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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생 라합의 믿음 (히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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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기업 하시는 분들이나 리더십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많이 읽혀온 책 가운데 스탠포드 대학의 짐 콜린스가 쓴 "성공하는 기업들의 8가지 습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독특한 기여중의 하나는 성공하는 기업의 배후에는 반드시 뛰어난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신화일 뿐이라고 지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그의 연구를 통해서 세계의 유수한 비전 기업들 가운데는 놀랍게도 전혀 뛰어난 지도자가 아니면서도 이런 기업들을 이끌어간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가설이 신앙의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진실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소중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반드시 뛰어난 지도자의 소양을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강해를 시작하면서 저는 이 장이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의 일종의 명예의 전당이라는 말씀을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오늘 분문에는 이 명예의 전당을 둘러보며 우리를 제일 놀라게 하는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라합입니다. 그녀는 결코 뛰어난 믿음의 지도자 대열에 참여할만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우선 여인이었습니다. 전혀 여성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했던 시대를 살았던 소외된 계층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선민의 입장에서 보면 선택받지 못한 이방인 가나안 사람이었습니다. 거기다가 오늘 본문은 그녀가 기생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기생이라는 우리말 번역은 일종의 미화된 번역이고 실상은 매춘부 곧 창녀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이 이 믿음의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본문의 저자인 히브리서 기자는 그녀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그녀의 믿음-어떤 믿음이었을까요

1. 고백이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적어도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앙고백입니다. 그가 어떤 믿음의 고백을 하느냐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우리는 믿음의 진지성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일단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다음부터 우리의 일생은 믿음을 고백하는 일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가장 단순한 신앙고백은 입으로 하나님을 혹은 예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신앙고백을 구원의 조건이라는 차원에서 말하지 않습니까 로마서 10:10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말했습니다. 마음이 신앙이 머무는 곳이라면, 입술은 신앙이 고백되는 곳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순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 없는데 입술로만 고백하고 있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마음에 있는데 입술로 고백될 수 없다면 그것은 비겁한 침묵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형성하는 여호수아 2:11에 보면 기생 라합이 바로 이런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그녀는 어느 날 만유를 지으시고 섭리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그가 어떤 분이시며 그가 어떤 일을 하고 계시는가를 듣게 되었고 이 소식을 듣자마자 온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10:17의 말씀처럼 그녀의 믿음은 들음에서 난 것이며, 그녀의 확신은 마침내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고 있다고 고백하는 차원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 2:9의 말씀을 읽어보십시오.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안다'라는 것은 확신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의 고백입니다. 한국교회에서는 확신의 표현으로 '믿습니다'라는 표현이 널리 통용되고 있습니다만 '안다는 것'은 더 강렬한 확신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연애하는 남자가 "나는 저 여인이 내 아내가 될 줄 믿습니다."와 "나는 저 여인이 나의 아내인줄 알아요."라는 표현 중에 어느 것이 더 확신의 감정을 전달합니까

바울은 디모데후서 1:12에서 내가 내 인생과 내 영혼, 내 구원을 의탁한 그분을 '내가 안다'라고 고백합니다. 라합도 마침내 내가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안다'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의 믿음은 고백이 있는 믿음일 수 있었습니다.

2.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라합을 쓰신 이유-그녀에게 고백이 있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은 고백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믿음은 믿음에 근거한 구체적인 행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메신저로 온 정탐군을 영접하고 보호하여 다시 평안히 돌려보내는 행위였습니다. 사실 이런 행위는 라합편에서는 목숨을 거는 행위였습니다. 그녀가 이스라엘 간첩을 숨겨둔 행위가 발각되면 그녀는 민족 반역자로 정죄되어 목숨을 잃어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녀는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후일 야고보는 이런 라합의 행위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맺어야 할 전형적인 열매라고 소개합니다. 야고보서 2:25-26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와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야고보서를 공부해 보면 믿음의 사람의 대표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소개합니다. 그런데 행함의 대표로는 이 라합이 소개됩니다.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그녀는 이제 당당하게 아브라함과 나란히 언급되는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물론 라합의 이런 행위는 믿음과 모순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런 행함에는 용기 있는 결단이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라합이 이 정탐군을 보호한다고 해서 당시로는 당장에 얻어질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목숨만 잃어버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희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독한 결단이었습니다. 아무도 동조해 주지 않는 어리석은 결단이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결단했고, 믿음으로 행동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행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초대교부 크리소스톰의 고백을 연상하게 합니다. "온 세상이 나를 반대한다면 좋다. 내가 온 세상을 반대하리라."고. 그렇습니다. 때로 그리스도인의 행함은 이 세속적인 모든 가치관을 거스리는 고독한 결단을 요구하는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기생 라합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행동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믿음이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라합의 믿음은 곧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3. 상급이 있는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6에서 이미 히브리서 기자는 진지한 믿음은 상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할 것이라고 약속한 바가 있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자, 그러면 기생 라합의 믿음은 어떻게 보상될 수 있었습니까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쳐들어오는 그날 자기와 자기의 가족들이 약속 받은 그대로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호수아 6:22-23을 보면 "여호수아가 그 땅을 정탐한 두 사람에게 이르되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라 하매 정탐한 소년들이 들어가서 라합과 그 부모와 그 형제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고 또 그 친족도 다 이끌어 내어 그들을 이스라엘 진 밖에 두고"라고 기록합니다. 오늘의 히브리서 본문의 증언처럼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는"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기생 라합의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상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태가 구세주의 족보를 기록할 때 마태복음 1:5에 보면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라고 기록합니다. 그녀는 마침내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 구세주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히브리서11장에는 당당한 믿음의 열조가 되어 믿음의 선배들의 명예의 전당에 기록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그의 부끄러운 과거를 뒤로하고 자랑스런 미래의 축복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는 표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늘 히브리서 본분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라합을 소개하며 '기생 라합'이라고 표기한 이유는 과거에 기생 혹은 창기였던 그녀가 변화되어 이렇게 쓰임 받은 것을 암시하려는 의도였다고 믿습니다. 이런 표기법은 성경에서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예컨대 '세리 마태' 혹은 '셀롯인 시몬'이라는 표기가 생각나시지요 손가락질 받던 세리였던 그가 혹은 그 과격한 운동권이었던 열심당원 그가 변화되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을 증거 하고자 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리고성의 정복이후 라합의 변화된 인생은 이 도성에서 얼마나 화제이었겠으며 얼마나 이웃들에게 도전이었겠습니까 한때는 창기로 매춘부로 여리고 어두운 골목에서 지나가던 뭇 남성들을 유혹하며 방황하던 이 여인이 이제는 당당한 하나님의 딸이 되어 믿음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바로 이런 변화된 사람들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최근 뉴스보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성매매로 오가는 돈이 연간 24조원에 이르고 매춘을 직업으로 하는 여성만 최소 33만 명 유사 매춘업 종사자를 합하면 최대 150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발표되었습니다. 이런 유형의 매매춘 사업이 가능한 것은 수요 공급이 맞아떨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며 그것은 성을 살려는 남성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민족이 여러 가지로 정치적인 그리고 경제적인 위기들을 직면하고 있지만 우리가 먼저 심각하게 해결해야 할 것이 바로 도덕적인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우리 사회가 과거 소돔 고모라나 붕괴 직전의 로마제국의 현실보다 결코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이 정치적인 이유라기보다도 도덕적인 이유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인 진실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저는 우리 사회의 도덕적인 부패에 대한 청산과 회개 없이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회복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변화된 라합, 회개한 라합들이 일어나 자신을 새롭게 하신 하나님을 증거하기 시작한다면 아직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회개는 개인이 살고 가정이 살고 민족이 사는 길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향해 돌을 들고 있는 군중들(아마 돌을 들고 있었던 것은 대부분 남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허리를 굽혀 모래에 글씨를 쓰고 계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하나씩 둘씩 그 현장을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그는 땅에 무엇을 쓰고 있었습니까 크리스챤 유머이기는 합니다만 이런 해석이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이 여인과 관계한 남자들의 명단을 쓰고 계셨을 것이라고--. 결국 이 여인 홀로 예수님 앞에 남았을 때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용서받은 자라면 이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마십시다. 변화된 라합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상급 받는 인생을 사십시다.

<설교 적용 질문>

1. 여호수아 2:1-14의 말씀을 읽고 특히 8-11절에 의하면 라합이 정탐자들을 영접한 동기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2. 야고보서 2:25-26의 말씀을 읽고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나누어 보십시오.

3. 여호수아 6:22-25의 말씀에 의하면 라합의 믿음과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말해보십시오.

4. 기생 라합의 변화를 통해서 보는 오늘 우리 사회의 성매매 현상에 대한 우리의 기도제목과 결심해야 할 생각들을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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