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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고난 (히 05: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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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주일 바로 전 주일은 고난주일로 지킵니다. 그러니까 이 주일은 바로 고난주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부터 한주간 동안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극치를 이루었던 주간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역사적으로 이 한주간 동안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명상하면서 그 은혜에 감사하며 부활의 새 아침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것이 상례로 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는 의미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1)나를 위해 죽으심에 대한 고마움과 (2)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해야 된다고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그 만 분의 일이라도 지키는 데에 고난주간을 지키는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성격에 대하여 본문이 설명해 주는 한도 내에서 생각해 봅시다.

1.기도의 고난
본문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이렇게 심한 통곡으로 기도하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을 없이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간구하셨습니다(누가복음 22:44, 히브리서 5:7, 마태복음 26:40).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닥쳐올 때 감격이 있습니까 다른 때는 모르지만 고난주간이나 성찬식이 있는 주일에 기도를 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어떻게 신앙인이라 하겠습니까

2. 순종의 고난
본문 8절에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되시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순종하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유일의 비결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한가지씩이라도 순종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고난주간을 맞은 성도의 태도입니다. "사랑하라" 하셨으니 사랑하기 싫은 사람도 사랑하고, "기도하라" 하셨으니 기도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기도하고, "충성하라" 하셨으니 충성할 수 없는 처지에서 더욱 충성하고, "참으라" 하셨으니 참을 수 없는 지경에서 참는 것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3.제사장 죽음의 고난
본문 10절에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은 대제사장이라고 칭하심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최절정은 역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으로서 그를 쫓아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말과 혀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편하게 예수를 믿습니다. 이렇게 안일하게 믿다가 마지막 환난이 닥친다면 어떻게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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