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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수용과 사회 변화 (고전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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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복음이 들어와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은 세상의 미련하고 천한 것들을 택해서 쓰신 하나님의 역사(役事)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KOSTA '92 주제인 "2000년대를 향하여"는 미래에 대한 전망, 미래에 대 한 우리의 사명 같은 것을 얘기하는 것인데, 결국 이 "미래"라고 하는 것도 현재와 과거를 돌아본 뒤에 전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기독교의 과거를 먼저 역사적으로 조명해 보고 현재를 현상적으 로 조금 다루어 보고 난 후에 미래의 2000년대를 소망 가운데 바라보고자 하 는 뜻에서 제 나름의 제목 설정을 해 봤습니다.

"복음의 수용과 사회 변화"라는 이번 장에서는 복음이 과거 우리 나라에 들 어왔을 때 어떤 변화를 초래하고 어떤 도전을 주었나 하는 것을 비교적 긍 정적이고 적극적인 측면에서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비관스러운 현실 을 딛고 서서 내일의 설계를 용기있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선조들의 신앙 행 적을 이해하는 것이 꼭 필요하기 때문에 지난 역사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측면 에서 다루고자 합니다.

 한국에서의 복음 수용

천주교는 임진왜란 후 정묘호란, 병자호란 무렵에 우리 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개신교는 1832년 독일 사람인 구츠라프 선교사가 충청도 홍주 만의 원산도에 도착한 것을 기점으로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 노력이 시작되었 습니다. 그 뒤 1865년 우리가 잘 아는 토마스 목사가 황해도 장연군 소래 앞 바다에 도착하여 3개월 동안 머물고 한국어를 공부한 뒤 1866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대동강에 들어왔다가 희생되었습니다.

교계(敎界)에서는 1986년 그의 희생 60주년을 기해서 "토마스 목사 기념 사 업회"를 조직하여 그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하고 그의 전도 행적을 선양하는 적극적인 모임을 가졌고, 그 이후에 우리 교회사에서는 그의 죽음을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로 추앙해 왔습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으로는 그의 행적을 정말 순교라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호는 중무장을 하 고 나타나서 우리 쪽에서 입국의 까닭을 물엇지만 대포를 쏘고 평양 시민들 을 위협하며 행패를 아주 많이 부렸습니다. 그러다 결국 우리 나라의 화공(火 工)이 그 배를 불사르자 거기에 탔던 많은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지 않을 수 없 었고 그런 와중에 토마스 목사는 희생당했습니다. 물론 그가 전도 문서를 가 져왔고 성경을 전했다는 기록은 있습니다마는 민족적인 의미에서 볼 때 그가 죽임을 당한 것은 사실 그 배를 인도해 온 책임자로서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릅 니다.

제가 그의 죽음에 대해 순교일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다른 나라에 선교한다는 명목 하에 중무장을 하고 대포를 쏘면서 들어가서 상대방에 공격을 하여 사상자를 냈다면 과연 그 것을 선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것을 선교라고 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에 취해야 할 선교 방식 가운데 하나로 그런 무력적 방법을 떳떳하게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토마스 목사의 죽음을 볼 때 저는 그의 죽음이 순교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초기의 유럽 계통 선교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복음이 수용되 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1870년대 만주에서 일련의 선교 활동을 하던 사 람들과 그곳까지 들어온, 복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우리 믿음의 선조들 을 통해 수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한국 교회사는 대체로 토마스 목 사의 순교 후에 미국 선교사가 들어와서 우리 나라에 복음을 전해 준 것으로 정리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에서는 지난 1984년에 한국 기독교 100주년 행사를 가졌듯이, 주로 미국계 선교사들이 그 동안 시도했던 역사 인식 체계로써 한국 교회사를 정리해 왔는데 저는 그 것 역시 잘못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계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우 리 나라에는 성경이 번역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전부 다는 아니지만 성경의 일부가 번역되어 있었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들의 활동을 통해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계 선교사의 복음 전파로부터 한국 기독교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종래의 역사 인식은 잘못 되었다고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1870년대 만주로 들어온 사람들은 주로 스코틀랜드 연합 장로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죤 로 스와 죤 매킨타이어 같은 선교사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1864년에 서 1873년까지 한국을 지배한 대원군의 위력과 쇄국 정책 그리고 천주교 박해 사건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만주로 온 것은 만주 선교에도 목적이 있 었지만, 한국 선교에 일정하게 비중을 두어 왔던 만큼 한국 선교도 고려했 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 정책 이후 한국에 선교사들이 직접 들어 가는 것은 어렵지만 다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는가 고 심하던 그들은 성경을 번역해서 보급하는 방법을 취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1870년대 중반부터 그들은 만주에 와 있던 많은 한국인들을 만났습니다. 한 국인을 만나서 그들은 한국어와 한국 역사를 공부하고, 그 다음에 그들을 전도해서 예수를 믿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1877년경에 그들은 "한국어 첫걸 음"이라는 소책자를 만들고 "한국사"라는 책도 영어로 발간했습니다. 그런 후 에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1879년에는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만주에서 세례를 받는 사람이 네 사람 나옵니다. 첫째 사람 은 이름이 잘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예수를 믿고 세 례를 받겠다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목숨 을 거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주지시키면서 그들이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부 모, 처자의 허락을 받아 오도록 했습니다. 두 사람을 보냈는데 한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한 사람은 용감하게 돌아와서 자기는 세례를 받아야 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세례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 기록될 이 최초의 수세자(受洗者)는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두번째 사람은 백 홍준이라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훈아진언"이라는 책을 만주에서 구 해 가지고 와서 그 아들에게 읽혔다고 합니다. 백 홍준은 "여기에서 내가 진 리를 발견했다" 하고 그 이듬해 만주에 가서 매킨타이어에게 세례를 받았습 니다. 세번째 사람은 이응찬이라는 사람으로 일찍부터 로스의 어학 선생이었고 그리고 가장 먼저 예수를 영접 한 사람이요 가장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 이었지만, 그곳에 있는 중국인 신자들로부터 아편을 복용한다는 오해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를 받지 못하다가 세번째 수세자가 되었습니다. 네번째 수 세자도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이 응찬의 친척으로서 한문을 우리말 이상으로 잘하는 사람이며 한의사요 학식이 아주 높은 사람이라고는 기록되어 있지만 이름은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1879년에 만주에서 네 사람의 한국인 수세자가 나오게 됩니다. 그 들은 로스와 매킨타이어와 더불어 열심히 성경 번역 작업에 착수해 1882년 3월 과 5월에 만주에서 각각 누가복음 3천 부와 요한복음 3천부를 출판하는 결 실을 보았습니다. 그 해에 이 번역과 출판에 도움을 주었던 김 청송이라는 사람과 서 상륜이라는 사람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사에서 제 5, 제 6의 수세자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로스와 매킨타이어는 발간한 성경 6천부 가운데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각 천 부씩을 일본으로 보내 그곳에 있는 스코틀 랜드 성서공회에서 일본인을 고용해서 다시 부산으로 가져가 팔도록 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수소문한 자료로는 부산에서 팔았던 성경을 통해 예수 믿게 된 사람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그런 자료가 분명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한편, 일본으로 보내지 않았던 4천 부의 성경은 만주에서 많은 한국인들에 게 보급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만주 땅에 있던 한국 사람과 압록강을 건너 의주 와 압록강 일대 및 평양과 소래까지 내려와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통해 많은 결신자가 나오게 됩니다. 제 5수세자인 김 청송은 당시 한국인들이 약 28 개 부락에 2만여 명이 살았던 압록강 북쪽에 우리말 성경책을 가지고 가서 그 들에게 복음을 전해 한꺼번에 75명씩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되 었습니다. 그리고 백 홍준을 중심으로 의주지역에서, 유 진천이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평양 지역에서, 그리고 제 6 수세자인 서 상륜을 중심으로 서울에 서 각각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서 상륜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883년 1월경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2 년 동안 열심히 서울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그는 수시로 로스에게 연락을 취해 "여기에 세례 받고자 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있으니 당신들이 와서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로스는 한국에 들어올 엄두를 못내고 있었습니다. 쇄국 정책이 단행되어 외국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상황 에서 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그러다 1885년 1월 경에 서 상륜은 다시 만주의 로스에게 직접 가서 "한국에 와서 직접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서 상륜의 이러한 구두(口頭) 보고에 입각해 로 스는 자신을 도와준 영국성서공회에 1885년 3월 8일자로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는 지금도 영국성서공회에 남아 있습니다. 거기에는 서 상륜씨가 복음 을 전한 서울의 70여 명이 세례를 받기 원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렇게 날짜와 장소, 그리고 사람 이름을 세세히 언급하는 것은 역사에서 사실(史實)이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의미를 부 여하고 해석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흔히 교회 목사님들이 역사에 대해 언급 할 때 사실과는 관계없이 해석만 말씀을 많이 합니다. 또 설교를 하실 때도 정확하게 사실을 말하지 않고, 즉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할 때 어떤 정 황에서 어떻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고 그저 해석과 의미만 과장해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 선교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맨 처음 들어온 때는 장로교의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아펜젤러가 입국했던 1885년 4월 5일입니다. 한편, 로 스의 편지는 그 해 3월 8일, 즉 한 달 전에 씌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선교사 가 들어오기 한 달 전 편지에, 이미 서울에는 복음을 듣고 세례를 받기 원하 는 사람이 70여 명이나 있다는 보고가 실려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실증적인 사실을 보더라도 미국계 선교사들이 복음을 전함으로써 비로소 한국 기독교 역 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역사 인식은 잘못이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선 교사들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복음을 직접 한국에 전해 준 사람은 바로 우리 조상들이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복음을 직접 우리 나라 에 들여 왔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나라의 복음 수용에는 한국인들의 주체적인 노력이 있었다고 하는 의미 부여를 할 수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역할 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비로소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사 를 지배해 온 선교사적(宣敎史的)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됩니다. 한국 기독교사 초기에 대해 얘기할 때 "전파"라는 말과 "수용"이라 는 말을 혼용해서 쓰고 있습니다. 이 전파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서구 선교사 들과 서구 선교부가 한국에 복음을 전해 주었다고 하는 의미가 강합니다.

종래까지는 그런 시각에서 한국 기독교사를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 늘날에 와서는 그런 시각보다 "수용"이라고 하는, 우리가 적극적으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시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가 책임자로 있는 "한국 기 독교 역사 연구소"에서 발행한 "한국 기독교 역사" 1,2권에 이에 대한 더 자 세한 언급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만주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일본을 통해서도 복음을 수용 하려는 열심을 보였습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민비를 구출하는 데 공을 세 운 이 수정이라는 사람은 그 공로로 돈과 명예를 주겠다는 것을 뿌리치고 일 본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친구 안 종수가 "농정신편"(農政新 編)이라는 농학에 관한 책을 쓰는 것을 보고 아주 큰 자극을 받고 명예와 부( 富)도 뿌리치고 일본 유학에 나섰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쯔다세인이라는 농학자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안 종수의 소개로 이 수정은 이 쯔다세인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일설에 따 르면 쯔다세인의 집에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八福)이 적힌 족자가 있 었다고 합니다. 한학자요 향학열에 불탔던 이 수정은 족자에 적힌 글귀를 보 고 그것이 유교 어느 경전에도 없다는 것을 알고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습 니다. 그 글귀가 기독교의 어느 복음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 수정은 농 학 공부를 포기하고 그 뒤에 예수를 믿고 그 이듬해 5월에는 세례까지 받았 습니다.

한학자인 이 수정이 세례를 받게 되자 일본에 와 있던 많은 선교사들이 그 를 주목하고 그를 통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려고 했습니다. 한학자인 그에게 처음 맡겨진 것은 한문 성경에 이두식(吏讀式) 토를 다는 작업을 하는 것이 었습니다. 그래서 1884년 말에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이두식 토를 단 성경이 일본에서 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을 번역해서 그 이듬해 1월에 일본 에서 한글로 번역 출판했습니다. 그런데 1885년 4월 5일 일본을 통해 우리 나 라에 들어오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이 수정이 번역 발간한 우리 말 마가복음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자기가 최초의 선교사로 들어가는 그 지 역에 이미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간다는 것은 제가 알기로는 세계 선교사 상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한국에서의 복음 수용의 특징

첫째로,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노력을 통해 복음이 수용되었습니다.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한국 사람들이 나왔고 이 사람들이 성경 번역에 동참 했습니다. 그리고 번역된 성경을 보급하는데 이들이 굉장한 노력을 기울였습니 다. 초기에 이 성경을 보급했던 사람들을 가리켜 "매서"(賣書)라고 했습니다.

이는 "성경을 파는 사람들", "책을 파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 후 "권 서"(勸書)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복음서를 전하는 데 앞장선 사람 들입니다. 김 청송이나 백 홍준이나 서 상륜 같은 사람들이 권서로서 복음서 를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하는데 앞장섰던 사람들입니다. 1900년에 신약전서 가, 1911년에 구약전서가 완역되고 1936년에 구약 개역이, 1938년에 신약 개 역이 나오는 등 성경 번역이 진척됨에 따라 권서들도 성경 보급을 위해 더욱 애썼습니다.

한국 교회를 일으키고 한국 교회를 창건하려는 주체적인 노력을 한 사람 들은 바로 이 권서들입니다. 번역된 복음서를 방방곡곡에 전하면서 권서들은 복 음서만 파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진리를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 모임을 조직하고 또 조그만 교회들을 일으켰습니다["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지식 산업사 발간) 참조].

어떤 곳에서 이 권서들은 선교사에게 소속되어 한 군(郡)이나 두 군을 맡아 1년에 몇 차례씩 그곳을 돌아 다니면서 축호 방문을 하며 복음서를 보급 했습니다. 한 번 돌고 두 번 돌다 낯이 익고 책을 사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 과 함께 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또 저녁에 사랑방에서 복음에 대 한 토론을 열거나 그런 것이 계기가 되어 조그만 기도 모임이 조직되고 그러 한 처소가 중심이 되어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럴 즈음에 그 지역 근처에 있던 선교사가 와서 그곳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고 책임자로 앉히는 식으로 해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선교사들 자신도 그렇게 증언했습니다. 바로 이 권서들의 노력이야말로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복음 수용과 함께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전도를 통한 한국 교회 설립에 연결되는 일입니다.

 둘째로, 성경의 번역과 출판이 외국인 선교사의 입국에 앞서 이루어졌습 니다. 대개는 선교사가 들어와서 현지 언어를 배우고 성경 번역 작업을 시작 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 누가 복음과 요한복음이 각각 먼저 번역된 것이 1882년 3월과 5월의 일입니다. 그 리고 마가복음이 일본에서 번역 출판된 때가 1885년 1월입니다. 1883년에는 사도행전이 그 당시 이름으로는 "사도행적"(使道行跡)이라는 이름으로 발간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주에서 번역된 성경은 1887년에 "예수선교전서"라 는 이름으로 집대성되었습니다. "예수선교전서"는 지금 영국의 영국성서공회 에 2권 있고 우리 나라 성서공회에 1권 있습니다. 지금 그 3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국성서공회는 확인을 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뒤 우리 나라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만주에서 번역된 "예수선교전서" 와 일본에서 이 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배격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지 역에 제일 먼저 선교사로 들어가면 그 지역에서 첫선교사로서 받는 여러 가 지 고난과 누려야 할 명예가 있습니다. 그 명예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나라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그런 명예입니다. 그런데 아펜젤러가 들어 와 보니 벌써 한국어로 누가복음, 요한복음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까지도 번역 되어 있었습니다. 또다른 번역서도 상당수 진척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려 야 할 명예를 빼앗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수정의 마가복음서와 만주 의 번역서를 배격했습니다. 갖가지 이유를 붙혀서 배격하고 자기들 손으로 꼭 번역을 해야겠다 해서 1900년에 신약전서를, 1911년에 구약전서를 각각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1936년에 구약 개역이 나오고 1938년에 신약 개역이 나 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맞춤법을 제외하고는 1938년판 성경을 사용하고 있 습니다. 그 1938년판이 1952년에 현재의 맞춤법 형태로 바뀌고 1956년에 오 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판형과 페이지 수로 결정되어 나왔습니다. 개역 성경은 우리 어휘에 맞지 않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 번 역해야 할 필요성을 많이 느낍니다.

이렇게 성경의 번역과 출판이 선교사의 입국에 앞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한 국 기독교의 성격을 결정하는데도 굉장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뒷날 선교 사들이 한국 기독교를 "성경 기독교"라는 말로 성격 규정을 했습니다. 선교 사들이 규정해 주어서가 아니라 믿음의 선조들이 성경을 먼저 번역하고 난 다음에 선교사들을 받아들인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한국의 기독교는 성경 기독교인 것입니다. 한국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이 성경 기독교적인 성격은 뒷날 한국 기독교를 발전 부흥시키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도 한국 기독교가 성장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우리 나라 기독교사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가장 먼저 "성경 기독교의 성격 때문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처음에는 주로 개화론자들이 기독교를 수용하자고 요구했으나 실제 로 기독교는 어려움에 처해 있던 개개인들을 통해 받아들여졌습니다. 개화론자 들이라고 하면 1870년대 일본과의 수교 무렵 문호 개방을 하고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룩하고자 했던 지식인들을 말합니다. 당시 개화론자들은 천주교는 침략적인 세력과 결탁 되었지만 야소교, 즉 기독교는 천주교와는 다르다고 하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처 음 희생된 토마스 목사도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에게 "나는 천주교인이 아니고 야소교인이다" 하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습니다. 그 때 천주교는 침략의 앞잡 이지만 야소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부국강 병이나 개화의 수단으로 시대의 흐름을 따라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 장했던 측은 한말(韓末) 지식인들인 개화론자들이었지만 정작 기독교를 수용했 던 사람들은 당시 자신의 삶 가운데 여러 문제로 고민하다 하나님을 개인적으 로 직접 만난 자들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개인의 여러 가지 형편, 즉 병이라든 지 파산, 사업 실패, 그리고 종교상의 고민 등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사람들을 통 해 수용되었습니다. 이 수정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개화에 뜻을 두 고 일본에 갔지만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 다. 개화론자들 가운데 뒷날 독립협회 회원으로 옥중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 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개화의 목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인식은 하고 있 었지만 그들이 예수를 직접 만난 것은 옥중이라는 환경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섭리를 통해 기독교 수용에서 적절히 간섭하 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환경을 적절히 사용하십니다. 역사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다 보면 자칫 역사를 인간의 의지와 관련이 없는 운 명론적인 것으로 보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하는 섭리사(攝理史)에 서는 그런 오해의 소지가 사실 있습니다. 또 이러한 섭리사는 운명론적인 또 는 인과응보적인 역사 해석으로 기울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나면서 눈먼 자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 섭리사 가 반드시 기계적인 인과응보론이나 운명론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요9:1-3). 제자들이 나면서 눈먼 자를 보고 "이 사람이 소경으 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라고 예 수께 인과응보적으로, 운명론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이 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 내고자 하심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자신의 역사( 役事)를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를 눈멀고 구걸하는 비 주체적인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자주적인 인간으로 세우시는데 하나님의 목적 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운명론적으로 혹은 기계론적 으로 인간의 의지를 배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더 주체 적으로 돋보이게 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890년대 말이 되면 기독교 인구는 약 1만 명에 육박하게 됩 니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 때는 20만 명을 약간 상회하게 되었습니다. 이 러한결신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회에 도전을 주고 그들을 사회 변화의 역군으로 삼으셨습니다.

저는 우리 나라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난 후의 변화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내적으로 우리 사회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역 할을 했으며, 둘째로 그 시기가 역사적으로 외침(外侵)이 많았던 때였던 만큼 외세의 침 략에 대항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민족과 역사를 어떻게 지키려 했나 하 는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회 개혁

어떤 사상이나 종교를 받아들인 사회는 예외없이 변화를 겪고 도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상과 종교가 그 사회의 문제점에 관심을 갖게 되면 거기에는 변화와 개혁이 반드시 따릅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에서도 일반 사상이나 종교 가 사회 변화에 큰 역할을 한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불교는, 주로 부족장 중심의 사회여서 통합적인 왕권이 형성되어 있지 않던 시기에 들어와서 왕과 귀족과 결탁함으로써 지방 세력을 통합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초기에 들어온 교종(敎 宗) 불교가 당시의 신분 질서를 뒷받침해 주고 민중들을 억압하는 종교로 전 락했던 신라 하대에는 선종(禪宗) 불교가 들어와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습 니다. 선종은 민중을 각성시키고 민중이 뒷받침된 호족 세력을 키움으로써 변화를 가속화시켰습니다. 이런 호족 세력이 일으킨 새로운 사회가 바로 고 려 사회입니다. 즉, 고려 사회는 종교사적으로 보면 선종 불교가 뒷받침되어 이 루어진 나라입니다. 고려 후기에 오면 선종 불교도 타락했습니다. 이때 원 나라를 통해 성리학이 들어왔습니다. 성리학은 지방에 있는 향리층을 중심으 로, 농민층을 규합하는 사상으로 나타나 마침내는 중앙에 있는 왕과 권문세 가에게 도전하는 정치적 세력으로 커갔습니다. 결국 성리학이 뒷받침된 지방 향리 세력들은 중앙의 권문세가들을 타도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여 조선 조를 세웠습니다. 일반 사회사에서도 사상과 종교는 늘 변화의 원동력이었 습니다. 기독교는 본래 창조적인 종교요 역사적인 종교요 변화와 개혁을 끊 임없이 추구해 온 종교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이 우리 사회에 수용되었을 때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모순된 구조들을 보면서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복 음은 사회를 개혁하는 역동적인 힘으로 나타났습니다.

 문맹 퇴치

성경의 번역과 보급으로 국문(國文)이 널리 퍼져 문맹이 퇴치되자 놀라운 사회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수용되고 난 뒤 10년 동안 60여 종의 전도 문서들이 출판되었습니다. 성경 번역 외에 60여종이나 되는, 그 당 시로서는 굉장히 많은 전도 문서가 이 때 발간된 것입니다. 그것은 1888년경 에 배재학당을 중심으로 해서 생긴 삼문출판소(三文出版所)가 본격적으로 출판 활동을 벌인 결과였습니다.

 가치관과 세계관의 변화

성경의 보급과 전도 문서들의 보급으로 기독교는 급성장했고 이는 우리 사회 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변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우선 기독교는 유일신 관(唯一神觀)을 갖고 있습니다. 유일신관은 범신론적인 우리 사회에 변화와 도 전을 주어 우리 사회에 만연했던 미신을 타파하는 운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1890년대 초기의 문서들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그리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입장에서 집안에 있는 미신을 제거한다든지 미신과 투쟁하는 일들이 많았습 니다. 미신 타파는 제사를 거부하는 움직임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이 제사 거부는 천주교에서 먼저 나타났습니다. 그 후 기독교가 수용되면서 상당한 직위에 있던 사람들도 예수를 믿고 난 뒤에는 집안에서 종래의 제사를 거부했 습니다. 제사 거부는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회를 완전히 지배하던 성리학이 라는 이념 체계에 반기를 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조는 성리학을 지 지 기반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성리학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윤리가 충(忠) 과 효(孝)였고, 그 충과 효를 뒷받침하는 의식(儀式)이 바로 제사였습니다. 그 러니까 제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충과 효를 기본 이념으로 하는 성리학 체계 에 대한 거부요 나아가서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성립된 조선조체제 자체에 대 한 도전이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나름대로의 충성과 효 관념을 갖고 있 습니다. 그러나 조선조에서는 제사를 통해 충과 효를 표현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 때 그리스도인들은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을 붙잡고 제사 거부에 나섰던 것입니다. 제사거부, 미신 타파는 1938년 이후, 국가를 우상으로 섬기도 록 강요하는 일제의 신사 참배 정책에 대한 거부, 즉 국가 권력과의 대결 양 상으로까지 확대 발전했습니다.

저는 앞으로 우리 한국 기독교가 이런 면에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한반도 남쪽에는 권력과 부(富)를 우상시하고 절대시하 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더합니다. 김 일성, 김 정일 부자(父子)를 아예 우상으로 공공연히 떠받듭니다. 북한에서는 김 일성이 곧 하나님입니다.

우상을 일체 거부했던 우리믿음의 선조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관의 변화

기독교적 인간관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고 하는 기독교 시각에서 볼 때, 직업에 따른 사농공상(士農工商) 구분이라든가 핏줄을 따라 구분한 양반, 중인(中人), 상민, 노비, 천민과 같은 신분 질서 자체는 무의미했습니다. 그 래서 기독교가 들어오고 난 뒤 신분 평등 사상이 나와 백정과 양반이 한 예배 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교회가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했을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백정과 양반이 처음으로 함께 예배를 드린 곳이 파고다 공원 옆에 있는 승동교회입니다. 나중에 양반들이 멋적어서 독립하여 세운 교회가 안 국동에 있는 안동교회입니다. 그리고 1920년대 우리 나라에서는 백정의 신분 을 해방하려고 하는 형평 운동(衡平運動)이 일어났는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백정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이므 로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또 여성을 종래의 관념에서부터 해방시키려는 운동이 기독교 안에서 처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법치주의에 입각한 인권 운동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 많은 관리들이 법에 의거하지 않고 사람들을 옥에 집어넣는다든지 매를 가한다든지 하는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이 그런 것을 그냥 보아넘 기지 않았습니다. 무고한 사람이 붙잡혀 가는 것을 보면 즉시 달려가서 데모 를 하고 "당신이 우리 아무아무개를 잡아 갔는데 그 사람이 죄가 있으면 빨 리 재판을 해서 벌을 주고 죄가 없으면 당장 내어 놓으시오"라고 항거하고 인권을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무죄한 사람이 풀려 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사실 인권 운동이라든가 여성 해방 운동 같은 것은 우리 나라 교회 안에서는 아직도 많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성경 해석 가운데 집단간의 이해 관계가 있는 부분에서는 서로들 양보를 하지 않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한두 교단을 제외하고는 여성 장로를 세우지 않습니다. 여성 안수 문제에 대해서 부정적입 니다.

그런데 그것을 얘기할 때 성경의 무슨무슨 구절을 댑니다. 집단간의 이익이 걸려 있지 않는 경우에는 성경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해 별로 의미 부 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금 민감한 문제가 나오면 성경 구절을 대고 "이 것은 수긍하겠다", "이것은 안된다"고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런 태도가 얼 마나 성경적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우리 나름의 관용과 주님의 진실하신 뜻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노동관의 변화

기독교에서는 성경에 규정하는 바와 같이 노동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신성 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직업의 귀천이 없다고 주장합니 다. 종교개혁 이후에는 직업을 곧 소명(召命)으로 여겼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 지 그것이 바로 소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말라"(살후 3:10)는 명제를 내겁니다. 아무리 부자요 아무리 혈통을 잘 타고났다 하더라도 땀 흘려 일해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아주 기본적인 신념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땀 흘려 일하지 않은 소득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땀 흘려 일하지 않는 것은 죄악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이런 면에서 많은 시험을 당하고 지금껏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공짜로 뭐 가 생기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물론 은혜입니다.그러나 그것이 정말 성경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제가 한 10년 전에 들은 얘 기입니다.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이는 모교회 교인들 가운데 실업인(實業人) 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실업인들의 85%가 부동산 투기업에 종사하 고 있다고 합니다. 그 교단은 1960년대 박 정희 대통령 때 급성장한 교단입니 다. 그런 사실을 알고 나니까 한국의 부동산 값이 오르게 된데는 그 교단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의 책임이 굉장히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돈 안 들이고 부동산 투기하여 잘되면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기 때문 입니다. 일하지 않고 수입이 생겼다면 이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땀 흘리지 않 고 얻은 수입이나 대가, 그것은 성경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죄악이기까지 합 니다. 우리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윤리를 실천해 나간다면 한국 사회는 이렇게까지 부패하지 않습니다.

 도덕적 성결 운동

기독교가 들어오고 난 뒤 개인의 성결 운동, 집단의 성결 운동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 들어오던 당시 이 사회에는 술, 담배, 아편, 축첩(蓄妾)이 횡행 했습니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은 소극적으로는 술, 담 배, 아편을 하지 않고 축첩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적극적으로는 절제 운동을 통해 그런 악습을 폐지하려고 하는 운동으로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술, 담배에 대해 저 개인적으로는 분명한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젊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대화를 하기 위해서 는 술, 담배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 해서, 예배당 안에서는 차마 술, 담배를 못 하고 밖에 나가서는 젊은 사람들과 술, 담배를 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에 대해 반대합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에 대해 좀 분명한 자 세를 갖는 게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도 젊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술, 담 배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든지 "술, 담배에 관해 성경에 특별히 언급한 부 분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 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저는 "하필이 면 술, 담배에 대해 물어 볼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중요한 것이 더 많은데….

자네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부분이 많이 있는데"라고 대답해 줍니다. 사람들 이 그런 질문을 할 때 저는 그 사람들이 적당히 타협하는 식의 대답을 원치 않 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도 어정쩡해서 끊기는 끊어야 할 것 같고 누가 아주 강력한 권고를 해 주면 끊을 수 있겠다 해서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단호하게 얘 기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우리 한국 교회의 믿음의 선배들이 도덕적 성결 운동이라는 선례를 남겨 준 것을 참 고맙게 생각합니다. 술, 담배 안하는 것을 최고의 덕목, 최고의 윤리적 행위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술, 담배 안하는 것으로써 기독교의 최고 덕목을 다 이행한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 은 바리새적 자세입니다. 그러나 술, 담배에서부터 근신하면서 그 다음에 하나 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더 큰 덕목을 이루어가는 성화(聖化) 과정을 밟 아 간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전통 계승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우리 믿음 의 조상들이 아름답게 물려 준 이 전통을 우리 대(代)에 와서 깨뜨릴 필요가 뭐가 있겠습니까 아름답게 전수해서 우리의 믿음의 후손들도 경건하게 그리고 깨끗하게 키울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담배를 끊자는 운동이 세상에서 한창인 판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기필코 담배를 피워야 할 이유가 어 디 있겠습니까 도덕적 성결 운동은 술, 담배, 아편, 축첩을 하지 않는 데에서 부터 부패에 대한 집단적인 저항 운동으로까지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 관료들은 굉장히 부패해 있었습니다. 민씨 세도정치하에서 매관 매직 행위가 판을 쳤습니다. 세도가에게 돈을 주고 한자리 얻으면, 선정(善政)할 생각은 안 하고 자연히 어떻게 하면 그 기간 동안 돈을 많이 갈취하느냐 하는 것에 목표 를 두기 일쑤였습니다. 돈이 많아야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고 또 쫓겨났 을 때도 일평생 먹고 살 것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관리들의 이런 부패에 대해 항거하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협박과 신변의 위협 도 많이 받았지만 부정부패에 대한 저항 운동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었습니 다.

1901년 윤 덕영이라는 사람이 황해도 도지사로 임명을 받고 그곳으로 내려갔 습니다. 그는 왕실에 연줄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도지사로 내려간 지역에 흉 년이 들어 백성들이 세금도 제대로 못 내는 판에 윤 덕영은 거기에서 수많은 돈 을 갈취하고 착복했습니다. 그것을 본 그리스도인들이 본인에게 항거하고 정 부에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파직되고 말았습다. 당시 "대한 그 리스도인 회보"라는 주간 신문이 있었습니다. 1899년 3월 1일자 그 신문에 이 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당시 세력 있는 양반 한 사람이 북도 군수로 발령이 났습니다. 아마 그 사람은 틀림없이 뇌물을 써서 북도 군수로 발령받았을 것입 니다. 그는 부임하기 전에 자기가 부임할 그 고을의 사정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벌써 야소교가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곧 자기를 임명해 준 정부에 대해 "나는 야소교 있는 고을에 원님으로 가기 싫 소. 야소교 없는 영남 마을로 옮겨 주시오"라고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대한 그 리스도인 회보"에도 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황성 신문"이라고 하는 신문에도 이 기사가 나왔습니다. "대한 그리스도인 회보"에서는 이런 논평까지 달았습니 다. "우리 교(敎)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도다. 교를 참 믿는 사람은 어찌 추호나 그른 일을 행하며 관장의 영(令)을 거역하리요. 그러나 관 장이 만약 무단히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을 지경이면 우리 교는 그것을 용이히 빼앗기지 아닐 터이니 그 양반의 갈 수 없다는 것이 이 까닭인 듯." 당 시의 그리스도인들은 1만 명이 채 안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 전체 인구가 천 만쯤 되었을 때입니다. 그러니까 천 명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한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부정 부패에 대해 힘껏 항의 했습니다. 그리하여 세력 있는 사람들도 예수교인을 함부로 다루지 못하고 그 들을 아주 골치 아픈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기에 기독교는 아주 역동 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현재와 비교해 보십시오. 현재 우리 나 라의 그리스도인은 전국민의 25%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즉, 4명 가운데 1명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맥도 못 추고 있습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대외적인 민족 운동

한말 일제 하에 그리스도인들은 민족 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러나 국사책 을 보면 기독교가 개화 운동에 얼마간 일조(一助)했다는 것 외에는 민족 운동,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는 것에 대한 언급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상대적으로 천도교가 모든 민족 운동에 앞장선 것처럼 교과서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간 기독교 역사가들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스도 인들 가운데서 기독교 민족 운동에 대해 제대로 연구를 해서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학술지에 당당하게 발표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논문에 없 는 사실을 예수 믿지 않는 학자들이 어떻게 인용하겠습니까 기독교 민족 운 동이 대단했다는 것을 교회에서 아무리 얘기하면 무엇합니까 교회 설교 몇마디는 학문적으로 수용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천만 명 을 넘었는데도 아직까지 기독교 문제를 대상으로 해서 논문 쓰는 사람들이 별 로 없습니다. 한말 독립협회 구성원들을 보면 상부층에 서 재필, 윤 치호, 중간 지도층에 남궁 억, 이 상재, 주 시경을 비롯하여 하부 동원 체제를 이 끌어 간 사람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독립협회를 연구하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언급은 하지 않습니다. 독립협회를 기독교 세력과 결부시키지 않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 이 맺어지고 난 뒤 우리 나라는 외교권, 행정권, 국방권, 치안권, 경찰권 등을 일본에게 차례차례 빼앗김으로써 주권 없는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시기에 매국 원흉들을 제거하기 위한 운동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 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의 충실한 주구(走狗) 노릇을 한 미국 사람 스티븐스 는 우리 나라에 외교 고문으로 와 있었는데 그것도 부족해서인지 당시 친일 적인 정책을 취해 온 루즈벨트 정부에 대해 일본을 위한 교섭을 하려다가 샌프 란시스코 오클란드에서 장 인환 의사(義士)의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장 인 환 의사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또 정 재홍이라는 사람은 박 영효의 궁내부 대신 취임 환영 축하연에 이등박문이 오리라 짐작하고 그를 암살하러 권총을 품고 연회석상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교육자이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 러나 그날 저녁 이등박문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등박문은 죽음을 면 했습니다. 이등박문은 가톨릭 신자인 안 중근에게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 습니다. 그러나 그와 힘을 모았던 우 연준이라는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그 의 본명은 우 덕순입니다. 이 두 사람이 공모를 하여 처음에는 우 덕순이 하얼 삔 역에서 기다리기로 하고 안 중근이 채가그 역에서 기다리기로 했는데 하 루 전에 이 계획이 변동되었습니다. 안 중근이 나이가 많기 때문에 리더격으로 있어서 우 연준더러 "우 동지가 채가그역으로 가시오. 내가 하얼삔 역으로 가겠 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등박문이 탄 열차는 채가그 역에는 서지 않고 6시 반에 통과하여 9시에 하얼삔 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등박문은 안 중근 에게 저격당해 죽었습니다. 안 중근 때문에 우 연준 같은 사람이 빛을 못 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가 안 중근에게 보낸 애국적이며 신앙적인 시가 지 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 시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1909년 명동성당 앞에서 매국 총리대신 이 완용이 칼에 맞아 죽을 뻔했습니다. 벨기에의 레오포드 황제 추도식에 국가 대표로 참석했다가 돌아오 는 길에 이 완용은 군밤장수로 가장한 이 재명 의사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 다. 그러나 그의 인력거를 끄는 곽 은문이라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죽음을 면 했습니다. 이 재명은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의 재판 기록을 보면 19명에 달 하는 그의 동지들 대부분이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스물네 살 난 이 학필이라는 목사도 가담했습니다. 나라가 점차 기울어져 가는 것을 그냥 바 라만 볼 수 없다고 생각한 이 재명과 그의 동지들은 이 완용을 제거하려는 측 과 매국 단체 "일 진회" 회장인 이 용구를 제거하려는 측의 두 패로 나뉘어서 활동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 재명이 실수를 함으로써 조직이 탄로나고 많은 사람이 체포되어 죽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말에 매국 원흉들을 제거하려는 운동들에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리스도인입니다. 저도 이것을 연구하면서 대단히 놀랐습니다. 저는 이에 대한 논문을 1973년, 기독교사에 관한 첫 논문으로 발표했습니다. 1972년에 유신(維 新)이 선포될 때까지만 해도 저는 일반 국사 공부만 했습니다. 기독교사에 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신이 선포되자 제가 속해 있던, 소위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주장하던 고신파 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의 모든 보수 교단들과 신학 교수들이 유신에 동조하는 발언을 하고 유신에 동조하 기 위한 유세에 너도나도 나섰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도 한탄스러웠습니다. 그 래서 제가 그간 공부해 온 역사를 가지고 당시에 직면했던 고민을 풀어 보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하여 기독교사를 처음으로 더듬어 보며 연구를 하여 그로부 터 1년 후 한말 그리스도인들의 민족 운동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저는 아주 순진한 정교분리론자였고 또 기독교와 폭력은 전혀 맞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생각이 많 이 달라졌습니다. 1974년부터 세계 복음주의 운동을 이끌고 있는 죤 스토트의 "현대 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이라는 책을 읽어 보십시오. 물론 거기에 서는 폭력 문제를 전쟁과 함께 다루었습니다. 저자는 약자(弱者)가 선택의 여 지가 없는 상황에서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으로써 자기 방어를 하는 것은 기독 교에서 정죄할 수 없다는 식의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저는 복음주의자의 입 장이 그런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일제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앞에서 이야 기한 식의 민족 운동 말고도 종교적인 집회를 통해 혹은 경제, 정치 운동을 통해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3.1 운동, 신사 참배 반대 투쟁에서 기독교는 자기의 분량보다 더 큰 몫을 해냈습니다.

 한국 기독교사에서 배워야 할 점들

우리는 한국 기독교가 2천년대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과거 기독교 수용 당 시의 모습과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기여했던 바들을 통해 전망해 볼 수 있어 야 합니다. 복음 수용 초기에 기독교가 민족과 이 사회에 대해 중요한 역할 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첫째/기도와 전도의 열심

둘째/도덕적 성결 운동

셋째/성경 기독교적 성격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성경을 번역 출판하는 일에 앞장서서 관여했을 뿐 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경회(査經會) 운동, 즉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는 운 동에 열성이었습니다. 사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부흥 운동은 사경회 운동에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 보면 부흥회를 많이 하는데 그것은 기독교적 전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초기 한국 기독교에는 부흥회가 없었습니다. 한 국 기독교의 전통은 부흥회가 아니고 사경회입니다. 사경회를 통해 부흥 운동 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사경회는 빼 버리고 부흥 운동만 기대해서 오히려 부정적인 요인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901년 평양에서 사경회를 했습니 다. 여자들만 모인 사경회였는데 농한기에 했기 때문에 열흘 정도씩 했습니다.

그 사경회에 300리 떨어진 삭주, 창성 등 압록강변에서도 부녀자들이 참석했습 니다. 당시의 사경회에 참석한 여러 부녀들의 사진이 선교 잡지에 나와 있습니 다. 그런데 거기에는 보따리를 이고 뒤에 등짐을 치고 짚신을 신은 여인들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 공부를 하고자 보따리를 이고 지고 300리 길을 산과 물을 건너온 것이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사나히 사경회", 즉 남자 들 사경회가 평양에서 열렸는데 400여 명이 참석했다고 합니다. 삭주, 창성 지 방에서, 상주, 해주, 서울에서 그리고 참으로 놀랍게도 목포, 무안 지방에서 참석한 형제들도 있었습니다. 이 자료를 1972년 연세대학교 도서관 고문서 속 에서 찾아 읽으면서 저는 정말 감격스러워 눈물이 핑 돌고 코가 아주 시큰했습 니다.

"나에게 복음을 전해 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평 양에서 사경회 하는데 목포, 무안 지방에서 참석할 수 있었던 그 사람들, 그렇 게 성경 공부를 열심히 했기에 자기 생활에서 말씀을 적용하려고 부단히 애 썼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저는 이런 믿음의 선배들을 가진 것에 대해 그때 정 말 자랑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한국 기독교의 성경 기독교적 성격입니다.

1904년 노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취재 차 우리 나라에 왔던 영국 신문기자 F.

A. 맥켄지라는 사람은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강점당한 뒤 독립하기 위해 몸부 림치는 것을 보면서 몇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책이 한국이 어 떻게 일본에게 망해 가는가를 서술한 "한국의 비극"과 "한국의 독립 운동"입니 다.

"한국의 독립 운동"에서 그는 기독교의 민족 운동에 관해 아주 중요한 사 실을 지적했습니다. "한국에는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근대의 자유 역사, 곧 자유의 투쟁 역사를 가르쳤다. 햄프던, 죠지 와싱턴, 쟌다크 등에 대해 가르 쳤다. 그들은 이러한 근대 역사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선동적인 책인 성경을 가르쳤다. 성경에 젖어 든 어떤 민족이 폭정을 만날 때 그 민족이 멸절하든가 아니면 폭정이 그치든가 두 가지 현상 중 하나가 일어난다." 이것 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민족 운동의 성격을 그대로 말해준 것입니다. 역사 를 배웠고 성경을 배운 그리스도인들, 바로 그들이 민족이 없어지든가 폭정 이 그치든가 하는 갈림길에서 민족 운동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서 저는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도전, 변화 그리고 민족 운동의 가장 중요한 요 인은 바로 이 성경 기독교적 성격이라고 얘기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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