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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월드비전 구호팀 한비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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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성탄절에 나는 한없이 눈물만 흘렸다. 미국 유학생활이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다. 토론식 수업을 받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 등 나와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당시 동양인 여자를 싫어했던 한 미국인 여자친구가 나를 무척 괴롭혔다. 그 친구는 대학원생 가운데서도 '짱'으로 통했다.
한번은 친구들과 식사를 하던 중 물을 가지러 가던 나는 물 먹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떠다주겠다고 했다. 한 친구가 내게 부탁했다. 그때 다른 테이블에서 식사하던 그 '짱'이라는 친구가 나를 가리키며 '동양 여자들의 저 노예 근성을 좀 보라'고 소리쳤다. 나는 파란 눈들을 향해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친절이라고 한다'며 당당히 밝혔지만 그 미국인 여자친구의 괴롭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도 계속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한국에서는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을 들었던 나였다. 미국에 와보니 상황이 너무 달랐다. 이런 곳에서 내가 따돌림을 당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마치 나로 인해 우리나라가 망신을 당하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신경성 위산과다로 쓰러졌다. 그때 나를 보살펴준 미국인 양부모께서 내게 바나나와 식빵 등을 먹으며 속을 다스리라고 주문했지만 도저히 그런 것들을 먹을 수 없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양어머니에게 '죽이 먹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 분은 '죽을 어떻게 만드냐'며 물었고 나는 대충 죽 끓이는 법을 설명해드렸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 가보니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이 놓여있었다. 양어머니는 '이게 죽이 맞니? 네 이야기만 듣고 동양마켓에 가서 쌀을 사와 만들었는데…'라며 쑥스러워하셨다. 그 분이 내민 죽은 국물만 흥건한 '홍수죽'이었다.
왜 그렇게 눈물이 흐르던지 그날 나는 미국에 온 뒤 처음으로 따뜻한 사랑을 느꼈다. 양부모님은 '메리 크리스마스'하며 나를 감싸안았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양어머니가 끓여준 그 '홍수죽'을 먹었다. 온갖 시름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나는 양부모 덕분에 힘든 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들이 새해 나를 보기 위해 한국에 온다. 가장 힘든 시절 큰 웃음으로 성탄의 기쁨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준 양부모의 얼굴이 오늘 따라 유난히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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