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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신앙 (행 05: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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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사에 있어서 뛰어난 명작이라고 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스탠버그의 십자가'라고 하는 유명한 그림입니다. 이 그림도 그림지만 중요한 것은 이 그림 그려지는 과정에 있었던 이야기가 일화로 전해지고 있서서 그 이야기가 우리게 깊은 생각하게 해줍니다.
스탠버그라고 하는 유명 화가가 성 베드로 성당 위고 신부의 요청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 대한 그림을 그리게 되엇습니다. 그는 성당의 부탁을 받고 조심스럽 그림을 그려 갑니다. 그런데 얼마동안 그리다가 중단해 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이 너무 싸게 흥정되었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면서 불만 많았습니다. 그림을 다시 흥정할 생각으로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모델 여인을 놓고 세속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어느날 그림을 그리다가 잠깐 깊이 생각에 잠기게 될 때, 이 모델 여인이, 초안만 만들어놓고 완성하지 않은 그림 보면서 "저 그림은 무엇이에요"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스탠버그라는 화가가 "예수님에 관한 그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가 중단하고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무슨 사연입니까" 교회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전혀 모르는 여인이 질문했습니다. 좀 귀찮지만 설명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득이 통속적인 성경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오셨고, 많은 병자를 고치고, 착한 일 많이 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이 여인이 그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슬퍼합니다. 너무너무 슬퍼하니까 화가인 그는 우는 여인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울지 마세요.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셨으니까 울지 마세요." 그랬더니 눈을 번뜩 뜨면서 "정말로 부활 하셨습니까" 이 여인의 얼굴이 다시 환하게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보는 순간 스탠버그 화가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가 지금 만백성을 위해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셨다고 말했는데 이 말을 듣고 저 사람은 저렇게 생명력을 얻는데 내가 정말 예수의 부활을 믿고 있느냐 정말 내가 부활했다고 말했던 것인가" 하며 자기 자신을 깊이 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그는 거기에서 다시 부활 신앙을 회복시키시면서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림을 그리면서 돈 적게 준다고 흥정을 하고 있다니 아....." 하면서 자기 마음에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감사한 마음으로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활신앙을 회복하고 부활시켜서 그림을 마침내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스탠버그의' 그림은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주고 영감을 주는 그림으로 기독교 역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특별히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도대체 처음부터 끝까지 신비입니다. 신비라는 것은 뭐냐하면 "사실은 사실이로되 우리의 지식으로 이해 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가 없을 때 그것을 사실이라고 성경은 발혀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믿어지지 않니하더라도 그것이 신비입니다. 여러분아시는 대로 알거나 모르거나 사실은 사실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사실은 사실대로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안 믿는다고 사실이 사실아닌 것이 되겠습니까 내가 모른다고 해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증명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알거나 모르거나 믿거 말거나 사실은 사실로 존재합니다. 엄연히 존재합니다. 보세요 이해 못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왜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느냐'는 것입니다. 능력이 많으신 예수님께서 왜 죽으신 것입니까 초대교회 사람들과 특별히 빌라도까지도 그 당시에 지배했던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부분을 이해지 못합니다. 어떤 때에는 이해할 것도 같고, 어떤 때에 이해 못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 보세요. 병자를 고쳤습니다. 장님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 능력 많으신 예수께서 왜 죽으셔야 합니까 십자가 향하여 소리지르는 사람들의 말이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많은 능력을 가지신 분이 능력을 나타내시지 아니하고 침묵하고 조용히 그리고 비참하게 무능한자처럼 죄인처럼 죽어갔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의 사건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사랑의 신비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께는 많은능력을 가지신 분데 왜 십자가에 죽으셨느냐' 는 겁니다. 그것이 신비. 또 하나는 '도비하게 죽으신 예수께서 어떻게 부활했느냐'는 것입니다. 활의 신비, 참으로 이해하기 운부분입니다. 그래 성경에 볼 것 같으면 모든 사람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았다고 하는데만나 보았기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불구하고 유독히 도마는 니라고 합니다. 에요..." 아주 고집도 셉니다. 두가 다 예수를 만나 보았다 해도 "아니에요. 나는 눈로 는 못 믿겠습니.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 못 자국이 있는 그 을 내가 만져 보고야 믿겠라. 눈으로는 못 믿겠다.
그것은 환상일 수도 있으니..." 고집을 부립니다. 그럴. 나라도 그렇게 을 것입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는 얘기입니까 그렇게 참하게 죽으신 서다 살아났다니 도대체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얘기입니까 기에 두 번째 신비가 있고요. 세 번째 숨겨진 신비가 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만나 보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참게으신 예수가 부활하셔서 자기 앞에 나왔습니. 손과 발과 옆구리를 보이면서 "자, 믿는가되라. 심하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고 말씀하십다. 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주는 참으로 나의 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를 확실하게 만나고 믿게 됐데입니다.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까 그 예수를 버리고.. 점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요. 그 놀라운, 신비로운 사건이 눈앞에 있는데 특별히 경 를 보면은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그러니까 그 다음 사람 "나도! 나도! 나도! 나!...." 일곱 사람이 따라갑니다. 따라가는 모습을 가만 생각해 보세요. 이 얼마나 가 막힌 얘기입니까 예수는 부활하셨습니다.
만 보았습니다. 그 역사적 사실에 는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물고기 으러 갔습니다.
그 점이 납득이 안가요. 또 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이렇게 고기 잡으러 갔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옛날 직업으로 돌갔던사람들이 다시 생각을 려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면서 예루로 모여들 오순절에 성령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한사람 한사람 새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새로운 용기를 가지게 됩니. 그리고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부활의 증인이란 순자를 다. 부활을 고, 부활을 증거하려면 내가 아깝지 않게 죽을 수 있어 합니다. 죽음의 선을 훌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순교자이 진정한 의미에서 부활의 증다.,여기에 신비 있지 않습니까 어쩌면 이 신비를 한평생 풀어 가는 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네 가지 사건이 어떤 때에는 해 될 것도 같고, 어느 때에는 이해되지 않고, 어느 때는 고, 어느 때에는 어지지 않습니다.
한평생 풀어 가는 신비의 수수께끼입다. 여러분, 부활절 하는 역사적 사건이 있습니. 그 다음에 오순절이라고 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습니. 이 부활절과 오순절은 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부활절라고 하는 것은역사적 사이고, 오순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마음속, 심령 속에서 어나는 주관적인 사다. 래서 부활절이 없는 오순절을 생각한다면 이건 단한 신비주의 운동에 불과합니다. 주관다. 오순절 없는 부활주일을 생각다면 그것은 이성주의에 불과합니다. 하나의 역사적 사을 는지식에 불과합다. 이것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이 합질 때 이것을 '부활앙라고 합니다. 부활사건과 부신앙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내 속에서 확실한 부활앙으로부활 될 때 거기에 명의 역사가 있는 것이에요.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 사도베드로는예수를 세 이나 모른다고 한 사람 아닙니까
아주 초라하기 그지는 사람이지요. 부끄웠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용기를 내는 것입니까
어떻 해서 새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 성경은 여기 저기 이 사실 증거해줍니다. 전 4장 13절에 보면 그들이 예수의 생애에 동참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예수님 전에동안 같이 니다. 모르는 것도 많고, 모르는 얘기가 많았겠지요. 믿기도 하고, 안 믿기도 고.. 여하튼 예수님과 함께 3 동안 생활을 같이 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거기 이한 람들로 키워낸 것입니다. 거기서 신앙적 오엔테이션을 받은 것이에요. 그것은 부인할 없습니. 예수님의 생애 속에 3년 동안 함께 했다는 것! 그 음에는 부활사건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됐다는 니다.
직접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이 너무 중요한 것니다. 다 믿지 못하고 다 지 못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그 감격, 그 사건 그들의 마음에이 뿌리박게 됩니다. 대단히 중요 것입니다. 'Christian Century'라고 는 기독교 잡지에편집장이던 마티목사라고 하는 분이 젊었을 때 교회 주일학교 3학을 맡고 있었다고 합다. 부활절 때입니다. 아이들에 부활신앙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빈 상자 하나씩을 주서 게"새 생명을 담 오너라." 했답니다.
그랬더니 어떤 아이는 가만히 생하다가 거기에 계란을하나 어오고, 어떤 아이는 꽃을 넣어오고, 어떤 아이는 나비, 어떤 아이는 종자를.. 이런을넣어 가지고 와 자기 나름대로 "이것이 새 생명입니다." 라고 가지고 왔랍니다. 그런데 브 라고 하는 아이 하나는 상자를 열어 보니까 빈 상자에요. 너는 어째서 아무 것도 가져오지 않았느냐" "예수님의 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 말에 이 목사님이 젊었을 을받았다는 것니다. 여러분, 생명을 증명할 증거가 있습니까 생명은 로지 생명으로만 증거하는 이에요. 생명은 여전히 신비입니다. 당신들의 생명이만 당신 스스로의 생명을 지하는 겁니다. 내 육체도 내가 설명을 못합니.
그런데 가장 중요한 생명은 예수의 부다. 활은 예수그리스도의 사건, 그 하나 뿐입니다.
어느 것 비유가 될 수 없고, 어느 것도사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놀라운 생명은 부활생명일 입니다. 예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 이것이 바로 거란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그렇습니다.
부활사건 역사 한가운데 딱 한번있 사건입니다. 쓸데없는 논리를 추구할 것도 없고 잔머를 굴릴 필요도 없습니다. 부은대로 생명일 뿐이니까요. 모든 증명, 과학적 거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그가건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이 성령의 역사 안에서 그들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갑니. 주이활하셨다는 것은 내가 부활한다는 것입니. 주님이 죽으신 것은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이요. 그의 부활은 곧 내 부활이요. 런고로 사도 바울은 유명한 말을 합니다. "그는 첫매가 되셨다." 생명의 세계로 을 연 것입니다. 신학자의 용어를 빌리면 문을 연 것입다.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다. 그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요. 이것을 믿게 될 때 탄이 터지는것은 용기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사행전입니다. 여러분, 로마를 방문하십니까 로마를다말로 설명할 수 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카타쿰'입니다.
는 고향 생각을해서 우리 향에는 산에 굴이 많아요. 어렸을 때 굴속에 들어가서 오지 못해 고생도하고... 이 많아서 그 생각을 했어요. 산 속에 굴이 있어서 그에 숨어서 예수 믿는 사람. 전혀 그것 아니에요. 시내 한가운데 평지에 있을 뿐만 아니라 자적인 굴이 아니라 인공인 이에요. 사람들이 파 들어 간 것이에요. 그리고 역사가의 설명대로 보면 얼마든지 도망갈 있었어요. 누가 키고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그들은 그 카타쿰 속서 살았어요. 왜 부활신 때문이에요. 유무상통 했습니다. 내 것을 내 것이라 할 것도 없고, 세상서 잘 짓고, 옷 잘 입고, 권누리고...아무 소용없어요. 그들은 카타쿰 속에서 깨끗하 공동적로앙생활을 하다가 주님 앞에 가기를 소원습니다. 이것은 부활신앙 아니고는 전혀 설명할 없 부분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행전을 읽 나가면 사도들의 용기가 있고는 덕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직 부활앙으로만 설명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살아 계신 님을 믿었습니다. 오직 살아 신 그리스도 'Living Christ' 오늘 살아 계신 그리도의을금 체험하게 될 때 욕심은 사라졌습니. 세상 화려하게 살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얼 시간을 살던 이 복음을 증거 다가 주님 앞으로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초대 회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부활사건을 통해서 부활신앙을 얻고, 부활신앙이 간간 어려움을 당할때 다시 부신앙이 부활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때 오 성경에 보면 성령이 만때 성령의 역사가 임할 때 활신앙이 다시 솟아나요. 또 하나는 핍박 속에서... 참 상합다. 안할 때는 아무래도 신앙이 약해집니다. 박을 받아야, 적당하게 핍박을 받아야 또 간 운박을 받아야 제정신이 돌아옵니다. 신앙 역시 마찬지입니다. 핍박 없는 신앙생활이라는은 맥 빠진 것이에요. 사도들이 핍박을 받 되니까 반 역동적으로 점점 강해집니다. 환한굴에 천사의 얼굴에 그 용기... 기없이 말을 하구요. 그 뿐만 아니라 매를 맞고 죽어가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누구 말을 들어야 옳으냐" 큰 소리칩니다. 이것은 핍박 속에 그이험한 그리스도의 위대한 생명력입니다. 이것 아셔야 합니다. 이것은 핍박 속에서만 얻을 있는 이에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히틀러 때에 순교게 된 보네코라고 하는 목이계시지 않습니까 그가 지막으로 쓴 편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제 나의 여 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감옥에 저는 기뻐하는 법을 배웠습. 이박 속에서 기뻐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형장으로 끌려가는 그 시간에도 말합니다. "써 끝다. 그러나 이것이 내 생명의 시작이다." 핍박과 환난 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을확실하게 체험하고 활신앙이 부활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확신하게 때 이적이 게 됩니. 많은 이적이 나타납니다.
베드로 앞에서 나면서부터 앉뱅이 된 사람이 일어납니다. 수의 살아 계신 이름이 살아 역사 하는 것을 보면 그는 새로운 용기를 얻게됩니다. , 우리가 많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제야말로 부활신앙의 부활이 있야 할 단계입니다. 부활사건에 대한 논리, 그 과학적 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부활신앙입니다. 이확실해질 때 미래 보입니다. 종말이 보입니다. 현재가 보입니다. 내가 떤 존재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 것이 보입니다. 또한 내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도 하게보입니다. 부활신앙 새로운 부활의 역사가 이 아침에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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