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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메시야의 십자가 죽음 (빌 0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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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주제는 모든 분야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문학이나 다른 예술분야에도 죽음에 대한 주제는 대단히 강렬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께 한 학생이 와서 이런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 사람은 반드시 죽는데 그 죽음의 준비를 언제 하는 것이 가장 합당합니까 그 교수가 빙그레 웃으면서 "자네가 왜 그런 관심을 갖는가"라고 하였습니다. 네, 제가 '불멸의 영혼'이라는 책을 읽고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준비를 해야만 가장 합당합니까 "그 준비는 간단 하네.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는데 자네는 언제 죽을지 알고 내게 그런 말을 하는가" 언제 죽을지는 전혀 모릅니다. "그러면 답이 더 분명하네" 그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바로 준비를 해야 되네" 사람은 죽음의 사건 앞에서 정직해지고 진지해 집니다.

죽어도 산다

어떤 철학자가 이렇게 묘사를 했습니다. '죽음의 순간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은 최고의 화음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주목을 하게 되고 듣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죽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보다 더 아름다운 화음이 없다, 비록 신음하는 소리일 수도 있고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런지 몰라도 죽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 듣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 무엇인가 임종의 말을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의 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인 성삼문이 죽기 전에 남긴 말이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황천에는 여관도 없다는데 오늘밤엔 뉘 집에서 머물꼬'라는 말을 하면서 죽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임종 때 '나 천하 영웅 나폴레옹도 몇 시간 후엔 구더기 밥이 되겠구나'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성삼문의 임종의 말이나 나폴레옹의 임종의 말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도 들을 말이 없습니다. 우리 귀에 담을 만한 어떤 깊이도 없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개인의 넋두리로 그런 말을 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임종의 시간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 집사의 임종시에도 예수님의 임종의 말씀을 그대로 되풀이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죽음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이야기는 많이 있었지만 진리는 별로 없었습니다.
성경에는 이 죽음에 대하여 명백한 성격을 가지고 우리 앞에 다가옵니다. 이 죽음과 관계된 주제를 가지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몇 가지로 정리를 해보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라고 성경이 규정을 합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규칙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길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요, 되풀이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또 죽음은 죄 값이라 선언을 합니다. 왜 죽느냐 죄 값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죽음을 피할 어떤 인생도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생명과 죽음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십니다. 신명기 32장39절에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낳게도 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생사의 주권이 여호와 하나님께 있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복음인데 예수님은 이 죽음을 많이 말씀하시고 결론에 가서 한 마디 말씀으로 그 죽음을 초월하는 진리를 우리 앞에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로서 죽음

성경은 죽음에 대해서 많은 간증적인 선언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죽음은 인간의 죄 값이다,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의 주권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 죽음은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길이라고 엄격히 말하고 있으면서도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슨 권세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그가 무슨 권세로 감히 우리에게 죽어도 산다는 약속을 하시는가 예수님은 분명히 이 말씀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죽음을 이겼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그 분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 대하여 우리 앞에 생명으로 나타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메시야로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으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었기 때문에 그 죽음의 효력이 나타났다는 것은 아닙니다. 메시야로서 죽었기 때문에 예수의 죽음은 거룩한 죽음인 것입니다. 메시야로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방법이 십자가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메시야에게 다른 죽음도 허용할 수 있지만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야가 십자가 위에서 죽었다 라는 사건적 표현이지 십자가를 만들어 놓고 거기 메달려야만 죽음이 어떤 뜻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든지 어떤 형태로 죽든지 죽음은 똑같은 결과를 가지고 오지만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죽음의 형태가 십자가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죽음의 상징으로 십자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일곱 가지 의미

그러면 메시야의 죽음은 성경에서 일곱 가지로 성격을 규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시는 일곱 가지 죽음의 의미는 아무도 흉내낼 수가 없습니다. 어떤 위인도 어떤 성자도 이 땅위의 어떤 종교 창시자도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는 이 메시야 죽음의 성격을 아무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메시야 그 분만이 가지고 계시는 일곱 가지 죽음의 특성입니다.
첫번째가 예정된 죽음입니다. 메시야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는 죽음입니다. 아무도 예정되어 있는 죽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복음 22장22절에 "인자는 이미 작정된 대로 가거니와"라고 했습니다. 나는 이미 작정된 대로 하나님의 설계 안에서 그 설계대로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23절에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미리 아신 예정된 죽음입니다. 메시야의 죽음은 우연히 발생한 사고사가 아닙니다. 메시야의 죽음은 돌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이 예정해 놓으신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예언된 죽음입니다. 그 예정된 죽음이 하나님만 아시는 죽음이었지만 하나님이 정해놓은 예정된 죽음을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죽음으로 인간에게 들려 주셨습니다. 곧 예언된 죽음입니다. 예정된 죽음은 하나님만 아시는 죽음으로 하나님만이 정하신 것인데 이것을 인간들에게 알려주시기를 원하여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언하도록 했습니다. 창세기 3장15절에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메시야의 죽음은 예언되어 왔습니다. 한번도 아닙니다. 수 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예언되어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앞으로 메시야가 날 것이고 앞으로 메시야가 우리의 속죄를 위해서 죽으실 것이라는 것을 미리 믿어도 구원이 허용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기 전에 죽을 메시야를 바라보고도 구원을 받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이미 못 박히신 예수님을 되돌아보면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지신 그 기점을 통하여 역사 속에는 메시야를 바라보고도 구원을 받았고 지금 우리들은 이미 죽으신 메시야를 되돌아보면서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메시야는 십자가에 죽기 전이나 죽으신 후나 부활하신 후에나 동일하신 구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에 믿었느냐가 아닙니다.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언제 믿어도 어디서 믿어도 그 구원은 똑같은 구원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번째는 본인이 미리 알고 계시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죽으실 것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21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라고 했습니다. 자기 죽음을 알고 죽는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밖에는 없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예측하지 못합니다. 또 예측한다 할지라도 죽음의 시기를 조절할 권한이 인간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죽고 싶을 때에 죽을 길이 없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조절의 능력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고 싶을 때 죽으면 이상한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마저도 우리에게 허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알고 죽으신 메시야의 죽음은 실로 특이합니다.
네번째는 자의적인 죽음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했는데 본문에서도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순종의 죽음입니다. 억지로 끌려가서 죽은 죽음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죽음인줄 알고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자의적인 죽음입니다. 이것은 자살의 성격과 전혀 다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고 믿음으로 순종한 죽음입니다.
다섯번째로 죽음이 가장 강한 의미를 나타내는 죽음입니다. 구속의 죽음입니다. 마가복음 10장45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메시야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입니다. 죄인들의 죄를 속죄하는 죽음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죄 값으로 죽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죄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은 대속의 죽음입니다. 이 속죄의 죽음이 메시야 죽음의 핵심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하라고 허락한 죽음입니다. 이 속죄의 죽음은 우리에게 강렬한 구원의 효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임종을 하는 성도들의 경험을 집합해 보면 인간이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면 나를 위하여 죽으신 그 속죄의 예수가 가장 절실해 지는 것입니다.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믿음만이 하늘나라에 이르기 때문에 그 순간에 속죄의 죽음이 거룩한 제사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메시야의 죽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내가 나의 죄 값으로 죽을 십자가의 죽음을 그 예수가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곧 나의 죽음입니다. 모든 백성을 위한 죽음이면서도 나를 위한 죽음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20절에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의 죽음이 나를 위한 죽음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실 영의 세계에서 나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와 죽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여섯번째로 메시야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낸 죽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 죽음입니다. 로마서 5장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최고 절정이 메시야의 죽음입니다.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집합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일곱번째로 다 이룬 죽음입니다. 요한복음 19장30절에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나서 할 일을 다하고 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인간이 해야 할 도리를 다하고 죽는 죽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메시야의 죽음은 다 이루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메시야의 죽음에 나타나는 일곱 가지의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메시야의 죽음은 보통 인간의 죽음이 아닙니다. 어떤 성자의 죽음과도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메시야의 이 죽음이야말로 우리를 살리는 죽음입니다.

메시야의 낮은 자세

본문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를 잠시 포기하고 사람의 모양으로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나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죄인처럼 낮아졌습니다. 그가 인간의 죄를 홀로 지고 죄인처럼 낮아졌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졌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혔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낮아지셨느냐 천지를 창조하신 그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고 죄인처럼 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고 하나님께서 더 낮아질 수 없는 정도로까지 그분은 떨어졌습니다.
여러분,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릅니다. 그런데 이 물은 높이가 높을수록 떨어지는 힘이 셉니다. 물 1톤을 10미터 언덕에서 붓는 것과 100미터 망대 위에서 붓는 것 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높이 있을수록 떨어질 때는 힘이 셉니다. 메시야가 얼마나 높으신 분이십니까 우리가 표현할 수가 없는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이 땅에까지 떨어졌습니다. 하늘에서 여기까지 떨어졌습니다. 그 능력을 가히 상상이나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실력은 높이고 자세는 낮추자'는 말은 굉장히 의미 깊은 말이라고 봅니다. 여러분 우리는 실력을 높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실력을 낮추면 안됩니다. 수준을 낮추면 안됩니다. 우리는 수준을 높여야 합니다. 높은 데서 떨어져야 힘이 있습니다. 높은데 올라섰다가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더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헤매는데 낮아질 때가 어디 있습니까 밑바닥에 있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부귀영광을 가져야 합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된 다음에 그 기도에 더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솔로몬의 그 부가 성전을 건축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땅 위에서 실력을 자꾸 쌓아야 됩니다. 여러분 돈도 벌어야 하고 국가고시를 패스 하여 자꾸 올라 가셔야 합니다. 직장의 중요한 부서마다 성도들이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대통령은 개신교 신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영부인은 장로입니다. 역대로 비서실장이나 청와대 수석비서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아주 독실한 크리스챤들이 일을 하였습니다. 바람직한 일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올라 가셔야 합니다. 앞서야 합니다. 앞서 가지고 뒤로 낮아져야 합니다. 높이 올라 가지고 부귀영광을 얻은 후에 거기서 예수 때문에 낮아지시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는 죽음이 된 것입니다. 죄인은 아무리 죽어도 죽음을 이기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메시야가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기 때문에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메시야의 죽음 이것은 우리가 흉내낼 수 없는 죽음입니다.

맺는 말

그러나 한 가지 우리에게 사명이 있습니다. 죽어도 살겠다고 하는 메시야의 이 말씀은 예수님이 혼자하시고 끝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이제는 전해야 합니다. 고난주일은 고난을 묵상하는 주일이 아닙니다. 죽어도 산다는 이 복음을 전하는 결의를 다지는 것이 고난주간의 사명입니다. 죽어도 산다는 이 복음의 진리,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인생들, 오늘도 죽음의 공포 속에서 헤매고 있는 이 불쌍한 인간들에게 메시야의 죽음을 알리는 선교적 외침이 충만한 고난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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