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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 (갈 06: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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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알고 보면, 십자가는 이제까지 고안됐던 것들 중 가장 잔인한 형태의 사형 도구였습니다. 십자가보다 더 고통스러운 형벌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그보다 더 극악무도한 고문은 역사 이래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그보다 더 부끄러운 죽음도 없었습니다. 그토록 처절하고 끔찍한 것이 십자가 상의 죽음이었기에, 로마인들은 로마시민은 어느 누구도 그 같은 사형 집행을 받지 않도록 법으로 제정하여 놓기까지 하였었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십자가를 경멸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저주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신21:23참조).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류역사를 통하여 누구에게나 혐오의 대상이 되어 왔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그 처절한 죽음의 형틀은 그리스도인들의 큰 자랑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대하여 그렇게 열광할 수 있게 되어진 것일까 기독교의 상징이 하필이면 왜 그와 같이 끔찍한 십자가가 되어야만 했을가" "2000여년 전에 살았던 한 사람의 죽음이 오늘 이 새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떤 효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스도인들은 왜 목에 십자가를 매달고 다니는가 교회의 벽이나 종탑위에 달린 십자가는 무엇을 의미 하는가" 세상은 끊임없이 그러한 물음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의 우리들도 이에 대하여 정확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연명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한 정답을 찾기 전에 갈라디아서 6장 14절 이하에서,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그의 신앙고백 부터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사료됩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십자가를 향하여 경제적으로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는 바울의 심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만이 자기자신의 가장 큰 자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그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생애에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을까요 어떻게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그토록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첫째:바울의 자랑거리인 십자가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자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물론, 십자가는 신비적인 것도 아니며 단순히 상징적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술적인 묘사도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의 십자가는 역사적이요, 실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생애를 되돌려 놓은 "대 분수령"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자랑할 것이 많았던 사람입니다.1) 당대의 자랑거리 중 하나는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 유대인으로서의 특수층은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바리새인 이었습니다.
3) 엘리트 유대인의 최고 영광스러움은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공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사시를 받았던 그 시대의 엘리트였습니다. 4) 바울은 자국어인 히브리어는 물론이고 헬라어에도 능통했던 어학의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를 만난 이후부터는 그 어떤 것도 자랑하지 않기로 하고, 그 모든 것들을 분토와 같이 버리고 세상적인 모든 자랑거리를 단호히 거절하였었습니다. 그는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그의 서신에서 강한 부정적인 용어를 세 번씩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혹은 "하나님께서 금하셨다!"고 확언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서 "자랑"한다는 것은 그것을 찬양하고 높이거나 혹은 경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심자가 이외에 것은 결코 높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바울의 운명을 바꾸워 놓은 십자가
우리는 바울을 이와같이 바꾸워 놓은 십자가를 찾아가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바울의 운명을 바꾸워 놓은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리셨던 그 십자가였습니다. 예수께서 그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었더라면, 바울이 그의 하나밖에 없는 자기의 목숨을 십자가에 걸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일어난 역사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다 이루었다." 곧 구속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거룩하시며, 우리는 죄에 빠진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 스스로는 결코 구원을 획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우리들의 죄의 문제를 책임지시고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것은 곧 그분에게는 죄와 불의함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분은 완전하시며, 그 분께서 거하시고 계시는 하늘나라 또한 그분이 완전하심같이 완전한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 같이 우리 또한 거룩하지 않은 한, 우리는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히 12:14 참조). 어떤 사람들은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사랑하고 용납하며, 이해하는 하나님, 그들 자신의기준을 가지고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원합니다. 그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충분 조건으로 요구되는 하나님의 기준, 다시 말하자면, "내가 거룩한 것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거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지 거룩케 된 자, 곧 구원받은 자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기준을 따르든지 아니면 자신의 기준을 따르든지 한 가지의 선택권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임의대로 상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특성에 따라서, 만민을 공의로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습니다.(히 9:22 참조).
우리가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히십니다.(고후 5:21 참조). 그러나, 죄가 처리되느 이 모든 과정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죄의 용서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십자가와 또한 구원을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맡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못박히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받으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14절)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바울의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고 세상은 그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14절). 바울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리스도가 자신의 것이요, 성령께서 그의 심령 속에 내주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1) 우리가 우리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두는 그날, 우리의 위치가 달라지는 일이 발생합니다. 2) 그날, 우리는 전적으로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되며 세상의 헛된 일에 무관심하게 됩니다. 3) 그날, 우리는 그 모든 사악한 체계에 대하여 죽고, 그 대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게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빌 3:20). 우리의 아버니가 거기 계시며, 우리의 구세주 또한 거기 계십니다. 우리의 본향도 거기 있으며, 우리의 상급 또한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촉수를 높여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느끼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람이 될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셋째: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6:17절에서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의 흔적들"은 어떤 것들인가요" 바울이 이제 껏 그리스도인으로서 받았던, 모든 타격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겨냥되었던 사탄의 화살들이었습니다. 세상은 예수를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이 세상에 육체로 계시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대신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종인 바울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이었기에 그는 고난받는 기쁨을 즐겼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는 것은 자연인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곧 예수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때문에, 진리를 위하여 받는 핍박이 있다면, 그것은 실상 예수 그리스도께 겨냥된 핍박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대신해서 받은 것일 뿐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인하여 받았던 핍박의 상처를, 흔적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감사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
예수그리스도를 인하여 아파해야만 했던 흔적들이 있습니까
아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묵묵히 참아내고 있는 아픔이 있습니까
그것은 사랑의 흔적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있는 자랑스러운 사랑의 흔적들입니다. 그 흔적들이 여러분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금번, 사순절에 다시한번 더 십자가를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랑스러운 십자가로 십자가를 바라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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