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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세의 부모의 믿음 (히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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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존 합킨스 병원 소아과 연구원들이 초등학교에 막 들어온 어린이들이 제일 두려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조사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우선 30년전의 조사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0년전 의 아이들이 두려워한 것 1순위가 동물, 2위가 어두운방에 있는 것, 3위가 높은 곳, 4위가 낯선 사람, 5위가 시끄러운 소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30년후 최근의 조사에 의하면 1위가 부모의 이혼, 2위가 핵무기 전쟁, 3위가 암에 걸리는 것, 4위가 환경오염, 5위가 아동 폭행(여아의 경우, 성폭행)이었습니다. 두려움의 이유와 대상이 많이 달라진 것을 알수가 있습니다. 달라진 시대의 변화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존이 여전히 두려움의 실존이라는 것만은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역사의 한때 두려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두려움을 이기고 인생의 미숀, 혹은 역사의 미숀을 훌륭하게 성취한 한 부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유명한 모세의 부모의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6:20에 의하면 이 부모의 이름은 아므람과 요게벳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살았던 시대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로운 통치자바로의 명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의 번성을 애굽의 위협으로 해석한 나머지 남자아기가 태어나면 나일강가에 던져 죽여야 하는 공포의 시대였습니다. 만일 이 명을 불복하면 모세의 부모뿐 아니라 그의 친척조차 모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려움의 시대에서 모세의 부모는 태어나는 아들을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기어이 길러내기로 결심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세의 부모가 그렇게 할수 있었던 이유가 믿음 때문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면 이런 모세의 부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1. 두려움을 극복한 믿음입니다.

본문에 보면 모세가 났을때에 모세의 부모가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할수 있었던 까닭이 믿음 때문이었다고 기록합니다. 무슨 믿음이었겠습니까 본문에는 그냥 태어난 아기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 이 아름다운 아이 미남 아기를 살려야 하겠다는 단순하고 보호 본능적인 부모의 신념이었을까요 그런데 같은 내용의 말씀을 사도행전 7:20에서 읽어보십시오.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지라. 그 부친의 집에서 석달을 길리우더니"했습니다. 그냥 아름다운 아기가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아기라고 한 것입니다. 그 아기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섭리를 확신한 까닭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태어난 아기라면 하나님이 지키실 것을 확신한 까닭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모세의 부모로 하여금 바로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게 한 것입니다.

두려움의 반대는 용기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용기는 좌절될 수 있으나 믿음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용기의 근원은 자기 자신이지만 믿음의 근원은 하나님인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신념과 신앙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념의 사람이 아니라,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 할 줄 아는 사람은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올 때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되심을 묵상하십시오. 유명한 크리스챤 시인 애니 존슨 플랜트(Annie Johnson Flint)의 시 가운데 제목이 "그러나 하나님은"(But God)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들어보십시오. "나는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네./ 내가 모르는 미지의 날들이/그에게는 분명하고 확실함을 알기에/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복된 안식을 누린다네--모든 수수꺼끼같은 당혹할 "왜"의 물음이/회의와 공포가 되어 커져갈 때/난 이 생각으로 해답을 찾는다네/난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고.--난 할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할수 있으시다네/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짐도/그의 손길은 능히 들어올리심을 알기에/내 염려했던 일들은 오히려 유쾌한 일들일 수 있다네--비록 독수리의 날개가 피곤해지고/내가 한때 달렸던 길을 이젠 걸어야 할지라도/난 내게 주어질 능력을 알고 있다네/난 할 수 없어도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으심을 알고 있다고.--나는 볼 수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보신다고 /내게는 어둡고 감추어진 길이어도/그분에겐 여전히 밝은 길이기에/내가는 길에 넉넉한 빛을 볼 수 있다네--내 긴장되고 충혈된 눈이/안식가운데 눈감을 수 있고/평화로움 속에 잠들 수 있는 이유는/나는 보지 못하나,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때문이라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보십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린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시27:1)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생의 두려움에서 승리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최선다해 행동한 믿음입니다.

흔히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고백할 때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믿기에 아무것도 안함이 아니라, 믿기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모세의 부모가 믿음으로 이렇게 최선을 다한 행동을 했음을 증언합니다. 본문에 모세의 부모가 믿음으로 아기 모세를 석달동안 숨겨 양육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석달이 모세의 부모가 자신들의 부모가 아기를 숨겨 양육할수 있었던 최선의 기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석달이면 이제 아기가 자율행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손과 발의 움직임이 놀라울 정도로 활발하게 됩니다. 발달이 빠른 아기들은 고개를 빳빳하게 들기 시작합니다. 감정표현이 완연해져서 혼자 웃기도 하고 울음소리도 커집니다. 출애굽기2:3에 보면 "더 숨길수 없이 되매"라고 기록합니다. 더 이상 숨겨 기를수 없기까지 최선을 다해 양육했다는 말입니다.

모세의 부모의 최선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칠하여 아이를 그 상자에 담아 나일강 하수가에 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냥 아기를 강가에 버리면서 하나님이 원하신 아기라면 살리실거야 하고--믿음으로 버렸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그 상황속에서도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장에 보면 이렇게 갈상자를 준비하고 그 상자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방수제 역할을 할 역청을 칠하고 그후에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서서"(출2:4)보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대한 것입니다. 최선의 믿음은 최선의 행동을 낳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이렇게 읽어도 무방합니다.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났을 때에 최악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라고. 그렇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행동을 낳습니다. 최선의 행동을 낳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둘러싼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라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를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믿으신다면, 믿는대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행동을 다하십시오. 그러면 마침내 당신은 하나님의 기적의 드라마를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3. 보상받은 약속의 믿음입니다.

자, 이후의 일이 궁금하지 않으시나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한 모세의 부모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셨을까요 정말 이제부터 드라마가 펼쳐집니다. 이 섭리의 드라마를 주목해 보십시오. 제국의 아침보다도, 장희빈보다도 훨씬 더 흥미진진합니다. 아마도 모세의 부모들은 아기 모세를 갈상자에 넣고 하수가에 둔 다음 모세의 누이를 그 근처에 가서 지켜보게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때 바로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그 강가에 나옵니다. 우연이었을까요
고고학은 이때 고대 애굽에서는 이미 애굽의 궁중안에 훌륭한 목욕시설이 있었음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로의 공주가 나일강가에서 목욕하고픈 충동을 느껴 시녀를 거느리고 강가에 나온 것입니다. 우연이었을까요 또 하필이면 강가에 나온 공주의 눈에 갈대상자가 발견된 것입니다. 우연이었을까요 상자를 열어보니 히브리 노예의 아기였습니다. 재수없다고 갔다 버리라고 할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공주를 보자마자 울어댑니다. 한 성경주석가는 "바로 이 순간 아기의 울음소리는 공주의 가슴에 잠자던 모성애의 본능을 흔들어 깨웠다"고 말합니다. 갑자기 이 아기가 측은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아기를 데려다가 양자로 기를 생각이 납니다. 우연이었을까요

드디어 공주는 이 아기를 궁중에 데려다가 기르기로 결심합니다. 유모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선택되어 온 유모가 누구였을까요 예, 모세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아기를 가장 안전한 곳에서 양육비를 받아가며 애굽의 왕자로 기를수가 있었습니다. 우연이었을까요 유명한 C.S. Lewis교수가 기도의 응답에 대해 옥스퍼드 채플에서 설교한후 한 학생에게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정말 기도의 응답이 존재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우연의 일치를 기도의 응답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때 루이스 교수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우연일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친구여, 내가 기도하기를 그치면 그 우연도 없어지고 만다오."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우연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오직 필연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의 필연이요, 기도의 필연이요, 최선의 필연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일련의 기적들은 모세의 부모의 믿음에 대한 믿음의 주인의 보상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11:6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보상됩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한후 당장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우리의 기대대로 되지 않아도 결코 실망치 마십시오. 보상의 날이 올 것입니다.

모세의 부모는 최악의 시대에 최선의 안정을 보장받고 자신의 자녀를 기를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는 민족구국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서 모세의 부모가 하나님을 신뢰한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믿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의 유모의 역할이 끝났을 때 아기 모세는 다시 바로의 공주의 품으로 돌아가 애굽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애굽의 40년간의 교육이 어머니의 4년여의 신앙교육을 능가하지 못했습니다. 유모요 어머니였던 요게벳은 끊임없이 아기 모세에게 "그의 정체는 히브리인이며 그의 삶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창 너머 히브리인들이 노예처럼 일하는 현장을 가르치며 어머니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기 모세야, 저 사람들은 너의 동족 야훼 하나님의 백성이란다. 너는 커서 저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아기 모세는 "알았어, 엄마. 약속할게"했을 것입니다. 교육학자 앨런 블룸(Alan Bloom)은 "기억된 것은 반드시 재생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조기교육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구세군의 창설자 부드대장은 자기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부모에게 이런 절실한 당부를 남겼습니다. "부모 여러분, 빨리 손을 쓰십시오. 마귀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죄를 가르치기전에 그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치십시오. 마귀가 우리 자녀들의 가슴에 불신을 심기전에 믿음을 그들의 가슴에 심어야 한다"고.

금년 구정 가족이 함께 하는 기회가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인생의 꿈을 나누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떻게 금년 한해 우리가 변함없이 우리의 인생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최선을 다해 살 것인가를 더불어 격려할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 주님을 모르는 부모님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드리십시오. 자녀들과 형제들의 끔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의 꿈이 하나님의 꿈이 되도록 격려하십시오. 그리고 꿈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최선임을 함께 강조해 주십시오. 그리고 최선의 꿈은 최악의 상황속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함께 이야기 해 보십시오. 명화 포레스트 검프를 기억하십니까 아마도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가 있었다면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열심히 인생을 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비록 IQ가 75에 지나지 않아도 자기가 잘 달릴수 있다는 것을 발견해 내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에는 행복한 천재보다도 앞을 향해 우직하게 달려가는 행복한 바보가 더 필요하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검프는 저능아였고 다리까지 절었지만 달릴수는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바보는 지능이 조금 낮은 사람일 뿐이라고 가르칩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애인 제니는 검프가 처한 위기의 순간에 그에게 달려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런! 포레스트! 런!) 드디어 그는 달리기 시작합니다. 미식축구장에서도 전쟁터에서도 탁구장에서도 달립니다. 사랑을 위해서도 달립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수 있었습니다. 전쟁터에서 두다리 잃은 옛날 상관 중위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최선을 다하라고 하나님과 화해해야 된다고오히려 이웃에게 전도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소유하느냐가 아닙니다. 내게 주어진 가장 작은 가능성을 사장하지 않고 열심히 잘 달릴 수 있느냐 입니다. 금년 한해 최선의 달리기로 주님을 섬기고 가족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한해가 되어 보십시오.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달려가노라)"(빌3:14)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모든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이 그렇게 달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달려가야 합니다. 주저앉아 계십니까 일어나 다시 달리십시오. 주께서 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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