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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절 메세지 (사 2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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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온 여러분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예수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우리가 성경이 거짓말을 쓴 책이 아니고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이 담긴 책이라고 믿고 있다면 오늘 본문으로 읽은 구약성경의 이사야서에서 "내가 영원히 죽음을 없애버리겠다"는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은 예수의 부활로 성취되어서 신약성경은 거의 예수에 대한 기록으로 적혀져 있다는 것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그 제자 베드로를 만났을 때 "네가 이제는 내 부활을 믿느냐"는 말을 전혀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이 모든 것보다도 정말로 더 날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사랑을 깨닫고 진심으로 그분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는 데에 부활의 참뜻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사람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고 욕심이 인간을 지배하게된 때에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 죽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온 것입니다. 구약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는 바로 그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죽음과 죄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분이 참사랑인 아버지의 아들인 것은 그가 십자가의 죽음으로 입증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요한일서 3장 1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참 사랑을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마지막의 피 한 방울 까지 쏟으심으로써 나타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참된 사랑은 결코 죽음 앞에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결국은 참 사랑 앞에 죽음이 무릎을 꿇고 마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 강한 힘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나타난 참사랑을 죽음을 정복하고 부활로 나타낸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분 안에 나타났던 그 사랑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현재 들어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부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부활을 믿는다고 하거나 이러이러하니까 아직도 의심스럽다'라고 하는 것은 다 쓸데 없는 이야기입니다. 오직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보고 "네가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실 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던 베드로의 고백이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우리가 해야될 신앙고백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할 때 그럼 주님께서는 "네게 부탁이 있으니 성경에 기록된 계명을 잘 지키고, 주일날에 교회빠지지 말고 잘 나가고, 헌금 잘 내라"는 말씀을 하지는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진실이라면 이 양들을 먹여라. 그것이 날 사랑한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다면 날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부활절 예배에 이 말씀을 들으면서 오늘의 우리들이 먹여야할 주님이 양들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특별히 여러분 1998년 부활절을 지키는 오늘 우리 나라의 현재 직장에서 쫓겨나 먹고 살길도 갈곳도 없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공식적인 보고는 150만이라고 하지만은 실제로는 200만이나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 200만되는 사람의 가족을 4명으로 잡으면 800만 입니다. 우리 사는 이 땅에 800만이나 되는 주님의 양들이 먹고 살길을 찾지 못하고 헤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면서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마땅히 치루어야할 모든 죄값을 죄없는 그분이 홀로 걸머지고 고통을 당할 뿐이 아니라 목숨까지 버렸는데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지금 하고 있는가 말입니다. 지금 이렇게 살길이 없게 돼버린 실업자들의 눈에 비쳐있는 소위 노사정 협의는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은 국회에 모여서 회의는 안하고 국민들의 세금으로 낸 돈은 잔뜩 받고 그러고 싸움질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부유층의 사람들은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그들이 다니는 고급 음식점엘 가보면 과거보다 오히려 차고 넘치게 더 흥청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 시기에 고통분담을 아무리 떠들어봐야 실제로는 고통분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업자들이 고통을 전담하는 꼴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주님의 양들을 생각하면 이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먹을 것을 주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사랑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이것을 못한다면 우리 나라의 현실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수 많은 젊은이들이 자살을 하고 말 것이고, 절도와 강도가 들끓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나라는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오늘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잊혀져가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까운 북녘의 동포들입니다. 지금도 더 많이 더 계속해서 굶어 죽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교회에서도 1년에 한번 내지 두 번 모여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실업자 문제가 쏟아져 나오면서 굶어 죽어 가는 이북동포는 거의 생각조차 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정말 "주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그럼 내 이 모든 양들을 먹여라"라는 주님의 말씀에 "예, 제가 먹이고 있습니다"라고 우리가 그렇게 대답할 수 있는가 말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양들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배고픈 양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말뜻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양을 먹이는 목자에게 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도둑질 하려고 들어온 사람, 물어 죽이려고 들어오는 이리떼들에 대해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보호를 해야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 나라에 재벌들이 나라의 돈을 은행에서 끌어다가 진 빚이 1000조라고 발표 했습니다. 이런 도둑질보다 더 큰 무서운 도둑질이 어디 있습니까 먹고 살길이 없어서 어디에 들어가서 금품 훔친 사람에게 벌을 줄 수도 있고 감옥에 보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라와 민족의 재산 통째로 도둑질한 자들에게 아무것도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다른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면 사형을 줄 수 있는 법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만 사람뿐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를 그리고 그 생명체가 담겨있는 지구를 조직적으로 모조리 죽이고 있는 주범에 대해서 우리는 방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지구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죽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엘니뇨 현상이라는 신기한 말까지 나타나서 오늘도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황해가 황해가 아니라 죽음의 바다가 되어버리고 시화호는 살릴 수 없는 시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죽어 가는 내 양들을 먹이라 하는 그 예수님의 말씀은 에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말을 나 자신이 하고 들으면서도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할 때면 그리고 그 죽어 가는 양들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밖엔 나올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죄로 인해서 우리 주님의 구원의 사업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 기록된 대로 우리는 죄인들임에 틀림없지만 누구도 우리를 죄인이라 정죄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9절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경우에라도 다 끊어짐을 당할지라도 꼭 한가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끊어질 수는 없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부족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가지고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용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정말로 있는 힘을 다해 주님의 양들을 돌보며 살겠습니다는 결단의 말이 나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진정 부활절을 지키는 교회라면 여러분들이 구체적으로 교회공동체가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오고 있는가를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부활하신 주님을 위하여 큰 목소리로 찬양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이런 모든 것을 다 정복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죽음아, 내 이기는 이김이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 가시가 어디 있느냐 그럼으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미 죄와 죽음에서 해방 받았으니 그대들은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 양을 먹이는 일을 다하십시오"라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 부활절 메시지로 삼아야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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