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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세가지 의미 (민 21:7-9, 롬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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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은총은 새롭게 살아나는 은총입니다.
2001년 21세기 첫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연동의 가정과 일터가 새롭게 소생하고, 우리 나라의 경제가 다시 살고, 우리 사회의 윤리가 다시 살고, 인간 세계의 인륜이 사는 부활이 있기를 바랍니다. 부활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일어남을 뜻하는 아나스타시스 그리고 일으심을 뜻하는 엥게르시스입니다. 성경적 의미의 부활은 죽은 사람의 몸과 영을 되살아나게 하는 하나님의 기적을 뜻합니다. 부활은 그리스도를 통해 확인되었으며 영화로운 영생으로 되살아나는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다시 죽지 않는 삶이 부활인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세 사람인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그리고 나사로를 통하여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음을 주님은 보이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살 것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영원히 살 것을 보이실 것입니다. 부활이란 낱말의 용법을 분류하여 보면, 보통은 죽은 자의 부활이란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것은 죽은 자가 다시 살 것을 분명히 하신 말씀입니다. 부활은 신약적 용어입니다. 구약에는 한번도 나타나지 않지만 신약에는 수십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구약 욥기서 14:14에는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라고 합니다. 구약은 다시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도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은 분명히 있고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첫째, 부활은 영원히 사는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14에는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요한복음 6:35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요한복음 6:58에는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영원히 사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약속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하여 영원히 살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약속을 성취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죽으심은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죽으심만 가지고는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다시 사심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심으로 영원히 사는 약속을 성취하셨습니다. 프랑수아 바리용이란 분은 그의 책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서 "부활과 관련하여 복음서에서 다음 두 가지를 보게 된다. 첫째, 눈앞에 나타난 어떤 존재의 확인이다. 둘째, 예수님의 말씀, 그분이 보여주셨던 행동 그리고 그분의 죽음과 관련된 예언들에 대한 해석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을 보이시기 위하여 에녹을 죽지 않고 데리고 가셨습니다. 엘리야를 불병거를 탄 채로 데려 가셨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또 앞으로 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사는 것은 죽지 않는 방법도 있지만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사실은 사람이면 죽어보는 것도 괜찮습니다. 다시 살 자신만 있으면 죽는 것이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가난하고 못 살아본 사람에게 잘 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늘 잘 살던 사람은 잘 사는 것이 별로 신비로울 것이 없습니다. 죽을 사람이 다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죽지 않아 본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보다 죽어 본 사람이 영원히 사는 것이 더 큰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 죽습니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삽니다. 그리고 영원히 사는 감격이 한층 더 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11:25-26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 믿습니까

둘째, 부활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다시 사심은 역사적 사건입니다. 허구나 전설이 아닙니다. 당시에는 부활이 없다는 사두개인이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헬라철학은 영혼불멸을 얘기하지만 부활의 의미는 거부합니다. 당시인들 가운데는 예수님이 완전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가사상태에 있었다고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난해 갔다고 합니다. 제자들이 환각에 의하여 잘못 보았다고도 합니다. 부활한 것도 아닌데 거짓으로 기만했다고도 합니다. 또 현대 학자들 가운데는 부활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상징으로만 받아들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고 하는 설들은 다 반증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드웨테(De Wette)는 "시저가 암살 당한 것이 하나의 역사적 사실인 것과 꼭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바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우리의 죽음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수 없는 죽음을 죽으셨고 우리는 죽을 수 있는 죽음을 죽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죽음을 죽으셨고 우리는 죄의 대가인 죽음을 죽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신 죽음을 죽으셨고 우리는 다시 살 죽음을 죽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사셨고 우리는 예수님이 살리셔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죽을 수 없는 죽음이기 때문에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의 대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이상으로 예수님은 죽음을 다스리시는 분이기 때문에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살리신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은 죽음에 대한 태도를 보이십니다. 모든 사람이 다시 살 것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은 죽음도 지배하시는 분이신 것을 보이십니다. 예수님께는 산 것이나 죽은 것이 차이 없음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죽음도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을 증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다시 사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19에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성전이신 예수님 자신을 죽여도 다시 살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헐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살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셨습니다.

프랑스의 어떤 회의주의자는 "기독교인들은 빈 무덤의 냄새를 맡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빈 무덤의 냄새를 맡습니다. 결코 무덤 속의 죽음의 냄새, 시체의 썩는 냄새가 아닙니다. 빈 무덤의 냄새를 맡는 사람들은 다시 사신 주님의 냄새를 맡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 냄새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진동하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셋째, 부활은 우리가 다시 살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심은 우리가 다시 살 것을 증명하여 보이신 사건입니다. 단 하나의 다른 점은 예수님은 스스로 사신 분이고 우리는 그 분을 통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생에서 생명을 공급받아 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 후에 부활 때에 다시 생명을 공급받아 살게 될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아 광야생활을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지만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불뱀으로 그들을 징벌하실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들에게 불뱀을 보내어 물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뱀에게 물렸지만 장대에 높이 있는 불뱀을 보면 다시 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죄에 대한 댓가 그리고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진리를 모형적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높이 달린 불뱀을 보는 자는 물렸지만 삽니다. 죽을 자가 사는 것입니다. 죽었지만 다시 사는 것입니다. 보지 않는 자는 이미 죽은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다시 사는 것에 대하여 명확하게 조금도 의심할 바 없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서 6:4에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22에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또한 우리를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내세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만일 사람이 죽었다 다시 살수 있느냐"라는 물음에 대하여 과학은 '알 수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철학은 '내세가 없어서는 안 된다'고만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께서 죽었다가 사신 것처럼 우리들도 죽었다가 살 수 있다고 분명하게 대답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신경으로 신앙 고백할 때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우리 모두의 몸이 다시 살뿐만 아니라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죄 사함이 없으면 몸이 다시 사는 것이 없습니다. 몸의 부활이 없으면 영원히 사는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 사함의 십자가와 부활과는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집니다. 십자가 때문에 부활이 있습니다. 부활 때문에 영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5:29 에는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분명히 있고 모든 사람이 다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지 않은 것만도 못한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부활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을 소유하고 삽니다.

모리스라는 분은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킨 능력이 또한 그리스도인 속에서 활동한다. 부활은 계속되는 작업이다"고 하였습니다. 부활은 계속되는 작업입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질 소망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우리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부활 때에 무덤에서 일어나는 것을 더 분명하게 확신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부활의 확실성은 우리가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분명한 사실입니다. 결론 웨스콧(Wescott) 감독은 "부활절의 선물"(The Gift-of Easter)과 "오순절의 선물" (Gift of Pentecost)의 차이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부활절 선물은 부활의 능력에 대한 해답이요 오순절의 선물은 승천의 능력에 대한 해답이 된다". 다시 말하면 부활절의 선물은 살려주시는 은혜이며 오순절의 선물은 부여의 은혜입니다.

사순절 동안 경건의 삶을 사신 성도 여러분, 이제 부활의 영광도 함께 누립니다. 로마서 6:5에서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로 예수님과 연합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 부활로 연합된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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