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과 성전의 비교비유 (요 02:13-22)

첨부 1


비유(parabole)란 “나란히 던진다”는 뜻이다. 하나의 신학적, 영적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지상적인 상황을 빌어서 예증한 교육 방편이라 할 수 있다.
(마13:35)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비유는 풍유와는 달리 이야기의 상세한 모든 부분에 의미를 부여하기보다 한가지 진리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지닌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천재적인 상상력을 동원하여 비유를 묵상함도 오히려 비유연구에 거침돌이 될 수가 있다. 단순한 통찰력을 가지고 기도와 상식으로 접근함이 보다 밝은 성령님의 조명을 경험할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사건은 두가지 견해로서 첫째는 고난주간의 입성, 둘째는 제자와 첫입성으로 보고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첫날, 즉 고난주간의 월요일에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21장에 마가복음에서는 11장에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19장에 소개되는 이 사건이 요한복음에서는 2장에 소개되는 이유는 이 사건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보다 영적인 해석을 많이 한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복음서를 공관복음서 라고 하고 4복음서하면 요한복음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는 판이하게 다른데, 요한의 특유한 영적인 해석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록연대도 AD 85-90년경으로 다른 복음서보다 늦게 쓰여진 요한복음의 관심은 하나의 사건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그 사건의 의미를 해석하고 재조명하는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모두 성전을 정화시킨 사건으로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돈 바꾸는 자 그리고 비둘기나 양을 파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고 마태와 누가에서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고 하시고, 마가에서는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함으로 이 기사를 마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독 요한복음에서는 이 사건을 다루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요한의 신학적인 특성, 즉 영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의 관점을 볼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재해석 하여야 합니다. 도대체 이 성전을 헐라는 것은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하는 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Temple Jerusalem 은 역사가 있는 성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최초의 솔로몬 성전과 학개와 스가랴에 의한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예수님 시대의 헤롯성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후에 480년만에 솔로몬왕에 의해서 7년동안 지어졌습니다. 나무는 레바론의 백향목을 곧고, 청동은 아라바에 있는 솔로몬 동광및 제련소에서 만들었고, 금과 상아는 멀리 남쪽에서 가져와서 지었습니다. 수만명이 동원된 이 공사는 엄청난 공사였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은 대단히 화려한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은 현관, 성소, 지성소로 이루어졌는데 현관은 성전 내부로 통하는 입구이며 성소는 길이 18m 폭 9m 높이 14m 였고 지성소는 사방 9m의 입방체형이었습니다. 사면의 돌벽은 급박한 백향목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성전 내부에는 12개의 황금등대, 12개의 진설병 책상, 분향제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 내부에서는 황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지성소 내부에 사용된 순금만도 2천만불이나 된다고 합니다. 못도 금으로 사용했고 사방에는 보석으로 장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화려한 성전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그리고 남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때 성전도 함께 파괴되었고 약탈당했습니다.
그러다가 BC539 년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2세가 바벨론을 정복하고 포로된 이스라엘을 귀환시켰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성이 있는 본국으로 돌려보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본국으로 돌아와서 BC 516년경 제2의 성전 스룹바벨성전을 지었습니다. 이 성전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솔로몬 성전을 이어받은 솔로몬 성전의 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 성전 역시 솔로몬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을 계승, 발전시켰습니다. 46년간에 걸쳐 지어진 예루살렘 성전, 헤롯성전은 역사가 요세푸스와 미도트에 의하면 화려한 성전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벽돌은 금으로 장식되었고 보석으로 치장하였습니다. 이렇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성전을 헐라고 하시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러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할 수 가 있습니다.

첫째는,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을 헐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17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예수님께서는 주의 전을 사모함이 없이 들락거리는 무리들의 형식적인 신앙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배하는 자의 마음의 중심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사야 1:12에서도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그러한 껍데기 신앙의 성전을 헐어 버리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어서 13절에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노라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신 것이 바로 형식적인 종교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지금도 <형식적인 예배>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우리의 예배는 어떠합니까
우리의 예배에 참다운 기쁨과 감격 그리고 삶의 새로운 결단과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러한 예배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뒤돌아 보아야 합니다. 얼마나 주의 전을 사모하는 심령으로 예배에 참석하십니까 얼마나 형식적이 아닌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며 나를 드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새소망과 은총과 말씀을 흡족히 받고 돌아가십니까
감격적인 예배가 매 주일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통해서 샘솟는 기쁨이 우리 안에 충만히 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습관적이고 무기력한 예배의 자세를 다 헐어 버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물질만능주의를 헐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 보면은 이들은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만연되어 있던 물질주의는 당연히 헐어버려할 것이었습니다.
매년 유월절이 되면 순례자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성전을 모였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성전에 들어오면 두 가지를 먼저 했습니다.
첫째는 화폐를 사용하기 위하여 환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 바꾼 돈으로 제사 드릴 제물을 비둘기나 양등을 구입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그들이 엄청난 폭리를 취하였다는 것입니다. 환전을 하면서 폭리를 취한 것은 물론 제물도 10배나 비싸게 팔았습니다. 순례자들이 제사드리기 위해 집에서 잘 키운 제물은 판정관이 불합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판정관은 이 제물이 흠이 없고 하나님 받으시기에 합당한 가를 판단하는 성전의 관리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부패했습니다. 집에서 가져온 것은 아무리 온전해도 불합격 판정을 내렸고 성전에서 파는 것만을 합격 판정을 내렸습니다. 성전이 물질주의와 한 짝이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10배나 비싼 제물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본문 말씀 그대로 강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으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서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이 이렇게 분노한 것을 찾을 수 가 없습니다. 채찍을 드시고 상을 뒤엎으시고 이들을 모두 내어 솟으셨습니다. 우리는 결코 물질만능주의가 성전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헌금 액수가 아니라 옆전 두닢을 정성껏 드린 과부의 그 마음을 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분파주의, 분리주의를 헐어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성전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바리새파냐 사두개파냐 엣세네파냐 하는 당파와 파벌로 진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한 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개인주의, 배타성, 독선을 모두 허물어 버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서 한 몸을 이루는 한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차차 우리는 조심하지 아니하면 배타성을 띠기가 쉽습니다. 유대인이나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배타성이 오늘 우리 교회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독선과 배타성을 허물어 버리는 결단이 우리 안에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그 속은 강도의 굴혈이 되어 형식적이고 물질적이고 배타적인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이 성전이 46년 동안에 지어졌는데 네가 무슨 수로 3일 동안 일으키겠냐고 반문하였습니다. 본문 21절말씀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결국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고난 당하시고 못 박히시고 죽임을 당하시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형식적인 신앙때문에, 마당만 밟고 그저 쓸쓸히 돌아가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물질만능주의 때문에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섬기고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저들의 죄를 위해서, 독선과 아집으로 배타적인 저들의 완악한 마음들 때문에, 도저히 헐리지 않는 중간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된 자기의 육체를 친히 헐어서 삼일만에 일으킬 새 예루살렘성,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건설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된 자신의 육체를 우리의 죄를 위해서 내어 주셨습니다. 바로 나 때문에 우리 주님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53:5)
그가 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는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말대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준행하셨습니다. 그의 성전된 육체는 갈갈이 찢겼으며 마지막 남은 피 한방울까지도 손바닥과 발등의 못자국을 따라서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는 성전을 헐었습니다.

형식적이고 가증스런 성전을 헐었으며 물질 만능으로 강도의 굴혈로 만든 성전도 허셨습니다. 이기심과 배타성으로 철저히 화해하지 못하는 사분오열된 성전도 허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가 허신 것을 다시 우리 안에 세울 수 없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원수된 것들--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으며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셨습니다 또한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셨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