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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의 주님을 만나라 (요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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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복된 부활의 주일 주님의 전에 나아와 예배하시는 여러분들과 여러 분의 가정 그리고 경영하시는 모든 일들 위에 항상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이 십 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구원을 완성하셨다면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그 구원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것은 예수 부활과 부활의 주님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볼 때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부활 주일을 그저 1 년에 한번 있는 연례행사 정도로 생각하고 그 기간 동안에는 예수님이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 하셨다고 찬양을 하고 말씀도 듣고 하지만 나머지 기간 동안은 예수 부활과는 관계가 없는 삶을 살던 시대를 보십시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이 메시지가 부활주일 을 위해서 읽어야 하는 하나의 대사로 전락해 버린 시대에는 교회의 등불이 가물가물 하게 꺼져 갔고 많은 성도들 이 세상에 유혹되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생명을 상실한 어두운 시대가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부활'을 외칠 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날마다 고백하고 자랑하고 찬송하며 그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많이 일어났던 시대에는 교회의 등불이 이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 어두움을 몰아내는 대부흥의 역사들이 일어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믿음으로 만나고 느끼고 감격 하는 체험적인 부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절대 연례 행사처럼 치르고 잊어버리면 안됩니 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번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 각합니다. '예수 부활'을 고백하는 나의 믿음이 '부활의 주님'을 고백하는 나의 믿음과 일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여기에 비해 부활의 주님은 현실적인 사건입니다. 예수 부활은 지적인 내용인 반면에 부활의 주님은 체험적인 신앙입니 다. 예수 부활을 이야기하는 자는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지만 부활의 주님을 이야기하는 자는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둡니다.

 예수 부활은 주님이 묻히셨던 무덤을 주목하게 만들지만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 시는 주님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이 둘은 절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부활과 부활의 주님은 하나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양면인 것입니 다.

그러나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예수 부활만 믿고 예수 부활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끝날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성경을 잘 압니다. 내용을 환히 꿰뚫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에 대해서 성경 어디 어디를 찾아보면 된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 에게 있어 예수 부활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자칫 입술만 가지고 예수님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형식적인 신자가 되기 쉽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입으로는 예수 부활을 말하지만 실 제로는 예수님이 아직도 무덤에 누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기와 아무 교제도 안 나누고 자기 삶을 다스리지도 않으며 간섭하지도 아니하며 자신에게 어떤 헌신도 요구하지 않는, 무덤에 누어 있는 시체처럼 취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진 정한 기독교의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주님을 믿는 믿음이 따라 와야 합니다. 그를 날마다 만나는 체험이 있어야 됩니다.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 백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영광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듣는 귀가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의 영광을 느끼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못 박히신 그 손을 영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영의 손으로 만져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과 사랑을 속삭여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삶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안 변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십시오. 아니 가깝게 우리 교회 안을 보십시 오.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벤허라는 영화를 보신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꼭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벤허>라는 영화의 원작소설을 쓴 월러스(Wallace)라는 사람은 그 소설을 쓰기 시작 할 무렵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자였습니다. 그가 알고 있 는 것이라고는 그의 친구가 들려준 한 마디 뿐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얼마 후에 이 세상에 서 존재를 감추고 우리의 기억속에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벤허>를 쓰기 위해서는 그 배경이 되는 시대를 알아야 했기에 성경을 읽 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던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일어났던 변화를 고스란히 벤허라는 주인공 인물에게 투영시켰습니다. 벤허라는 사람은 원래 칼과 창으로 민족을 해방시키겠다고 하는 사람이었 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 리스도십니다. 이 예수님을 만난 후에 벤허가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그 영화의 해피 피날레 (happy finale)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 치고 변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1.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슬픔이 사라진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20장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변화된 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 합니다. 먼저는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부인과 이름이 밝혀지지 않 은 몇몇 여인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다른 열 명의 제자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열 명의 제자들 외에도 무명의 제자들 이 여러 명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 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도마라는 제자가 나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부 활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만났습니다. 만난 다음에 그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사실을 확인해 보면서 '나는 어떤가 나는 입으로 예수 부활은 외치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다움이 나에게 있는가 예수님을 날마다 만나면서 그 분과 교제하 면서 사는 증거가 나에게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 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도와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봅시다. 그는 슬픔에 빠져 있었던 여인입니다. 누가복음 23 장 27 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향하실 때 그 뒤를 따라간 무리들 가운데는 가 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섞여 있었다고 했습니다. 가슴을 치면서 슬퍼하는 여자들의 무리속에 이 막달라 마리아가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 이 처참하게 죽는 모 습을 보면서 누구보다도 슬픔을 가누지 못한 여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사 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클수록 슬픔은 더 커진다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흘 전에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와 또 몇몇 여인들이 죽은 예수님의 몸을 씻기고, 향료를 그 몸에 덮고, 베옷을 감아 장사지냈습니다. 그리고는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그 손에는 향유가 들려 있었습니다. 장사지낼 때 좀 부족했다 싶은 부분을 자기 혼자라도 가서 어떻게 해보려고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슬퍼하며 울고 있었습니다(11절). 그는 슬픔의 여인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를 찾아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그랬더니 마리아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당신이 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으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주세요. 내가 가서 다시 가지고 오겠나 이다." 그때 예수님은 "마리아야!"하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평소에 자주 듣던 그 음성이었 습니다. 바로 주님의 음성이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야!"하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마리 아의 표정이 어떻게 변했겠습니까 그가 어떤 식으로 반응을 했겠습니까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슬픔이 가득하던 얼굴이 기쁨으로 활짝 피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던 그 눈에는 기쁨이 충만하여 광채가 났을 것입니다. "선생님"하는 그의 모습을 한번 그려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자 마자 마리아의 슬픔은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시편30:11에 있는 말씀대로 그의 슬픔이 변 하여 춤이 되었습니다.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띄우시는 축복을 마리아가 체험한 것입 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 예언한 그대로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시는 축복과 희락의 기름으로 슬픔을 대신하게 하는 큰 은혜를 그가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은혜를 자주자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무덤에 가서 시신을 찾던 여인에게 기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슬퍼하며 통곡할 수 바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는 기쁨과 감격에 차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죄인들 앞에는 죽음과 절망, 슬픔과 고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 화될 줄 믿습니다. 우리앞에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권세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슬 픔과 고통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3일만에 죽음의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우리의 삶에 소망이 생깁니다. 영생을 얻습 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영원한 생명을 보장하여 주셨습니다. 죽음이 전부가 아니라 죽음이후 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마리아처럼 부활하셔서 살아 계시고 나를 찾으시는 예수님을 날마 다, 아니 순간마다 만나서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이 슬픔 많은 세상을 이기고 얼굴에 웃음을 띄고 살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어떠한 환경가운데에서도 일어서서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 다.

 여러분, 어느 대학교수인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오래 전에 믿었기 때문 에 성경에 대해서,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알만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자 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성경의 내 용을 비판하고 따지는 것을 능사로 알고 있었던 약간 교만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만에 부활하셨다고 하는 소위 십자가의 사건을 알고 있었 지만 그것은 단지 과거형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형으로만 알고 있었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십자가 사건을 이천 년 전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으로 의심하지 않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1년 전 에 그의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1년 가까이 된 지금까지 남편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끔찍한 고난과 아픔을 통해서 살아계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고난을 통 해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는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의지 하고 사는 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날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가운데 영의 귀를 열어 놓 고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신앙생활을 하신다면 그 슬픔과 눈물을 딛고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슬픔의 골짜기입니다. 이 슬픔을 우리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 신 주님을 날마다 만나면 이 슬픔 가운데서도 기쁨을 찾게 됩니다. 영원한 소망을 갖게 됩 니다.

 2.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공포가 사라진다

다음으로 살펴 볼 것은 열 명의 제자들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렸고, 도마는 외출했다가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모두들 공포에 짓눌려 있었습니 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던 것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 충분히 상 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한참 인기를 끌고 많은 사람들이 환호할 때는 제자들도 우쭐거 렸고 굉장히 기분이 좋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가졌 을 것입니다.

 그때는 겁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의지했던 선생님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감과 용기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군중 은 간사합니다. 한때는 그렇게 "호산나"하고 열광 했었지만 예수님이 맥없이 십자가에서 처 형되는 모습을 보자 군중들은 한순간 돌변해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공포 분위기가 제자들의 주변을 점점 조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도 저렇게 비참하게 죽이는데 제자인 우리를 가만 두겠느냐'는 생각이 들자 말할 수 없는 공포감이 밀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 불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을 찾으셨습니다.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 다." 살아 계신 주님이 눈앞에 서 계시면서 "샬롬"하시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 해 보십시오. 그들의 축 처져있던 어깨가 힘을 얻었을 것입니다. 가슴을 가위누르고 있던 공 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안이 찾아왔을 것입니다. 세상 그 누구도 두렵지 않은 용기 가 샘솟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샬롬"하시고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나는 유령이 아니다. 내 손을 보라. 내 옆구리를 보라." 제자들이 그래도 의심하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는 "너희에게 먹을 것이 없느냐 가지고 와보라."고 하시고는 제자들 앞에 서 잡수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부활하신 몸인 것을 제자들에게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으로) 보내노라"(21절). 그 다음에는 그들을 무장시켰습니다. "성 령을 받으라. 너희들이 나가서 하나님의 용서를 외치면 그 용서를 받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 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도 받지 아니하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으라"(22-23절). 그들을 영적으로 무장시키신 것입니다.

 그 결과 제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며 고문하던 공포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담대해졌습니다.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세상은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마음속에 은근 한 공포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정말 무서운 곳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본능적인 공포 가 있습니다. 공포가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욥이라고 하는 위대한 믿음의 선진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 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 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욥3:25). 욥은 부자입니다. 성공한 사 람입니다. 십 남매를 거느리고 누가 보아도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있는 동양의 최대 갑부요, 인격자요,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와 같이 형통한 삶을 살 때에도 그의 마음속에는 두려워 하는 무엇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던 그것 이 갑자기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두려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서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때 미국 주요 신문에 칼럼 리스트로서, 상담가로서 명성을 떨쳤던 분이 한 달에 만 통 이상의 편지를 독자로부터 받았답니다. 한번은 기자가 그를 찾아와서 그 만 통 넘는 편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공포였습니다. 어느 청년지도자가 앙케이트를 조사했는 데 지금 우리 나라에서 20대 대학생들과 대학을 졸업한 20대 후반기에 있는 젊은이들을 가 지고 있는 문제들 가운데 가장 심각한 문제 다섯 가지를 꼽으면 공포를 제일순위로 꼽았다 는 것입니다. 겁없이 인생을 살 것 같은 젊은이들에게 제일 큰 문제, 곧 가장 많은 젊은이들 이 고심하는 문제가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장래 문제를 놓고 은근히 마음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취직을 해 야 되는데 앞으로 어떤 직장에 취직을 해야 되는가'하고 걱정하다 보면 불안이 쌓이고 공 포가 된다고 합니다. '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암이 걸리면 어떻게 하나' '죽으면 어떻게 하 나' '이렇게 같이 공부하고 다 졸업을 하지만 나중에 2,30년 후에 내가 성공하지 못하고 밀리면 어떻게 하나' 이런 가지각색의 생각을 하다 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 불안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포에 시달리는 젊은이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는 세계 건강 식품 업계와 보따리 장사꾼들의 노다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에 좋다 하면 개똥을 들고 나와도 갑부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나라가 건강 식품을 수입하는데 쓴 돈이 1조원을 넘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에 공포가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두려움 이 있는 것입니다. '병에 걸리면 어떻게 하나 쓰러지면 어떻게 하나 몸이 약해서 내가 하 던 일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데 대한 불안과 공포가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요즈음 나라 경제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 이 위기 의식을 느낍니다. 이럴 때 우리 모두 마음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부활 주일을 통해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부활하셔서 오늘도 살아 계시고 나와 함께 인생을 걸어가시는 주님을 날마다 만나면 그 모든 공포를 쫓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평안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주가 되셨습니다.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켜 주 십니다. '어떻게 살까, 앞날이 어떻게 될까' 하는 불안때문에 잠못이루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그 마음에 평안을 주시고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요 한복음 16장 33절을 보십시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 통도 당할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핍박당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슬픔을 이기지 못 하고 공포에 짓눌려 고생할 때도 있을 것이다.' 주님은 그 모든 상황을 인정하십니다. 그러 나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그 모 든 상황에도 담대할 수 있는 한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인간의 슬픔을 완전히 발로 밟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 스도 그분이 우리의 보호자가 되시고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며 날마다 우리와 만나 주시는 사람이 된 이상,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좌절당할 수 없습니다.

 "샬롬. 평안이 있을 지어다." 하시는 주의 음성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날마다 듣는다면, "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무릎 꿇고 기도하는 가운데 들을 수 있다면, 살아 계신 그분의 손을 보고 살아 계신 그분의 가시관 쓰시던 그 머리를 우리가 우 러러 볼 수만 있다면, 우리 마음에 있는 공포는 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그 공포를 흩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설교를 듣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마 음에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체험되는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이와 같 은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3.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진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도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열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 났을 때 무슨 일로 나갔는지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못 만났습니다. 그 런데 그가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고 떠들 어댔습니다. 더욱이 25절을 보면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에서 '이르되'라는 말은 현 재형 동사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 동사는 계속과 반복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열 제자들이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앞 다투어, 거듭해서 그에게 말을 했던 것 입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 도마가 약간 기분이 좀 상했던 것 같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필 내가 없을 때 찾아오셨지 왜 나만 빼놓고 예수님이 찾아오시냔 말이야.' 자기가 부활하신 예수 님을 보는 그런 황홀한 순간에 빠져 있었다는 그것때문에 약간의 거부 반응이 생긴 것입니 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으로는 동의하지만 자기가 좀 피해를 보았다 싶으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도마 역시 이와 같은 자세를 취했던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자기가 만든 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이 잣대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 으면 자기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노라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잣대가 무엇입니까 25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 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집어넣어 보아야만 믿겠다." 그는 보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반드시 그 못자국에 손을 넣어봐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의심하겠다는 것입니다. 회의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일수 록 회의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 있는 것들 중에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 얼마나 됩니까 이 세상에서 공식을 가지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극히 드뭅니다. 더욱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더더욱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5백여명의 사람들에게 만 보이시고 그 다음에는 아무에게도 보이시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예수님을 본 사람들에게 가서 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믿게 하신 것입니다. 31절을 보 십시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 요한이 왜 요한복음을 기록해 놓고 일일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본 그대 로 기록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본 사람들의 증거를 듣고 믿어 영 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몸을 일일 이 개인마다 찾아다니며 보여 주시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으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나름의 합리적인 잣대를 고집하며 믿기를 거 부한다면 그는 구원 받기가 어렵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의심을 가지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아직도 자기도 모르게 자꾸 회의적인 생각 때문에 끌려 다니는 분이 계십니까 도마처럼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도마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28 절). 예수님은 도마보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7절).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들은 도마는 그 때부터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결국은 수십 년 후에 인도에 가서 복음을 외치다가 순교하는 자리까지 갔습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 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회의적인 사람일수록 이 예수님을 만나셔서 "믿음 없는 자가 되 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주의 음성을 날마다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자신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심이 사라지고 확신이 찾아듭니다. 소망이 없는 자가 소망을 갖게 됩니다. 방황하는 자가 분명한 인생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믿음을 가진 자의 세계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온 세상이 캄캄하고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 지만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가지고 보는 자의 눈에는 소 망이 있고, 미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신앙을 이야기하면서 살아 계신 주님과 만남으로 인해서 날마다 자신이 변화되는 모습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됩니다. 공포가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찾아 옵니다. 용기가 생깁니다. 어떤 때는 의심 때문에 흔들릴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 나를 꽉 붙 들어 주심으로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은혜를 우리가 체험합니다.

 그런 은혜를 체험하면서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자꾸 변합니다. 물론 어떤 때는 별로 달라 지지 않은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변화가 분명 일어납니다. 여러 분,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슬픔이 떠나갑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공포를 이길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납시다. 의심을 물리치고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축복을 날마다 누리면서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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