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빌라도에게 고난 받으사 (눅 23:13-25)

첨부 1


사도신경에 대표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마리아와 빌라도입니다. 이들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점에서 대조적일 뿐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그들의 위치와 존재 의미에 있 어서 전혀 반대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므 로 하나님의 구원사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신의 야망과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 기 위해 세상과 야합하므로 예수를 거부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고 예 수의 잉태를 받아들이므로 모든 것을 얻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를 거부하므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지극히 존귀한 인간성을 대표합니 다. 그러나 빌라도는 하나님의 은총을 거부한 비참한 인간성을 대표합니다.

 빌라도는 AD26-36까지 팔레스타인을 다스린 로마 제국의 제5대 총독입니다. 그는 로마 총 독으로서는 유일하게 예수를 직접 대면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빌라도 는 로마기를 거룩한 도시로 가져와 유대인들을 불쾌하게 했다고 말해 줍니다. 그뿐만 아니 라 그는 로마 신들의 이름과 형상이 조각된 황금 방패를 성전 안에 걸기도 했고, 수도를 건 설하기 위해 성전세를 전유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빌라도 치정하에서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로마 병정들이 그들을 살해하는 잔인한 일까지 자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눅 13:1)

그 당시 유대는 로마의 통치지역 가운데 시리아 지역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시리 아 지역에 속한 유대 지역 행정 대리인으로 있으면서 그 지역 행정 책임과 재판권을 맡았습 니다. 본래 그의 근무처는 가이샤라 빌립보에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에 예루살 렘에 와 있을 때 예수께서 유대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받으신 뒤 빌라도에게 끌려오게 되 었습니다. 그 때 빌라도는 예수를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소한 죄목은 모두 세 가지입니다.

○ 예수는 민중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

○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했다.

○ 자칭 왕이라고 했다.

 빌라도는 예수의 사건을 다룰 마음이 없어 그때 역시 예루살렘에 와있던 갈릴리 지방의 영 주인 헤롯 안디바에게 예수를 보내 그에게 사건을 떠맡기려 했습니다. 헤롯은 오래 전부터 예수의 소문을 듣고 보기를 원하던 차에 예수를 직접 뵙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뵙기를 원했던 것은 인간적인 호기심에서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호기심을 충족시 켜 주지 않자 조롱하고 모욕한 뒤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본래 빌라도와 헤롯의 사이 가 좋지 않았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두 사람의 사이가 친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세상의 왕들과 통치자들이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에 대해 모의를 꾸몄다는 시편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시 2:2)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의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기력하게도 예수를 십자 가에 못박으라는 군중들의 압력에 무릎 꿇었습니다. 빌라도는 자신의 권좌를 유지하기 위해 예수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국 빌라도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요세프스에 의하면 빌라도는 자살로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빌라도에 관한 전설 두 가지가 있습니다.

빌라도는 당시 로마 황제였던 디베리우스에게 자신이 심문했던 예수의 행적, 그가 운명할 때 일어났던 놀라운 일들에 대해 자세히 보고했습니다. 그 보고를 받은 디베리우스 황제는 빌라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네가 보고 한 대로라면 그는 유대인의 왕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너는 당연히 그를 죽이 지 말고, 안전하게 나에게 데려 왔어야했다."고 했습니다.

그후 빌라도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고 나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와 제 옆에 서있는 제 아내 프로클라(Procla)를 사악한 유대인들의 수에 넣어 계 수하지 말아 주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는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렸습니다.

"모든 세대와 모든 이방의 가족들이 너를 복되다 할 것이다. 왜냐하면 너의 날에 나에 관해 예언된 모든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너는 내가 다시 올 때 나의 증인으로 서야 할 것이 다. 그때 나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와 나의 이름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들을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빌라도는 자살하였고, 그의 아내도 함께 죽었습니다.

 다른 하나의 전설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스위스의 루체른이라는 도시는 매우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그 도시에 필라투스(Pilatus)라는 해발 2121m가 되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필라투스라는 이름은 구름으로 덮여 있다는 의미 입니다. 이것은 빌라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황제 디베리우스가 병들었습니다. 그는 빌라도에게 그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해 예수를 로마 로 보내 달라고 사자를 보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는 이미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고 고백 했습니다. 사자는 예루살렘에 사는 베로니카(Veronica)라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와 관련된 전설의 주인공으로 친절하고 자비심이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베로니카는 예 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향해 가시면서 땀을 흘리는 것을 목격하고 그의 손수건을 예수께 건네주었습니다. 예수께서 그 손수건을 다시 베로니카에게 주었을 때 그 손수건에 예수님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가 디베리우스 황제의 사자에게 그 손수건을 주었습니다. 디베리우스는 그 손수건으로 병이 나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디베리우스는 빌라도를 심문하기 위해 로마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때 빌라도는 예수님이 입었던 솔기없는 옷을 입고 디베리우스 앞에 나타났습니다. 빌라도의 모습을 보는 순간 빌라도에 대한 디베리우스의 분노는 다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빌라도를 보냈습니다. 그 후 다시 빌리도를 불러 그의 옷을 벗기고 그에게 사형을 언도했습니다. 그후 즉시 빌라도는 자살했습니다. 디베리우스는 빌라도의 목에 맷돌을 달아 티베르(Tiber) 강에 던졌습니다. 그 러자 곧 풍랑이 일고 비바람이 일어났습니다. 다시 그 시신을 건져 비엔나로 보내 로네 (Rhone) 강에 던졌습니다. 역시 똑같은 재난이 일어났습니다. 마지막으로 루체른(Lucerne)으 로 보내 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연못에 던졌습니다. 그 연못은 아직도 거품이 일고 끓고 있 다고 합니다. 그 연못은 필라투스 산에서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빌라도와 관련된 이러한 전설에서 우리는 빌라도 치정 때에 빌라도가 예수의 사건에 분명히 연루되어 있었다는 확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설을 통해 예수의 사건이 공허하게 지 어낸 이야기가 아닌 지난 역사의 한 시점에 분명히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 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빌라도가 등장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초대교회 때부 터 사도신경에 빌라도의 자리를 확보해 두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매우 깊은 신학적인 배려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역사적인 관계성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고백에 서 무시간적인 일반 역사를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일반 역사의 한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펼쳐졌다는 사실을 중요시 합니다. 그 구원사가 펼쳐진 그 때와 그 시대 상 황은 도저히 무시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반사 자체 때문이 아닙니다. 그 때에 있었던 하 나님의 구원의 사건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일반 역사가 중요시 됩니다.

 한 자연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안으 로 받아들여지고, 하나님의 백성의 계약의 역사 안으로, 해방의 역사 안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역사는 저 피안의 세계에서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역사에 서 일상적인 삶의 상황 안에서 전개됩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의 자리가 확보되어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해방의 역사가 이 현실의 역사 안에서 분명히 펼쳐졌습니다. 그것을 보증해 주고 확증해 주는 것이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분명히 역사적 인 인물입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 의미는 신앙과 역사의 관계에서 구원사의 시간을 확증시켜 주는 의미 가 있는 동시에,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에는 거 룩하고 순결한 동정녀 마리아와 같은 사람만 관련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구원사의 무대에 지성인이나, 엘리트나, 신분이 있는 사람만이 출현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 서의 족보에 나타난 대로, 변변찮은 여자들과 남자들이 구원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신앙은 역사를 꾸며 내거나, 비현실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 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안에서 현실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다시 이해해 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와 연관되어 주목해야 할 중요한 의미 한 가지 더 있습니 다. 그것은 빌라도는 자연인이 아니고 그 시대 세상을 지배하던 로마의 권세 아래서 한 지 역을 다스리던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사도신경에 정치적인 영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는 "위로부터 온 권세"를 불행하게도 그 본래의 목적대로 사 용하지 못하고 잘못 오용했습니다. 빌라도라는 한 인격에서 위로부터 온 권세는 매우 왜곡 된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는 그 시대 로마에 항거한 열심당원도 아니며, 무정부주의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난 한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소식을 전한 구원자였습니다. 빌라도는 질서를 수호하는 자로서 그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르게 세우는 정의의 편에 서지 못하고, 오히려 그 질서를 파괴하는 불의의 세력과 손잡으므로 그의 권좌를 유지해 가려고 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빌 라도에게서, 또는 밑에서라는 말에는 이러한 정치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고난 받으사"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의 통치 아래서 그들에게 시달림을 받으며 살았다거나 우울증 환자로, 금욕주의자로, 염세주의자로 살아가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현실의 역사에서 어떤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셨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섬김의 삶으로 그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은 예수의 삶이 무엇을 목적으 로 하는 삶이었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예수의 고난의 삶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고난, 실패, 죽음의 현실에 내버려두시지 않으셨다는 것을 확증하게 됩니다. 예수의 고난에 서 우리는 우리의 고난의 삶의 현실로 찾아 오셔서 우리와 함께 연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믿으면 고난, 질병, 죽음에서 면제받는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고난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게 하고, 그 고난의 현장에서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 빠지지 않 고 하나님과 함께 승리해 가는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시하는 회개는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삶에서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의 책임 과 죄를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가 고난을 받으셨다는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를 비참한 현실에 내버려두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고난 가운데 혼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무관심 하고 무정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운명으로 받아 들이거나, 고난 가운데서 자기 학대를 하지 않습니다. 고난 가운데서 희망을 갖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독교 신앙에서 구원의 근원은 인간 스스로 심신의 수양을 쌓아서 신비의 경지에 도달해 가는 무 시간, 무 역사에 근거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지 난 날 역사의 한 시점 빌라도의 치정 때에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를 해방의 삶으로 부 르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의 삶의 역사는 새롭게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 역사 안에서 새 로운 생의 패러다임을 갖게 되고, 삶의 새로운 원리들을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게 됩니 다. 우리는 그 역사 안에서 낡은 것들을 하나 하나 벗어놓고 새로운 문화의 옷을 갈아입어 가게 됩니다. 그 새로운 역사의 지평에서 우리는 이 현실을 넘어서 영원한 본향을 우리의 생의 목적지로 삼게 됩니다.

 이 현실의 역사 안에서 전개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지평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창 녀도 있고, 마태와 같은 세리도 있고, 베드로와 같은 어부도 있고, 바울과 같은 박해자도 있 습니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서 라합과 같은 기생도 있고 다말과 같은 여인도 있습니다. 이들 모두 이 현실의 역사의 그 어느 한 때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빌 라도는 이 구원사에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그 스스로 이 때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역사의 한 시점에서 예수를 직접 대면한 빌라도는 예수보다는 자신의 야망과 안전을 더 중 요시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와 함께 그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현재와 영원 모두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며, 자신 이 구원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께 서 자기를 위해 약속하신 새로운 삶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거부하는 것은 참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은 누구나 그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의 생의 여정에서 의도적이건 우연이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초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그 때의 선택은 그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