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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십자가 (갈 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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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4월의 첫 주일이 되었습니다. 오는 4월 15일은 부활주일입니다. 교회에서는 부활주일 전 40일간을 사순절이라고 해서 이 기간 동안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며 경건하게 지내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오순절은 부활주일 다음부터 50일째 되는 주일,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을 말합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그래서 오늘과 다음 주일은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십자가를 생각하며 그 십자가가 의미하는 바를 공부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볼 때마다 감사와 감격을 느끼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한 느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는가 그것을 믿기만 함으로 죄 사함과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우리의 구원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며, 하나님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것을 원하시는가 구원을 받은 나는 구원받기 이전의 나와 무엇이 다른가 오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과 그 십자가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라는 말은 왜 하였을까요 그 앞 절을 읽어보아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갈 6:12-13,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이어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는 바울 말고도 다른 선생들이 있어서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교훈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할례를 받고 유대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참된 기독교 신앙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앙의 바른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목숨을 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한 복음은 처음부터 심한 반대와 도전에 부딪쳐왔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지금까지 2000년 동안 반대와 미움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왜 이런 배척을 받아야 했을까요 그것은 이 복음이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빛을 싫어하고 거짓은 진리를 미워합니다. 처음부터 거짓말장이인 마귀는 빛이시오, 진리이신 하나님을 미워하여 하나님을 왕과 아버지로 모시려는 사람들을 유혹하여서 하나님께 대적하게 하려고 획책하여 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때로는 폭력으로, 때로는 거짓말로, 그리고 재물과 탐욕으로 유혹하여 하나님을 떠나게 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영적 전쟁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시작된 이 전쟁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수를 사랑하고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화목하라는 주의 명령을 전한 바울도 거짓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만은 무서운 저주를 내렸던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갈 1:6-10.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갈 6:7-8을 보십시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 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세상 사람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삽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성령을 위하여 삽니다. 바울은 인생이 하나님을 속이면서 적당히 즐기면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분이 있으므로 자기의 뜻대로 살아서는 안 되고 우리를 지으신 분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씨앗을 심고 거두는 농부의 삶과 같다고 말합니다. 즉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두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행한 대로 그 열매를 얻습니다. 이것은 진리이며 동시에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누구라 할지라도 자기가 행한 대로 하나님 앞에 서서 심판을 받게될 것을 말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진 것, 사망을 거둘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는 사람이므로 성령을 위하여 심고 영생을 얻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이란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성령을 위하여 심고, 그리고 영생을 거둘 수 있습니까 초대교회의 거짓 교사들은 할례를 받으라고 가르쳤습니다. 믿음만 가지고는 부족하고, 예수를 믿는 일에 더하여 유대인의 법을 다 따라 해야 영생을 거둔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 것은 인정하지만, 예수를 믿기만 하면 자기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무엇인가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구원하실 것이라는 생각에 율법을 지키라고 말하면 쉽게 받아들여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교만한 존재이므로 자기가 무엇인가 자기의 구원을 위해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행위로, 자기가 의로워서, 자기가 구원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하여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였지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기만 하면, 우리가 아무 공로가 없어도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은 자기의 구원을 위하여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느끼고, 그렇게 하려고 애를 씁니다. 거짓 교사들은 그런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이 있습니다. 믿기만 하는 것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행위에 의한 칭의를 강조합니다. 주일 예배에 한번도 빠지면 안 되고,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야하고, 새벽 기도회에 나와야 하고, 목사를 잘 섬겨야 하고, 그리고 많은 헌금으로 교회당을 건축해서 헌납하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두려움이 없이 담대하게 설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봉사도 하고, 착한 일도 해야 하지만, 그것은 거저 구원을 받은 사람의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구원 받기 위하여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내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즉 죽어버렸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죽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과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전파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 진리의 진수입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 그가 일생 동안 전 세계를 다니며 전파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교회가 지난 2천년 동안 전파하였던 것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였고, 제가 오늘 전하려고 하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사도들과 그들의 뒤를 이은 모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전하려고 한 것은 자기들이 귀중하다고 생각한 것이나, 율법이나, 선행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바울이 자기가 자랑할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뿐"이라고 외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가 자랑할만한 것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하는 당시에 십자가는 잔인한 사형대였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인간이 고안한 사형방법 중 가장 잔인한 방법이라고 합니다. 너무 참혹하고 잔인해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에 사형을 처할 수 없다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그런 십자가를 바라보거나 생각만 하여도 얼마나 끔찍하고 두렵고 불쾌하였을까 우리가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에는 2천년 전에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했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 끔찍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2000년 교회 역사 기간 내내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고, 중심이었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인간이 이해하기 어려운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위대한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위대한 고백을 하여 예수님에게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왜 금방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까 마 16:21-23,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신 왕 중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그의 사역을 성취한다는 것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모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사실부터 그분이 지상생애를 통하여 이루신 일은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 높아지려고 하고, 부자가 되고 싶어하고, 육신이 편안한 것을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지배하거나 좌지우지하는 것을 싫어할 뿐만 아니라 간섭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남이 나를 받들고 섬기면 좋아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오신 것은 섬기는 자로, 그리고 죽으시기 오셨습니다. 마 20:25-28,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우주를 창조하신 그 분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죽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는 일부터가 우리에게는 이해가 어렵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지 못한 일,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일은 잘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가 되지도 않습니다. 제가 중국에 처음 갔을 때, 연길 노블 구강병원에 박의식 선교사라는 미국에서 온 치과의사가 계셨습니다. 저와 아주 가까워서 형제처럼 지냈는 데, 하루는 북한의 청진을 다녀오시더니 저에게, "내가 북한에 가보니 개들이 풀을 먹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무슨 개가 풀을 먹어요" 하고 물으니 "내 눈으로 보았다"고 대답하시길래 "믿을 수가 없다"고 대답하니까 이분이 "내가 보았다는 데 왜 안 믿느냐"고 화를 내셨습니다. 저는 어른이 화를 내는 것도 재미있고, 또 실제로 믿어지지가 않아서 "나는 못 믿겠습니다"하고 그분을 약을 올렸는 데, 얼마 후에 북한에서 나온 사람하고 식사를 할 기회가 있어서 함께 여러 가지 대화를 하다가 그 생각이 나서 물어보았습니다. "XX 동무, 조국에서는 개가 풀을 먹는다던 데, 그것이 사실이우" 그랬더니 그분이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럼 개가 풀을 안 먹으면 무얼 먹습네까" 하고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 개는 사람이 먹다가 남긴 밥이나, 갈비뼈다귀 같은 것을 먹고 살지 않습니까"하고 말하니, "아니, 사람 먹을 밥이 없는 데 개 먹을 밥이 오데 있습네까" 하고 말하더라고요. 이북에서는 개가 풀을 먹는 것이 당연한 데, 우리에게는 믿어지지가 않는 일입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북한 사람과 그분의 조선족 누님이 사는 댁에서 저녁을 먹던 중에, 함께 있던 매형되시는 분이 제게 물었습니다. "남조선 사람들은 집집마다 자가용이 있다던데, 박사님도 서울에 있는 댁에 자동차가 있나요", "그럼요", "그 자동차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립니까", "그건 길에 차가 얼마나 많으냐에 달려있지요. 평일 새벽 시간에 길에 차가 많지 않으면 4시간 정도 걸리고, 추석이나 명절에 자동차가 길에 좍 깔리면 12시간도 걸리고 그렇습니다." "4시간에 부산까지 가려면 꽤 빨리 달리시는 모양입니다." "네 저는 차를 좀 빨리 몰아서 교통순경만 안 보이면 140-150Km도 달리지요." 그랬더니 함께 밥을 먹던 북한 사람이 갑자기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그 집 아들에 저에게 하는 말이 "조선에서 온 우리 삼촌 말씀에 박사님이 순 사기꾼이래요." 그래서 제가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전날 밤 제가 그 말을 한 직후에 그 집 삼촌이 아들들이 모여있는 방에 갔답니다. 그리고서는 하는 말이 "야, 저 남조선에서 왔다는 녀석이 순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구나" 하더랍니다. 그 집 아들과 딸이 놀래서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으니, "아, 세상에 무슨 자동차가 한 시간에 백 키로를 넘게 달린다는 말이냐 그런데 저놈은 150 Km를 달린다고 하니 저런 사기꾼이 어데 있나" 하더랍니다. 그 집 아이들이 남조선에는 자동차도 좋고 길도 좋아서 그렇게 달릴 수 있다고 설명해도 절대로 믿지 않더랍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의 경험과 사고의 한계를 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인간은 조건 없이 희생하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착한 사람이 착한 뜻을 가지고 행동해도 항상 그것을 왜곡하고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사람들이 제가 병원을 세울 때, 절대로 자기들을 위해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슨 흉심을 품고 일하고 있다고 의심했다고 합니다. 즉 한국에서 살 수 없어서 도망온 범죄자이든지, 아니면 안기부의 특무이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하지 남조선 괴뢰가 중국 인민을 위하여 봉사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하물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죽으셨다는 사실이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에게 믿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하시려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목숨으로 구원하셨다는 사실이 죄로 가득한 인간들에게 어떻게 믿어지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죽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이 죄와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서 피 흘리사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믿게 된 것만 해도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바울은 이렇게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 십자가만이 자신과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엄청난 죄인임을 깨달았습니다.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고 죽어야만 하는 자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된 것을 절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음을 알았습니다. 바울 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를 용서하고 구원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나의 주홍 같던 죄가 흰눈 같이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가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났던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중요한 구원의 본질이 됨을 깨달았고 그것만을 자랑한다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이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를 참아 보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벌하시지 않고는 용서하실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공의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한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기뻐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를 믿는 우리를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이 세상 풍속을 좇고 허물과 죄 가운데에서 행하며 우리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불신자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따라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이렇게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악을 차마 보실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죄인은 꼭 형벌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입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므로 당신이 세우신 법을 지키셔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든 사람들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모든 인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음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기를 원하셨습니다. 죄인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 공법을 지키시며 사랑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그 죄 값을 누군가가 대신 치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대신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받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 53:4-5,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렇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은 이제 우리에게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단번에 이루어졌지만,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은 이제 각자 자기에게 배당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 가야합니다. 구원은 거저 얻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대가가 필요합니다. 주님이 요구하신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관한 설교는 초대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예수 믿으면 편안히, 복 받으며 살기를 원하지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기를 원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십자가에 관한 설교를 하면 언제나 핍박이 따랐고 그 십자가의 설교는 언제나 사람들이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1세기 때에도 사람들은 이 십자가의 복음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22-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제까지 자기가 옳다고 믿어왔던 것, 자기가 바라고 추구하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라는 가르침보다는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갈6:12).

십자가의 교훈은 오늘날에도 인기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한 핍박을 받기 원치 않습니다. 예수를 믿고 선한 사람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편히 살고 사람들이게 칭찬을 듣다가 천국에 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복음의 진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하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며 종교적 천재라고 말합니다. 어떤 철학자보다 훌륭하고 어떤 사상가나 정치가보다도 위대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장 위대한 윤리적 교훈으로 우리가 그 가르침만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어떠한 교훈보다 더 위대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전파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파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기독교의 가르침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고생하지 않고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가 가르치는 것입니까 이 땅에서 착하게 살며 남에게 해로운 짓을 안 해서 칭찬 듣고 사는 방법입니까 아니면 주님이 가르치신 교훈, 즉 산상수훈같은 주옥같은 교훈입니까 산상수훈은 정말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완벽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철학자도 따를 수 없는 뛰어난 가르침입니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산상수훈만은 깊이 감탄하는 가르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님의 생애도, 그의 가르치심도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영원을 사모하는 종교적인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정도도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죽을 목숨이었는 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지 않는, 천국의 생명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죽어야할 죽음을 대신 지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너무도 신기하고 너무도 놀라운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말씀입니까 나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죽는다고 해도 놀라운 희생인 데, 원수요 죄인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을 버리신다는 말입니까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 그가 만드신 피조물을 위해서 대신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지혜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셨고, 그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하고 선언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요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롬 6:3).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 세상에 대하여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릅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는 세상과 죄에 대하여 죽은 몸이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산 자들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음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세상의 어떤 부귀 영화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구원의 복음이 가장 귀하고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그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다른 무엇도 십자가보다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전에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사랑하고 자랑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마굿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뉘였던, 비천한 신분의 한 인간, 일생을 머리 둘 방 한 칸도 얻지 못하고 유리 방황하다가 억울한 죄목으로 붙잡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형 방법이라는 십자가 처형에 의하여 죽은 한 사람을 알고 섬기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 육신의 안락함과 쾌락을 포기할 마음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이 이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모릅니다. 어떤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는 다 지독한 죄인, 도저히 용서받을 길이 없는 흉악무도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상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우리가 그 사실을 믿는 순간부터 전적으로, 완전히 의롭다 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 결과 영생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며, 세상을 대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찬양하며, 우리의 육신과 모든 지체를, 소유를, 나의 지식과 감정과 의지와 소유와 생명을 십자가를 자랑하는 일에만 사용하시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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