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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으로의 초청 (마 11:25-30)

첨부 1


1. 구원이란
(1) 가난한 자가 복음을
(2) 포로 된 자가 자유를
(3) 눈먼 자가 다시 보게 됨을
(4) 눌린 자가 자유롭게 됨을(눅4:18)
(5) 죄로부터의 자유(롬8:2)
(6) 하나님과의 만남(요14:6)
(7) 사단에게서 해방(요일3:8)

2. 수고하고 무거운 짐
(1)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행복하지 못함
(2) 거절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소외감
(3) 함께 나눌 공동체가 없어 자라나는 의심
(4) 형식적인 만남 속에서 느끼는 보이지 않는 경쟁심
(5)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무거운 짐

3. 구원의 조건
(1) 어린아이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25)
(2) 아버지의 뜻(26)
(3) 아버지께서 주심(27)
(4) 아버지를 아는 자(27)
(5) 내게로 오라(28)

4. 구원의 결과
(1) 멍에(모세의 율법)를 벗음
(2) 마음이 쉼
(3) 온유와 겸손
(4) 쉽고 가벼움
(5) 하나님의 나라1) 쉼이 있는 곳
2) 하나님의 아버지 됨, 하나님의 자녀 됨, 형제 됨이 있는 가족 공동체

2부 / 메시아의 위엄 (슥9:9-12)

(1)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나의 요새시라
주는 나를 건지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2) 나의 생명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는 나의 사랑이시며 나의 의지시라
주는 나를 이끄시어 주의 길 인도하시며
나의 생의 목자되시니 내가 따를 이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생명의 면류관으로 내게 씌우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그는 나의 여호와 나의 구세주
(3) 작년에 미국에 갔을 때 LA 어느 한인교회 새벽기도회에 갔다가 이 찬양을 처음 불러봤습니다. 그들이 뜨겁게 이 찬양을 부르는 모습이 한인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질게 살아왔던 상처, 자녀들과의 세대차이에서 느끼는 갈등들이 표출되는 것 같아 내 가슴을 울렸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고난주간을 앞에 놓고 불러서 그런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가사가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던 주님의 절규를 생각나게 해 흐르는 눈물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1. 메시아 선포식
(1) 우리 교회에도 싱글 사역팀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데요. 혼자 사시는 분들은 다른 것보다 자녀 교육하는데 있어서 어머니만 있는 가정은 아버지 역할을 할 수가 없어서 고민이고, 아버지 혼자만 있는 가정은 어머니 역할을 할 사람이 없어서 문제인데 싱글 사역팀이 있으면 서로 보완이 될 수 있기에 필요해요. 그런데 지난주간에 대심방을 하면서 같이 심방하시던 분들 중에 혼자 사시는 분들이 싱글 사역팀을 못 만드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요. 싱글이 너무 기쁘게 보이면 부부가 싱글이 되고 싶어하면 안되기 때문에 표정관리를 잘해야 된다는 거예요. 농담이긴 하지만 서로에게 세밀한 배려를 하는 그 모습이 아주 좋아보였어요. 바로 이런 곳이 하나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2)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마21:1-11)은 메시아 시대가 열리는 신호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메시아임을 한 번도 가르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이나 보여주신 기적, 그의 위엄만 보고 성경을 통하여 깨달은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라고 고백했어요. 구약에 예언되었던 그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십니다 라는 것이죠. 이런 고백이 있은 후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서둘러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것입니다. 메시아 시대가 열렸음을 선포하시기 위해 빠른 걸음을 재촉하셨습니다.
(3) 나귀를 타심은 일시적 발상이나 감동에 의한 것이 아니고 구약(본문)에 예언된 대로 나귀를 타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나귀와 나귀 새끼' 라고 합니다.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겉옷을 그 위에 얹으니까 예수께서 그 위에 타셨다는 것입니다(마21:7). 그 광경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두 마리라는 이야기 아닙니까 주님께서 두 마리 사이에서 서커스를 하듯이 그렇게 하셨을까요 신학자들은 오늘의 본문 스가랴가 예언했던 대로 ’나귀 곧 나귀새끼‘인데 번역 잘못은 아니고 마태가 잘못 기록를 했다고 추정합니다.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주님을 향해 사람들은 시편 118편을 인용하여 찬양을 했습니다.

2. 아버지 하나님
(1) 하나님 나라의 왕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지배적인 왕적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 분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분의 아들이요 딸입니다. 모두가 왕자요 공주입니다.
(2)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몰랐기 때문에 모두 지배하는 분으로만 알았습니다. 이제 주님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고 아버지 되시는 분임을 알리기 위해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3)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곳이 몇 곳 되지 않습니다. 이사야가 한 번 이야기했고(사64:8), 예레미야가 두 번(렘3:4,19), 말라기에 한 번(말2:10)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수도 없이 강조하셨죠.
(4)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렇게 부르신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아버지 같은 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모습 속에서 못난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버리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5)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주님의 모습 속에서 과연 메시아는 어떤 분이고 어떤 행동을 하실 분인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해보려 하지만 해결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오셔야만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메시아라는 말 속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그 메시아의 오신 모습은 주님의 제자들이나 이스라엘이 기대하고 생각했던 것처럼 위엄있는 정치적인 통치자, 로마의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자가 아니라 나귀를 타고 들어가시는 겸손한 모습이었습니다.

3. 복종하는 메시아
(1) 세상의 방법으로 이루지 못한 평화의 나라, 모든 전차와 무기가 없어지고 온 세계가 평화롭게 될 하나님 나라(10)는 하나님만이 이루실 수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평화를 이루기 위해 또 다른 무력이나 힘으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낮아지심으로 이 일을 이루실 것을 주님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2)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3) 복종이란 말은 들으면 거부감이 이는 단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종이란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무거운 짐을 버릴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는 작은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 날 여러 달을 속태우며 보냅니다. 그런 작은 일이 마치 생명이 걸려있는 것처럼 격분하기도 합니다. 그런 문제 때문에 궤양에 걸리기도 하죠.
(4) 우리 삶의 대부분의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주님과 같은 복종을 배운다면 어떤 문제든지 거기에서 떠날 수 있는 자유와 잊어버릴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우리 지구촌교회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고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복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또한 여러분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5)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
(6)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를 잃어버린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양보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7) 삼위일체 하나님께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복종하십시오. 여러분의 가족에게 복종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웃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복종하기 바랍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복종해서 진정으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세계에 대하여 책임을 가지고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주간 총선을 치렀습니다. 어려운 임무를 가진 사람들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리에 맞는 새 능력이 채워지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4. 섬기는 메시아
(1)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오 도리어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대속물로 주려 하심이니라”(말10:4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4-15)
(2) 닭장 속에 있는 병아리들 사이에는 누가 제일 크고 누가 제일 작으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기 전에는, 그리고 그 중간의 모든 서열이 명백하게 결정되기 전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3) 사람이 사는 이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까 앉는 좌석의 배치만 봐도, 둘 이상이 함께 걸어가거나 함께 이야기하는 속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21세기에 우리가 새롭게 깨닫는 지도력이나 영향력은 섬김을 받는 것이나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거기에 영적인 권위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4) 그런데 섬긴다고 할 때 점검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늘 말하지만 구제품 들고 양로원 가서 사진 찍고 회보에 내고 이런 일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자기 동기가 있는 섬김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섬김이 아닙니다. 어떻게 섬길 지 계산하지 맙시다. 자연스럽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거창한 섬김만 하려고 하지 맙시다. 예컨대 강대상을 헌납한다든가 하면 줄을 서는데 여러 명이 거둬서 뭘 하나 마련하자고 하면 관심이 없습니다. 섬김에 대한 대가를 바라지 맙시다. 섬긴 것에 대한 결과도 기대하지 맙시다. 지난주간 어느 가정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인데 어느 목사님이 어려우셔서 쌀을 갖다 드렸는데 목사님은 그 쌀을 더 어려운 장로님에게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쌀을 갖다 드린 그 분이 그 일로 교회를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아마 실제로 있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갖다 드린 것은 좋은데 내가 드렸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5) 진정한 섬김은 기분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라면 결코 공동체에 금이 가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6) 주님은 그냥 섬기신 정도가 아니라 “종의 형체를 가져”(빌2:7)라고 했다. 섬기는 것은 누구를 섬길 것인지 언제 섬길 것인지 자기가 결정합니다. 그러나 종은 그렇지 않습니다. 종에게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주인이 원하면 하는 것입니다.
(7)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 섬김에 참여하라고 권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잘 할 수 있는 섬김이 있습니다.1) 듣는 섬김입니다. 먼저는 하나님 말씀을 잘 들어야 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의 말도 잘 들어야 합니다.
2) 짐을 가볍게 하는 섬김이다. ‘너희가 서로 짐을 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온 세상의 짐을 다 자신이 지려고 덤벼들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주님에게 맡김으로 서로의 짐을 가볍게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짐을 다 지려고 하면 사람은 한계가 오게 되어있기에 도움을 받은 사람이나 도움을 준 사람이나 모두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3) 말씀을 전하고 서로 나누는 섬김입니다. 최고의 섬김이죠. 이런 것이 잘 되어질 때 여기가 곧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고 그 영향력이 온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8)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소망을 품은 갇혔던 자들아” 라고 합니다. 요즘 말로 풀면 ‘사로잡혔지만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아’ 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여러 가지 조건에 사로잡혀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희망이 희망 없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전염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소망합니다. 이 번 한 주간 이 말씀을 새기면서 다음 주일 주님 부활의 승리에 동참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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