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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엡 01: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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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주에 우리를 교회로 세우신 주님을 생각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나면 성경에서는 그 다음에 한가지 덧붙이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 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시다. 자 이 교회는 우리 모든 성도들을 가르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다 그리스도의 몸인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시다, 이것을 잘못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 주님은 하늘에 계셔서 머리는 저 하늘에 있고 몸은 이 세상에 있는 것처럼 이렇게 생각을 하면 그게 아주 이상스런 개념이 되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너무 확대해 가지고서는 이 세상 전체가 하나님의 몸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해 나갈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 나가면 아주 이상스러운 결과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해 나갈 때 우리들은 가르쳐서 하는 이 성경 구절을 인용해서 이야기하지만 실질 상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멀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생각을 해 봐야 합니다. 우선 기본적으로 생각해야 될 것을 몇가지 생각하고 오늘의 본문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라고 했을 때 가장 기본적으로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을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첫번째는 우리의 몸 가운데서 머리가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생각해 보면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런 항의를 담아서 우리가 흔히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려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머리가 어떤 기능을 합니까
요즘에 많이 논의되는 문제 가운데 소위 뇌사에 관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머리가 죽었을 때 더 이상 정진을 안하는데 심장도 뛰고 그럴 때 이 사람이 정말 죽은 거냐, 산 거냐 하는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여튼 그런 문제가 제기된다는 그 자체가 우리한테 뭘 이야기해주느냐하면 사람의 모든 기능에 있어서 머리가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우리는 어렸을 때 어떻게 뇌에서 작용을 해서 우리의 모든 것이 움직이게 되는가를 공부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이 본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뇌가 우리의 수뇌부다” 그것으로부터 무슨 이야기나 나온다든지, 무슨 지시가 나와야 지만 우리가 움직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원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시다 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를 움직여 나아가시는 분이 누구 신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가 그의 명령, 그의 뜻을 이 땅위에서 수행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찬양대가 주님께 찬양을 하시면서 그 가사 가운데 들어보니까 “그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그런 구절이 있었죠. 주님의 뜻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바로 그것이 뜻하는 바가 주님이 우리의 머리시라고 하는 말입니다. 머리는 이러저러한 일을 해 나가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것과 정반대의 것만 생각하고 행해 나간다든지, 아니면 머리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되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한 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의 머리는 이렇게 하라고 하는데 오른손은 이쪽으로 안 가고 저쪽으로 간다든지 그러면 아주 죄송하지만 정상적으로 몸의 기능을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렇죠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머리시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하고 해 나가셨을 때 그 몸의 지체된 우리들이 그 일을 제대로 해 나가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림이기 대문에 우리의 몸에서 나타나는 것과 아주 밀접하게 나타납니다. 우리의 몸에서는 가장 정상적인 경우에 머리가 하는 것을 늘 하게끔 되어 있죠. 그러나 이 그림 “예수께서 우리의 머리시다”라는 그림은 우리한테 어떤 것을 이야기해 주는가 하면 우리가 애를 써 가지고 주님의 뜻을 이 땅위에 이루어 가고 주님이 원하시는 바를 이 땅 가운데서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는 것이라고 그렇게 했을 때 우리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땅위에 있다고 하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런 점에서 이것은 아주 독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사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뜻을 이루어 나가려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과거에 인류의 역사를 성경을 통해 배웁니다. 인류의 역사를 그대로 내어 버려두었을 때 아담과 이브가 타락한 이후에 이 역사가 제대로 되어 가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하고는 정반대 되는 방향으로 자꾸자꾸 간다는 말이죠. 그대로 내어 버려둘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 죄악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줬느냐 하면 인류를 다 쓸어버릴 정도로, 말 표현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에게 무슨 후회하는 요소가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 표현법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람들에게 비유해서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것을 의인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의인법을 사용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마치 인간인 것처럼 표현해서 하나님이 후회하셨다. 사실은 하나님이 후회하는 바가 없죠. 그러나 그 정도로 인간의 역사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냐. 이런저런 방법을 써도 안되니까 이제 이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가 원해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형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머리로써 예수님 자신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이야말로 이 땅에 계셨을 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이루어 나간 그분이었습니다. 우리의 전형적인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듯을 자원해서 기꺼이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서의 가장 독특한 특성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라고 하면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주님의 듯을 기꺼이 이루어 드리려고 하는 마음이 없다면 말로써는 교회이지만 실질 상으로서는 그리스도의 몸된 역할을 안한다는 말이죠. 그렇게 되면 실질 상의 의미를 상실해 버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이런 교회들이 많아져 있었습니다. 교회에 모여서 의식은 계속해 나가는데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주님의 뜻에서는 멀리 떨어져나갔을 때 그 교회는 흑암에 쌓여진 교회였고 교회라고 하는 실질적인 모습을 잊어버린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도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그렇게 안될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리의 머리되신 그분의 뜻을 잘 이루어 나가느냐 아니면 그것을 무시하고 살아가느냐 그것이 지금 여기서 결정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어디서부터 출발할까요. 우리 마음속으로부터 출발해서 내 마음 가운데 예수님이 나의 머리라고 했는데 그분의 뜻을 내가 정말 수행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삶을 통하여 그것이 이루어지는가, 왜냐하면 교회가 주님의 뜻을 수행해 나간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다른 식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본적으로는 우리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의 머리되신, 주님 되신, 왕 되신 주님의 뜻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아니 구체적으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수행해 갈려고 하는 가 아닌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대부분의 성도들은 주님의 뜻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없고 그것을 이룰려고 하는 마음도 없는데 “아! 이 세상의 교회는 자에서 나간다” 그런 일은 없는 겁니다. 교회가 제대로 서 나가려면, 교회가 뭐라고 말했어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죠. 그리스도의 몸이 이 땅위에 서려면 그 머리되신 분의 뜻이 이 몸 가운데서 드러나야 된다는 말이죠. 이 때 우리가 아주 깊이 생각해야 될 것이 그 기준을 내가 정할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빠져들기 쉬운 함정입니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한테는, 교회를 나온 사람들한테는 적어도 주님의 뜻을 아주 안 듣겠다는 마음은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내가 부족하지만 주님의 뜻을 듣겠습니다” 다 그런단 말이죠. 그런데 어디서 문제가 생기느냐 하면 그 기준을 내가 정합니다. “내가 여기까지는 주님의 뜻을 듣겠습니다. 그러나 이 이상은 주님이 간섭할 영역이 아닙니다. 하나님도 바쁘실 테니까 이것만하시고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게끔 해 주십시요” 이렇게 나가면 사실은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말이고 우리를 아프게 하는 말이지만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내가 기준을 설정하지 말고 주님이 설정해 놓으신 기준을 앞에 놓고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나 교회 공동체적으로나 교회 공동체 전체로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줄달음쳐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 나갈 때에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지 모릅니다. “아! 그 기준은 너무나도 높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 고백은 참된 고백입니다. 사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난번에도 이야기했듯이 이것은 주님 앞에 순종해 나가는 이 일은 졸업이 없는 학교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계속해서 이것을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조금씩이라도 그것을 확대해 나가면 이렇게 됩니다. 대개 목사님들이 그런 일에 대해서 또 너무 믿다가 속을 수도 있지요. “사람들이 아직 신앙생활 한지가 얼마 안 되서 그렇겠지. 시간이 지나면 좀 더 열심히 하겠지” 이렇게 생각을 할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한 것이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고 나중에는 그냥 자기가 설정해 놓은 기준에 따라서 나는 이것만하면 예수 믿는 것입니다. 나는 이게 교회의 회원된 겁니다 라고 하는 것을 다한 것처럼 생각하면서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이것은 뭐 누구의 문제가 아닌 한국 교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다들 그렇게 자기들이 설정해 놓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사는게 예수 믿는 것입니다”라고 말해 나가기가 쉬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기준을 우리가 설정하지 맙시다. 주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기준을 앞에 놓고 그 기준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순종해 나가야 합니다.
또 한가지 주님이 우리의 머리시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의 대표이시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은 비교적 주님의 뜻을 잘 이루지 않으려고 딱 설정해 놓고 이 한도 내에서만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하고 하는 사람에게 드리는 말씀이라면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주님 앞에 아주 열심히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대표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만일에 교회 공동체가 뭔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해 봅시다. 뭔가 좋은 일을 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그것은 우리가 위대해서, 잘나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대표이신 주님께서 그 일을 하십니다. 그 생각을 우리가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대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대표이신 예수님의 이름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게끔 우리의 공동체의 모습을 이루어 나가는가 그 생각도 해야 될 뿐더러 만일에 우리가 무엇인가 제대로 잘 하는 일이 있을 때 우리는 거기에 대한 판단이 있어야 되겠지만, “그래 나는 그래도 주님의 뜻을 아 만큼은 순종하고 있어”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오히려 우리를 망칠 수가 있습니다. 간혹 가다 보면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이죠.
탕자의 비유에서 그 첫번째 아들 이야기를 여러번 했었죠.그 아들은 아주 착한 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들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기뻐서 잔치를 베풀 때에 그 입에서 불평이 나옵니다. “나는 열심히 하고 저 애는 아무것도 안했는데 아버지가 ! 뭐가 좋다고 잔치를 하십니까” 우리를 마음 가운데 그런 생각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것을 우리가 열심히 해 가고 하는 일을 진짜로 하시는 분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명확한 뜻을 안다면 그런 불평이 안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일을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의 대표이신 예수라는 말이죠. 그분이 일을 하신단 말입니다. 그 일은 우리로 하여금 아주 애를 써 가지고 주님의 이름에 합당한 일을 하게끔 신경을 쓰게 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는게 과연 주님이 하시는 것일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일까,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 뭔가 그럴듯한 것이 나왔으면 이게 우리한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정말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을 하셨구나 라고 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그것을 할 것이고 모든 영광은 주님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부디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머리되시는 주님께 순종해 나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이 주님께 머리되신 주님께 순종해 나간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인가 하는 것을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우리가 에베소서라고 했습니다. 대개 목사님들이 흔히 하는 농담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 가정에서 어떤 가정이 아이를 못가질 때 그 가정에 심방 가서 무슨 구절을 읽을까, 에베소서를 읽는다고 해죠.‘애를 베소서’ 그런 에베소서 아닙니다. 신약에 에베소라고 하는 지역이 있었는데 그 에베소라는 지역에 보낸 편지입니다. 이 편지 속에서 바울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들이 주님을 열심히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한테서 칭찬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서 내 마음속이 기쁘다 라고 하시면서 아! 이런 이야기가 들려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우리 호산 교회를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이 생각하면서 여러분들이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 여러분 삶을 다 드리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내 마음이 기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여러분 삶을 다 드리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내 마음이 기쁩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기를 마지않습니다. 하면서 하는 바울의 기도가 여기 나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바울이 기도한 것은 내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여러분들이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 무슨 기도를 하십니까 오늘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뭐라고 기도해야 할 것인가 배울 수도 있습니다. 바울의 첫번째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시기를 원한다. 그랬는데요 바울의 기도가 흔히 우리가 하는 기도와 좀 다르다는 것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우리는 대개 무엇부터 기도합니까 이야기를 안합니다. 여러분 머리 속으로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뭘 기도하는가. 그런데 바울은 뭐합니까, 우리 각 사람 각 사람한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원한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대해 세가지로 이야기해 줍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알 수 있게 되어진다 이야기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벌써 하나님을 아는 데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 것에 그 깊이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십 시요. 예수님을 믿어 가면서 우리는 날마다 점점더 하나님을 알아 나가게 되지요. 그러니까 어저께보다 오늘 좀 다 하나님을 더 알아야 되겠지요. 그것을 성경에서 뭐라고 말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살아가시면서 여러분이 주일날 나와서 이렇게 예배하시는 그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가, 얼마나 귀하신 분인가, 높으신 분인가 하는 것을 세월이 지나면서 알아가 지십니까, 바울이 기도하는 것은 그겁니다. 아마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그럴 것입니다. 호산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날마다 날마다 더 잘 알 수 있기를 원한다. 이 어떻게 해서 되어지느냐,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또 이 설교를 들을 때라든지 또는 성경을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읽을 때라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 가운데 주님을 더 잘 알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는 또 무엇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시는가, 우리와 관련된 것인데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죠. 이간에게 중요한 지식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관한 지식과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에 관련해서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소망이 무엇인가, 우리가 어떻게 되도록 하셨는가, 그것을 알도록 한단 말이에요. 세월이 지나면서 “아!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는데 나를 그의 교회로 세우셨는데 내가 어떻게 되기를 주님이 원하시는가, 세월이 지나면서 안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가 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 사람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땅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벌써 하나님을 아는 데요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라고 하는 것에 그 깊이 있는 의미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어 나가면서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점점 더 하나님을 알아 나가게 되지요. 그러니까 어저께보다 오늘 좀 더 하나님을 더 알아야 되겠지요. 그것을 성경에서 뭐라고 말하냐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안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살아가시면서 여러분이 주일날 나와서 이렇게 예배하시는 그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인가, 얼마나 귀하신 분인가, 높으신 분인가 하는 것을 세월이 지나면서 알아가 지십니까, 바울이 기도하는 것은 그겁니다. 아마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그럴 것입니다. 호산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날마다 알마다 더 잘 알 수 있기를 원한다. 이 어떻게 해서 되어지느냐,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또 이 설교를 들을 때라든지 또는 성경을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읽으실 때라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 가운데 주님을 더 잘 알고 사랑할 수 있게 해 준다는 말이죠.
그 다음에는 또 무엇을 알게하시기를 원하시는가, 우리와 관련된 것인데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죠. 인간에게 중요한 지식일 두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에 관련해서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소망이 무엇인가, 우리가 어떻게 되도록 하셨는가, 그것을 알도록 한단 말이에요. 세월이 지나면서 “아! 하나님이 나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는데 나를 그의 교회로 세우셨는데 내가 어떻게 되기를 주님이 원하시는가.” 세월이 지나면서 안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가, 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 사람들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땅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상속될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성도 안에서 그 상속받을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시니까,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상속을 받을 것인데 그 상속될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기를 원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그것에 대해서 전혀 감각이 없으면 안되는 것이죠. 또 한가지 이야기합니다. 무엇하나 깨닫기를 원하느냐,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 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인지를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원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그의 제자들이 되었는데 그게 얼마나 커다란 능력으로 되어진 일인지를 알 수 있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이것을 모를까 봐 바울이 한가지 예를 듭니다. 무슨 예를 드느냐 얼마나 큰 능력으로 하셨는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살리신 그 능력을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하늘 위에 높이셔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 순종하도록 그 무릎을 그에게 순종하도록 그 무릎을 그에게 꿇도록 하신 다음에 그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예수님을 주셨다. 그 이야기를 합니다. 즉, 우리의 머리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만물이 주 앞에 순종하는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대표적으로 한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해 줍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만물이 아직 온전하게 주님 앞에 다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일을 결정적으로 십자가에서 이루셨지만 계속해서 이 일을 해 나가십니다.그런데 그 일을 머리 알아채고 즉 역사의 방향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를 알아채고 서는 아! 이제 결국은 모든 무릎이 주님 앞에 꿇게 될 거니까, 그 큰 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있으니까, 그것을 미리 알고서 그것을 따라서 행하는 것이라는 말이죠. 사람들이 이렇게 커다란 정보들은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사소한 정보들은 아주 중요시하죠. 예를 들어서 언제 집 값이 오른다, 그러면 그전에 집을 사야 된다. 그러므로 발이 부리나케 열심히 쫒아다니면서 그전에 뭔가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렇죠, 그런데 이 역사에 굉장히 중요한 정보, 이 세상이 결국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무릎을 꿇게끔 되었는데 그것이 이제는 공표된 비밀, 신비인데, 그 신비 앞에서는 사람들이 무시하면서 살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을 미리 아는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세상 앞에서 우리가 미리 그 주님 앞에 우리의 순종을 기꺼이 그려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의 머리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머리되신 주님을 마구 무시하며 살아가지 아니하도록, 머리되신 그분의 뜻이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장년 성경 공부를 하면서 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주님이 머리시라면 우리는 뭐냐 그런 이야기를 했던적이 있습니다. 주님이 머리 시라면 우리는 그의 수족이다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죠. 그의 손과 발이다. 아까 찬양대가 찬양 부르신 것도 그것입니다. 주님의 귀한 뜻이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만일에 우리가 그 수족 노력을 제대로 해 나가지 않는다면 내가 이 만큼만 할게요 주님! 그런 다면 그거 참 문제일 것입니다. 주님의 몸을 병신으로 만들 생각들을 하시는 거예요. 누님의 몸을 불구자로 만들 생각들을 하시는 겁니까, 우리에게 그것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기형적인 몸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뜻 하나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내 멋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래 놓고선 예배드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몸은 그런 기형적인 몸이 아닙니다.
부디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기준을 스스로 설정하지 마십시오. 성령 가운데서 우리에게 선포되어지는 그 기준을 내 가운데서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늘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잔소리가 되니까 잔소리가 되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우리 가운데서 주님에게 대한 순종을, 우리의 머리되신 그분에 대한 순종을 늘 이루어 나갈 수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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