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무덤을 여시는 하나님 (겔 37:11-14)

첨부 1


지난 주일에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면서 부활주일로 지켰습니다. 오늘은 부활하신 예수 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의 부활을 생각하려합니다. 성도들의 부활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 때문이 요, 둘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사 "내가 사니 너희도 살리라" 선언하셨기 때문이며 셋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부활생명을 약속해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처럼 예수님의 새생명을 받은 성도 모두도 하 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계란 둘을 놓았습니다. 하나는 유정란이고 또 하 나는 무정란입니다. 하나에는 생명이 있고 다른 하나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언뜻 보면 비 슷합니다. 모양이 같고 색깔이 같고 크기가 같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맛이 같고 영양이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정란과 무정란의 차이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와도 같습니다.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있고 불신자에게는 예수님이 없습니다. 신자에 게는 생명이 있고 불신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물론 마지막 날에 신자도 불신자도 부활 합니다. 그러나 하나는 생명의 부활로 나오지만 다른 하나는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 얼 른 보기에 다를바 없는 것같지만 어미닭이 두 계란을 품고 21일이 지나면 여기 유정란과 무 정란의 판가름이 나옵니다. 무정란은 새까만 썩은 곪은 달걀로 나옵니다. 그러나 유정란 은 껍질을 깨고 노란 병아리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일5:12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 느니라" 하나님께서 마지막날에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살아나게 하신 것처럼 우리 모두의 무 덤을 여시고 우리 모든 성도들을 부활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시간 에스겔을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세 가지 내용으로 묵상하며 은혜를 사모코자 합니다.

 첫째,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11절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이렇게 바꿀수 있지 않겠 습니까. "이 뼈들은 대한민국 온 국민이라" 또 "이 뼈들은 바로 우리 모두라"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심령이 메말랐고 믿음, 사랑도 메말랐습니다. 피리를 불어도 소고를 쳐도 메 마른 실존입니다. 우리의 형편이 무엇입니까 여기 기록된 '마른 뼈'와 같습니다. 경제, 도덕적, 정신적으로도 같습니다. 그런데 본문 11절을 다시 보면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 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세 가지 절망이 소개 되어 있습니다.

① 뼈들이 말라버린 절망입니다. 본문에 "뼈들이 말랐고"라고 했습니다. 물없는 모래땅 을 사막이라하고 생명이 없는 마른 나무를 고목이라합니다. 살이 빠지고 뼈가 마른 상태를 사경에서 헤맨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형편이요, 현실이었습니 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특별히 그들의 믿음이 마 른뼈와 같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 물어야 합니다. 빈들에 마른 풀같이 시들은 나의 영혼 ♬ 나의 믿음은 마르지 아니했는지 시들지 아니했는지 물어야 할 것입니다.

② 소망이 없어진 절망입니다. 절망은 다른 것 아니라 소망이 없어진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큰 소망 잃어버리면 큰 절망 어찌할 수 없습니다. 사업이 끝장난 것, 부부관계가 끊어진 것, 고등고시에서 낙방된 것 물론 이런 것들도 절망입니다. 그러나 가장 큰 절망이 있는데 "당신은 몇 날밖에 살지 못합니다" 이런 죽음의 경고를 받는 것일 것입니다. 인생 은 무엇입니까 이미 죽음의 선고를 받은 자들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운데 결코 죽지 않으리라 다짐할 수 있는 인생 있습니까 때가 되면 사랑하는 권사 님, 장로님, 목사님도 죽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육적으로도 살 길이 전혀 막혀버 렸습니다. 모든 소망이 낙엽처럼 떨어져버렸습니다. 미래를 점칠 젊은이들이 포로로 다 잡혀가버렸고 남은 어린이들은 양식이 없어서 배를 움켜쥐어야만 했습니다. 얼마나 기가막 힌 절망입니까. 그런데 또 하나의 절망이 있습니다.

③ 다 멸절당해버린 절망입니다. 11절을 보면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고 했습니다. 지 금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침략으로 완전히 황폐해졌습니다. 도덕적, 종교적으로도 솟아날 구멍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어떻게 뼈들이 살수 있겠습니까. 무덤에서 송장이 일어나는 것을 본 일이 있습니까 우리 모든 인생은 어쩔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이미 늙어버린 존재들입니다. 철학자 하이덱거는 죽음에 의 존재자라고 했고, 싸르투르는 순간 순간 죽어간다고 했습니다. 죽음은 우리로부터 멀리 있는 것 아닙니다. 눈 앞에 있습니다.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지 아니하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악성 세포 하나만 있어도 죽습니다. 심장의 고동만 멎어도 죽습니다. 펌프질 하던 피가 한 번 응고되면 죽습니다. 오토바이 사고는 갑자기 납니다. 이러할 경우에 인 생의 죽음도 갑자기입니다. 순간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경고했습니다. "오늘밤 네 영 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것이 되겠느냐"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너무 확실한 현실입니다. 바로 우리 곁에서 사업가, 예술가, 미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가고 있 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물음 앞에서 함구무언(緘口 無言)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칠한 무덤에 서 나와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할 때 "이 회칠한 무덤같으니"라고 책망하 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믿음만은 무덤에 갇혀있을 수 없 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회칠한 무덤과 위선적인 무덤에서 나와야 할 것입니다.

 둘째,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9절에 보면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고 했는데 여기 '생기'는 영적 생명을 뜻합니 다. 이 생기가 없으면 사람이 결코 사람이 아닙니다. 창2:7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 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했습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코, 귀, 입, 손과 발, 오장육부가 있었습니다. 힘줄, 살, 가죽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생기를 불어 넣기전까지는 흙덩어리에 불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 니다. 클레오파트라, 양귀비,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미모를 세계적으로 자랑하는 사람들 일지라도 그 속에 생기가 없으면 흙덩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른 뼈와도 같습니다. 얼 마전에 텔레비젼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보았습니다. 실망을 가져다 준 내용입니다. 그 의 주름살많은 얼굴 추해보였습니다. 목덜미의 군살이 여인들의 미모를 서글프게만 했습니 다. 속으로 물었습니다. 성형수술은 몇번이나 했을까 늙어보이지 않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돈을 썼을까 지금 바르고 있는 화장품은 어떤 제품일까 그렇습니다. 생기없는 미 인은 흙덩어리에 불과하며 마네킹에 지나지않습니다. 생기없는 영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죽은 시체요, 무덤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때입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외쳤습니다.

"생기야 들어가라" 여기 생기는 생명의 힘이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새로운 생명을 뜻 합니다. 에스겔이 뼈들에게도 대언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가 났습니다. 뼈와 뼈들 이 서로 들어맞는 소리,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고 가죽이 덮히는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생기가 없었습니다. 이때 에스겔이 생기를 향하여 대언했습니다. "생기야 들어가 라" 그랬더니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마른 뼈들이 여호와의 군대로 부활한 것입 니다. 에스겔 37장은 믿는 성도들에게 주는 부활의 장입니다. "생기야 들어가라" 우리 모 두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디에 생기가 들어가야 합니까 우선 나의 믿음에 생기가 들어가야 합니다. 생기없는 나무는 꽃을 피울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마침내는 죽고 맙니다. 죽은 고기를 보십시오. 물이 흐른데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으면 작은 피리새끼라도 폭포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것이 생명의 특징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부패 했을지라도 거기에 편승하지 아니하는 믿음있는 성도들을 주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산 믿 음이라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삭을 바칠 수 있습니다. 나의 향유담은 옥합 을 깨트릴 수 있습니다. 산 믿음이 있어야 교회의 분부를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죽으면 그 자리에서 피합니다. 궂은 이야기 들을려고 하지 아니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주 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또 나의 기도에도 생기가 들어가야 합니다.

기도가 없으면 응답도 없고 변화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죽으면 발전도 부흥도 없습니 다. 십년을 예수 믿어도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기도에 생기가 없으면 생활이 죽고 신앙 인격이 죽습니다. 이름은 예수의 제자이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에 지나지 못합니다. 말썽 꾸러기 신자가 되고 말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사랑에도 생기가 들어가야 합니다. 입술만 의 사랑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울리는 괭과리입니다.

천사의 방언입니다. 성도의 별명은 사랑의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사랑이 무 엇인가를 삶을 통해서 보여야 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죽음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것을 보여 주어야합니다. 사랑이 힘이고 능력인 것을 사랑이 교회에서 가정에서 힘 이되고 능력인 것을 보여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형제의 허물을 일곱 번 용서할 수 있 습니까. 사랑은 일곱 번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입 술만의 사랑을 가지고는 민족의 가슴에 힘을 돋아줄 수 없습니다. 입술만의 사랑을 청산해 야 합니다. 실제로 사랑하고 몸으로, 생활로 사랑하고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무덤을 열리니 너희가 살리라" 12절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했고 13절에도 "내가 너희의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5절에 보면 "내가 생기로 너희에 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절"너희 속에 생기를 주리니 너희가 살리라" 말씀했습 니다. "너희가 살리라" 이것이 에스겔 37장의 핵심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십시오.

베다니에 살고 있는 예수님의 친구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예수님께서 찾아 가셨습니다. 나사로의 누이들은 "왜 이제 오시느냐"고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사 랑하시는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이들이 한 말이 무엇입니 까 "죽은지 나흘이 되어서 냄새가 나나이다" 소망이 없음을 말했으나 예수님께서 어찌했 습니까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말씀했습니다. 마지막날 이 말씀을 꼭 하실 것 입니다. 그때에 나사로가 어찌되었습니까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무덤에서 살아 나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도 같습니다.

"네 무덤문을 열고 너희가 거기서 나오게 하리라" 무슨 뜻입니까 "너희를 다시 살아나게 하리라"는 뜻이요, "너희를 무덤에서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너희 무 덤을 열리니 너희가 살아 나리라" 얼마나 소망적인 말씀입니까.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서글픈고 손해보는 일입니다. 엄청나게 불행한 일입니다.

"내가 무덤을 열리니 거기서 너희가 살아 나리라" 마음 가운데 간직하면서 부활 신앙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에 보면 주일 아침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사가 예수님의 무덤을 막아 놓았던 돌을 굴러 내었습니다. 이 돌을 굴러 놓을 인생이 없습니다.

너무도 큰 돌이기 때문입니다. 돌을 굴러내매 십자가에 죽었던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 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미리서 말씀하셨습니다. 요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누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습니까. 누가 무덤문을 열고 무덤에서 송장을 살아나게 합니까 본 문 말씀이 답합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내가 이루리라"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 입니까. 이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무덤을 여시 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민족, 창과 칼에 찔려 죽은 민족, 살아 남은 자는 포로로 끌려가고 천대받고 멸시받는 민족, 소망이 없고 내일, 믿음, 윤리도 없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에스겔은 마른뼈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 형편을 무덤이라고 말했습니 다. 그렇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의 민족이 마른뼈들이 아닙니까. 두덤이 아닙니 까. 아니 우리 모두가 마른뼈요, 무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성도들의 무덤 은 벌컥 인생의 종착역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마지막날에 그 무덤문을 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 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니 너희도 살리라" D.L 무디가 임종할 때 일입 니다. 갑자기 병상에서 일어나서 앉더니 "영광이로다 땅은 물러가고 하늘이 열린다. 지금 하나님께서 날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D.L 무디가 죽다라고 신문 에 보도될텐데 그대들은 믿지를 말라 나는 무덤에서 부활할 것이다"고 찬송하면서 숨을 거 두었다합니다. 하늘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 ♬ 우리 모두가 임종을 만날 때가 있을 텐데 꼭 이 찬송을 불러야 할 것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마지막 말을 "하늘에서 전보가 왔으니 이제 가보아야겠다"고 간 곳이 천국입니다. 스데반집사는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 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돌무덤에서 순교하면서 미소를 지었다하지 않습니 까. 사랑하는 성도여, 참 믿음을 간직하십시다. 참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동시에 나의 부활이 없는 믿음은 참 부활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나의 부활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날마다 날마다 새로운 삶을 살면서 그 삶속에서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 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