다고 해서 하나님과 예수님을 원망하는 일이 우리네 사람들에겐 너 무나 흔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 예수님께 자기 나름대로 정성과 사랑을 많이 바쳤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런 불평, 원망이 더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니, 평소에 나하고 그렇게 친하게 지낸 예수님이 나에게 이렇게 나 오실 수가 있느냐구

우리집에서 쉬시기도 한두번이 아닌데-그리고 식사는 몇 번 몇 십번 을 같이 하셨는데 이게 뭐람

나사로가 병들어 위급하다는데 즉시 내려와 고쳐 주시는게 아니고 죽 어 장사지낸 다음에야 천천히 내려 오시다니!

해도 이건 너무 하셨어. 그 동안의 우리의 관심과 사랑과 봉사를 무시 하신 처사야.

 마르다와 마리아는 이렇게 고까운 마음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마리아의 경우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털로 씻겨 드 린 최고의 희생과 헌신을 무릎 아래 앉아서 경청한 모범적인 제자였습 니다. 마르다도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오시면 정성 다하여 음식을 맛 있게 만들어 대접하는 것을 즐거워 하였던 갸륵한 여인입니다.

 이 마르다, 마리아가 의지하고 살던 나사로가 죽어 가은데 빨리 와 보시라는 전갈을 들으시고도 늦장을 부려 결국 나사로가 죽어 장례까 지 치룬 뒤에 내려 오신 그 예수님이 얼마나 원망스럽습니까

아아 마르다, 마리아가 성미 고약한 자매였다면 성경에 기록된 이 정 도의 원망으로 그치지 않고 입술 삐죽이며 냉소했을지 모릅니다.아니 저주까지 했을지 모릅니다.

 당신의 입버릇처럼 말하는 소위 그 사랑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무하고 실용성이 없는 형편없는 것입니까"

하고 항변을 했을지 모릅니다.

 "우리 가족의 생계를 떠 맡고 있는 기둥같은 우리 오빠가 아직 늙지도 않았는데 왜 일찍 죽어야 합니까 왜 우리가 기별했는데도 늦게 오셨 습니까"라고 불평했을지 모릅니다.

 누구든지 마르다와 마리아의 입장이 돼 보면 그 심정 충분히 이해가 갈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교회에 다녔고,열심히 교회에 봉사햄아고, 열심히 전도도 했 는데 예수님이 전혀 자기의 요구에 응답을 제 때에 해 주시지 않을때 고까와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잘못된 자기 공로주의입니다.

 "내가 얼마나 교회에 잘 출석했는데-."

그가 이렇게 말했지만 그것은

"내가 얼마나 열심히 전도해 주었는데-"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예수님께 잘 해 주었다는 공로 내세움입니다.

 이런 나에게 왜 홀대하느냐적어도 내가 예수님께로부터 받아야 하는 대우는 이보다 더 값지고, 더 크고, 더 완전한 특별대우, 같은 것이어 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예수 님은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하였습니다.

 죽은 자를 생각하며 우는 것은 인지상정인데 왜 예수님이 통분히 여 기시고 민망히 여기셨을까요

통분히 여기셨다는 어떤 의미일까요

불쾌한 감과 분노의 반발적인 감정을 섞어 가지셨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이 통분히 여기셨습니까

그것에 대하여 신학자들 간에 이런 저런 의견들이 있으나 범죄한 인 류를 지배하고 있는 사망의 권세에 대하여, 불쾌하게, 분노의 감정을 가지셨다고 보는 편이 가장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토록 사랑스럽던 삼남매!

그중에 하나가 죽고 둘만 남아 비탄에 빠진 인간고! 이 죽음을 휘둘러 대는 사단!

예수님이 불쾌하게 여기시고 미워하시고, 분노를 느끼신 것은 바로 이 죽음 피안에서 죽음의 사자로 군림하여 도도히 서있는 사탄이었습 니다. 모든 인간을 허무의 늪으로 몰아 넣고, 비탄과 자포자기로 몰 아 대는 저 죽음이라는 적! 그것을 휘두르는 사탄!

예수님은 죽음의 시퍼런 서슬을 휘두르는 사탄의 잔인한 농간에 분노 를 느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죽음 앞에 속수무책인 연약한 인간의 처지에 대한 불쌍함! 그것을 느 끼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 자신도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떠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기피하려 하셨던 쓴잔이었습니다.

 그렇게 괴로운 죽음!

이 죽음을 면해보려는 인간의 안간힘을 역사이래 계속된 가장 큰 처 절함이었습니다.

 그 죽음에 대하여 전혀 무력한 인간의 실존 앞에 민망함을 느끼신 예 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느끼신 통분함과 민망함은 마르다, 마리아의 원망, 불평보다 더 깊고 근본적인 것에 원인을 두고 계셨습니다. 마르 다. 마리아의 원망이 듣기 싫고, 불평이 괴씸해서 통분히 하고 민망해 하신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휘두르는 사탄! 이 사탄에 대해 통분하셨습니다.

 이 사탄의 휘두르는 죽음 앞에 무력한 인간모습! 이런 인간 모습에 대하여 민망해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최대 최후의 적은 사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에수님이 가장 꺽고 싶어 하신 것은 사탄이 휘둘러대는 저 죽음이란 칼입니다 !

예수님이 마르다 마리아에게,

그를 어디에 두었느냐는 이 질문은 시체를 인격으로가 아니라 물체 취급하시는 것을 나타냅니다.

 사실 영혼이 떠나간 육체! 그것은 한난 썩음을 기다리는 물체에 지나 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본인의 시체에 대하여 더욱이 좌상의 시 체에 대하여 그것은 이미 물체이니 아무렇게나 마구 처치해도 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야곱이 죽었을때는 몸에 향 집어 넣는데만 70일이 걸렸다고 했습니 다. 기독교에서는 화장을 그다지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수장도 마찬가지지요 매장입니다. 하여튼 시체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 라 악취를 풍기며 썩기 마련입니다.

 임금도, 대통령도, 학자도, 농부도, 거지도 여러분과 나도 똑같이 영 혼이 떠나가면 썩습니다.

 아무리 생전에 영화와 권세와 부귀를 누렸다 하더라도 일단 영혼이 떠나가면 그 자체는 썩음 밖에 별다른 변화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영혼없는 육체!

시체!

시체가 될 육신을 위하는데에 얼마나 정성을 쏟고 있는 인간들입니 까 맛있는 음식 보약과 화장품과 의복으로-

그러나 정작 영혼을 위해서는 그 얼마나 등한한 인간들이 많이 있습 니까

예수님께서 왜 마르다와 마리아의 긴급한 요청을 듣고도 나사로가 죽 어 장사 지낸 다음에 오셨는지 아십니까

나사로를 고쳐줄 능력이 없어서입니까

'나사로를 고쳐줄 생각이 없어서입니까

마르다와 마리아를 애타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를 원망하나 안하나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습 니까

그런것 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실 필요가 없었지요.

 35절에 보면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은 소리없이 우신 울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신 것이 누가복음 19:41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울음은 소리나게 우신 울음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처형 받으실 일을 앞두고 우신 것은 통곡하는 부르짖음이었다고 히브리서 5:7에 밝혀주고 계십니다.

 하나는 인정적인 울음

또 하나는 애국적인 울음

마지막은 종교적인 울음.인류 구원을 위한 자기 포기의 위대한 갈등 에서 비롯된 울음

마르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죽은 자가 나흘이 되었으매 냄새가 나나이다." 나흘!

유대인의 전설 속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가장 큰 애국은 사흘 이후이다. 그것은 사흘간의 그 영이 무덤을 배회하면서 다시 그 시체 속에 들어갈 기회를 노리기 때 문이다. 그러나 네째날에 그 열굴의 모양과 색이 변하게 될 때는 드디 어 단념하고 떠나간다.

 나흘은 완전히 소망이 없는 날로 여긴다 그 말입니다. 원래 4일, 40 일이니 40년이니 하는 4라는 숫자는 고난! 죽음,실패,수치를 의미한다 고 되어 있지않습니까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만에 오신 예수님!

절대절망!

그런 상황에 있는 나사로에게 오신 예수님!

마르다의

"주여 죽은 자가 나흘이 되었으매 냄새가 나나이다." 라고 한 이 말 속에 그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앓고 누워있을 때는 그래도 나을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죽은지 하루,이틀,사흘까지는 혹시 그영혼이 돌아올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흘!

이제는 그런 실날같은 전설적 희망도 사라진 절대정망! 죽은지 나흘 뒤나 100년, 1000년,3000년 뒤나 썩어 없어지는 절대절망의 영역 즉 체념의 영역에 던져저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일부러 이런 인간의 절대절망 속에 찾아 오 셔서 완전소망을 주시고 깊어 교훈적 목적에서 짐짓 지각을 하신 것으 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다 틀렸다.

고 인간들이 손 놓은 그때, 그 장소에 나타나신 예수님! '나사로야, 나오라!"

살리신 예수님!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는 마리아와 마르다와 시각은 어떤 느낌과 판단을 담고 있었을까요

부활은 단순히 최후심판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 들의 생활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으며 이것은 예수님의 능력 안에서 언제든지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물론 이 나사로도 다시 그 육체는 죽었습니다.

 최후의 심판때의 부활만 믿고 현재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있는 신자 들에게 새롭게 깨달음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산 나사로는 물론, 나사로의 절대절망에서 완전소망으 로 부활한 사실을 목격한 사람들! 그리고 그증언의 기록을 읽으며 예 수님을 믿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인류가 다 현세적인 이 부활의 감 격을 다같이 가지고 살게 하실 목적으로 나사로를 살려 주셨습니다.

 나사로에게!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과 나사로의 죽음 때문에 슬퍼하는 마르다, 마 리아를 위로하러 왔던 유대인들에게!

그러나 그보다도 오늘의 우리들에게까지!

궁극적인 부활과 현재적인 부활을 동시에 누리며 죽음의 철퇴, 보도 를 휘두르는 사탄의 위협, 공포를 일소에 붙이며 사망의 권세를 깨뜨 리고 승리하신 주님과 승리를 공율하며 살게 해주신 것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 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바로 이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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