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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에 희망을 걸고 (벧전 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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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비 없는 자식

(1) 제가 지난주간에 아비 없는 자식이 되었습니다. 연건평 700평의 교회를 짓고 입당예배를 드린 직후 뇌출혈로 쓰러지셔서 6년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결국 소천하셨습니다. 장례를 진행하는 동안 제가 여러분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습니다. 제 선배 목사님에게 집례를 부탁했는데 그 목사님께서 "새벽 6시 30분에 교회에서 한 시간 거리의 장례식장에서 드린 장례예배에 어떻게 그렇게 많이 모일 수 있느냐고 감동하시면서 지구촌교회가 정말 살아있는 것을 느꼈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문상하러 오신 여러분들의 모습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저희 아버님께서 병석에 오래 누우셨던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분들은 오랜 고통이 끝났음을 알기에 편안한 마음으로 오셨고, 그 사실을 전혀 모르던 분들은 저에게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는 모습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2) 장남인 제가 저희 가정의 호주였던 아버님의 사망 신고를 위하여 동사무소에 갔더니 사망신고 양식에는 호주 승계 신청서를 겸한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한 분의 호주가 자리를 떠나니까 새로운 호주의 자리가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3) 제 부친이 비교적 열린 분이라서 화장을 하라고 유언하셨습니다. 6년간이나 누웠다가 돌아가셔서인지 유골의 부피는 다른 사람들의 것에 비하여 절반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가루로 만든 유골을 산에 뿌리고 돌아왔습니다. 그야말로 한 평생의 인생이 한 줌의 재였습니다. 그것을 뿌리면서 "나도 이 한 몸 불살라 태워지게 하시고, 이 가루가 된 유골이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온 세상을 향하여 흩날리게 하옵소서" 기도했습니다.

(4) 죽음을 앞에 두면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반응을 합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이 살아있을 때 아꼈던 몇 가지를 중얼거렸습니다. "내 조국 프랑스…, 충성스런 군인…, 사랑하는 아내 조세핀…" 세상에 대한 애착을 표현한 것입니다. 베토벤은 "친구여, 이제 희극은 모두 끝났네"라고 하면서 절망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제 나는 어찌할 것인가" 하며 절규했습니다. 스탈린은 두 눈을 부릅뜨고 왼손을 내저으며 저항했다고 합니다.

(5) 이처럼 모든 사람은 죽으면서 이루지 못한 한, 완성하지 못한 삶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 차원이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손과 발에는 못을 박힌 채 피 한 방울 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쏟아 부어주신 후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입니다. 그 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6) 지난주간 성경공부를 하면서 어느 분이 제사문제에 대하여 질문을 하셨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사지낼 때 보면 귀신을 불러들이기 위해 문을 열어놓습니다. 우리는 흔히 제사를 조상에 대한 예의이고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돌아가시기 이전 살아 계실 때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고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저희 가정은 3대 목회자 가정이기에 문상객조차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분들이 거의 없었기에 일사천리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진행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직접 집례한 것만 해도 100여 번의 장례를 집례했는데 그런 가정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장례절차나 조상의 제사나 믿지 않는 분들과 함께 의논해야 할 때는 여러분의 결단에 의하여 지혜롭게 해야 되겠지만 틀림없는 것은 조상에게 제사한다는 이유로 자녀들을 조상들에게 묶어놓는 것은 과거지향적으로 살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7) 오늘 본문 3절에 의하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산 소망 가운데 사는 사람들입니다. 미래지향적인 삶을 삽니다. 주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보증이 된 앞을 내다보는 삶, 지금은 고난 속에 있지만 반드시 부활해서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걸고 사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상황 속에서도 생기 있게 살아가게 합니다.

2. 이 사순절에

(1) 사순절 기간에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방법을 각자 한 가지 이상 정해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행사가 아니라, 방법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것으로 다시 살기 위해 옛 것을 죽이기를 원합니다.

(2) 새로운 기준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전에 가지고 있던 나의 기준을 땅에 묻기를 원합니다.

(3) 본문 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얻기 위하여 썩고 더럽고 쇠하는 세상 것을 포기하기를 원합니다.

(4) 본문 5절에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라고 했습니다. 구원과 해방, 자유와 기쁨을 얻고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기 위해 나의 능력이라고 생각했던 껍질들을 하나씩 벗기기를 원합니다.

(5) 이것만은 절대 꺾일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의 장벽과 울타리들을 하나씩 무너뜨리기를 원합니다.

3. 안다는 것

(1) 오늘 1부예배에서 말씀드렸듯이 처음 보는 것은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아이들일수록 신기하고 놀라운 일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거의 모든 것들이 다 새롭기 때문에 많이 질문하고 잘 몰라서 실수도 많이 하기 때문에 어른들은 질색을 하지만 자꾸 만져보고 느끼고 싶어합니다. 신기하고 놀라워하는 행동은 주로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어른들이 이른 행동을 하면 유치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유치해지지 않으면 어쩌면 감사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2) 처음에는 신기하고 놀랍던 것들도 여러 번 반복해서 보면 이미 다 아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습관적이 되고 따분해지기 쉽습니다. 여기 제 주머니에 볼펜이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이것을 볼펜이라고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군가가 가르쳐줍니다. 이렇게 생긴 것은 볼펜이라고 말입니다. 여기 또 하나의 볼펜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얗고 하나는 빨갛습니다. 이 두개는 틀림없이 다르지만 둘 다 볼펜입니다.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제 주머니에 또 하나가 있습니다. 이거 제가 오늘 볼펜 장사가 된 것 같습니다. 이게 뭔 줄 아십니까 이것은 볼펜처럼 생겼지만 볼펜이 아닙니다.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지시하는 레이저 포인트입니다. 반복하여 경험하면서 비슷한 종류는 모두 볼펜이라는 개념을 얻지만 또한 비슷하게 생겼어도 볼펜이 아닌 것도 있음을 경험합니다.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일치되는 것은 무엇이고 차이가 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비슷한 것이니까 내가 다 아는 것이라고 하면 놓치기 쉬운 것입니다. 이런 일치와 차별을 경험하면서 새로운 창조성을 얻기도 합니다.

(3) 하나님은 물질이 많든 높은 명예를 얻었든 관계없이 변화없이 반복되어지는 삶이 되면 무료하고 재미가 없고 소망이 없어질까봐 때로 고난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당황스럽게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로 놀라게 하고 당황하게 합니다. 그러나 놀라지 않으면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습니다. 고난 때문에 당황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것을 깨닫기가 어렵습니다. 이 사순절 기간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면서 진정한 부활의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그런데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이 자기를 보게 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여러분이 옆 사람을 보기 위해서는 옆 사람이 자기를 열어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보여주지 않겠다고 닫아놓고 있으면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천한 생각과 부족한 머리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중심을 보여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는 삶, 죽음으로 새로 태어나는 삶이 하나님의 뜻이고 비밀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을 통하여 끊임없이 그 비밀을 열어 가시고 계십니다. 그 동안에 깨닫지 못했던 것들, 그 동안에 알 수 없었던 것들을 알게 하십니다.

(5) 우리로 깨닫게 하고 알아가게 하기 위해 놀라게 하시고 당황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깜짝 놀랐어요. 놀라지 않게 해주세요. 하나님 당황했어요. 당황하지 않게 해 주세요"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껄껄 웃으시는 걸로 대답을 대신하실 것 같습니다.

(6) 여러분! 지난 날 여러분 생애 속에서 엄청나게 놀랄 일이 있었습니까 엄청나게 당황한 일이 있었습니까 엄청난 비밀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너희 맏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불로 연단 받으면 얼마나 놀라고 당황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뒤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선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7) 본문 9절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만큼 구원의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목표입니다. 믿음을 통해 감사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원리 안에서 구원과 자유의 기쁨을 회복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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