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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와 말씀 (왕상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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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신문에서 여러분은 "살 개방 확정'이라는 머릿기사를 보셨을 줄 압니다. 대통령직을 걸고라도 쌀시장 개방만큼은 막아내겠다면 지도자의 발 언을 휴지조각으로 만든 중대한 뉴스였습니다. 대통령의 명예에 손상을 입 히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대통령의 말도 이렇게 바뀔 수 있다면, 백성들은 누구의 말을 신뢰하려 하겠습니까 사람의 말을 신뢰하기 가 얼마나 어려운지 깨우쳐 주는 뉴스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말슴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은 조금의 가감도 없이 그 대로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큰 위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말에 실 수가 없고 그말이 헛되이 돌아오는 법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 되는지에 대해 그 구에적인 예를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엘리야와 사르밧 과 부 두 사람을 통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시돈에 속한 사르밧 땅으로 가라 =

엘리야는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9절) 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오 늘 본문은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에게 전하면서 그 사르밧 시돈에 속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본문이 그 점 을 밝히고 있습니까 시돈이 어떤 땅이었습니까 시돈 땅은 이세벧의 친정 아버지 엣바알이 다스리고 있는 땅입니다. 이 사르밧은 시돈의 교외에 해당 하는 땅입니다.시돈이 있는 페니키야 전체를 이세벧의 친정 아버지 엣바알 이 강력하게 통치하고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엘리야를 보고 그런 땅 으로 가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읽 을수 있습니다 (약5:17). 우리가 엘리야를 생각할 때 엘리야는 위대한 사람 이기 때문에, 믿음이 굉장한 사람이었기 때문에,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갈등 이나 의심없이 하나님이 말씀하는 그대로 순종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생 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성경 인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괴로워 할 만한 대목에서는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괴로 워할만한 대목에서는 엘리야도 괴로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주저할만 한 상황에서는 주저할 수 밖에 없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엘리야가 사르밧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 명령이 엘리야 에게 대단히 어려운 명령이었음에 틀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릿시내는 숨어 있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 다. 그런데 그 그릿시내가 말라버리자 사르밧으로가라고 말씀하시는데 왜 그 복잡하고 어려운 사르밧으로 가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릿 시내에 물을 공급을 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말라버린 시냇물이지만 까마귀 가 계속 음식을 가져다주면 그릿 시냇가에서 하나님의 다음 명령을 좀 평안 하게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지금 사르밧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로서는 순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까지 가는 길은 100km가 넘는 먼 길입니다.2900 년 전이라길이 제대로 없던 때였습니다. 길이 있어도 북 이스라엘과 시돈 까지 쉽게 왕래할 수 있는 큰 도로는 이 엘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아합의 군사들이 깔려 있었으므로 쉽게 그 길을 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산길 을 돌아서 가든지 아합의 비밀 정보원을 만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택해가 야만 했습니다. 그러기에 100km의 여행이지만 보통 어려운 여행이 아니었 습니다.그리고 그릿에서 사르밧까지 가는 길에는 사막도 끼어 있습니다.그런 길을 걸어서 가야하고, 정보원들의 눈을 피해서 가야 했습니다. 그곳에 가 더라도 편안하게 피할 수 있는 곳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엘리야가 가는 곳 은 이세벧의 아버지가 다스리고 있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그런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속에서 엘리야가 하나님 의 말슴에 순종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르밧에서 만난 과부 =

말씀에 순종하여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갔습니다. 마음에 부담과 어려움을 안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사르밧으로 갔던 것입니다. 10절 을 보면, 그 사르밧 성문에 도착했을 때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 가지를 줍는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과부가 거지에 불고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때 당시에 과부라는 말을 거지라는 말입니다. 요즘은 여권이 신장되어 많이 달라졌습니다. 2900년전의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편이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거지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과부는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소유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과부와 고아라 를 말을 거지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로 쓰고 있습니다. 이 과부는 남푸한 옷 을 입은 여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지금 나무가지를 줏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인도를 받아 갔던 엘리야가 사르밧에 가서 만난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서 사르밧으로 가라고 했 으면 거기는 최소한 몸을 의탁하고 거처를 정할 만한 그런 곳이어야 하는 데..." 엘리야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그가 가서 만난 과부는 당장 땔감 몇개를 주어다가 한 웅쿰있는 밀가루를 끓여 그것을 반죽 하여 먹어야 하는 상황임을 보았습니다. 이 음식이 다하면 죽으려고 작정을 한, 더 이상 앞이 보이지 않는 그런 여인에게 가서 몸을 의탁하라고 하나님 이 그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이 명령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현재 우리가 듣는 하나님이 말씀고 다를 바 없습니다. 엘리야가 받 은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 장면을 바꾸어서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우리는 2,000년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청년이 바로 나를 위해서 죽었다는 말 씀을 듣습니다.

2,000년전에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저 평화를 외치다가 로마의 무참한 말발굽에 밟혀서 죽은 무저항,비폭력주의를 외치던 청년의 죽음이 아니라 그의 죽음은 곧 나를 위한 죽음이었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 청년이 십자 가에 달려 죽었다가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함으로 그 예수를 믿는 사람 에게 죽음보다 더한 인생의 짐이라도 능히 해결할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믿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말슴 을 들을때 이 과부를 보고 있는 엘리야나 다를 바가 무엇이 있느냐는 것입 니다.

 이 가난한 과부에게 몸을 의탁하여 살아야하고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통해 놀랍게 역사하실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엘리야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 을 의지하고 나아갔던 사도 바울이나,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다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엘리야가 보았던 보잘것 없던 과부처럼, 우리 앞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그 외모나 인물이 잘난 것도 아니고, 학벌이 좋은 것도 아니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보잘 것없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칠 수 있음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죽음의 권세를 극복할 수 있는 그 축복과 능력을 공급하신다 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만일 엘리야가 "하나님, 사르밧으로 가라고요사르밧 말고도숨을데가 많 습니다. 왜 하필이면 엣바알이 다스리고 있는 이세벧의 친정으로 가라고 하 십니까이런 하나님의 계획을 어떻게 따라가란 말입니까 이런 하나님과 일 을 같이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지"라고 생각하고 자기 길을 갔으면 그는 시돈왕이 다스리고 있는 땅에서도 자신의 종을 몇년 씩 먹이시는 그런 하나님의 권능과 보호하심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매듀헨리는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셨는가'하는 질문에 "그것은 교마한 이세벧의 아버지가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다스리고 있는 따 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을 삼년이 아니라 삼십년이라도 보호하고 먹이 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 특히 이세벧에게 가르치고 싶어 시돈땅에 보내셨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르밧 여인의 순종 =

또한 우리는 이 본문에서 엘리야 뿐 아니라 또 한 사람 사르밧 여인의 순 종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그리고 거 기에 있는 과부를 만나서 그에게 몸을 의탁하라. 그가너를 공궤할 것이다" (8,9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왜 하필이면 사르밧입니까 지금 이 무렵이면 남북 이스라엘에 250만 하나님의 선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비록 북왕국 이 스라엘은 바알 숭배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남쪽 유다에는 아직도 하나님을 경건하게 섬기는 백성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이라 해도 바알 앞에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이 그대로 있다고 나중에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왕상 19:18).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하나님의 백성을 두고 먼길을 여행해서 그 어려운 땅에 와서 한 과부를 만 나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오늘 이 본문에서 우리가 이미 본 것 처럼 이 여인에 대한 소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엘리야가 이 여인을 보았을때 얼굴과 외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이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남편이 누구였는지 전혀 고나심이 없 스빈다. 좀 배운 사람인지, 어떻게 불행하게 과부가 되었는지 이 여인의 과 거에도 큰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여인에게 관심을 갖고 소개하는 것은 이 여인이 보잘것 없는,모든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여인이 라 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런 보잘것 없는 여인 이어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바른 순종의 태도를 보일 때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다는 이 사실을 전하고자 하 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점을 이 여인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 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런것 저런 것 좀 얻지 못했다고 할찌라도 하나님 의 말씀이 비밀을 알고 그 말씀 앞에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자 할 때, 그런 사람이야 말로 복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총각을 볼때 딸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 나야 하고, 그런 처녀를 볼때 학벌이 시원 치 않고 인물이 좀 못나도 며느리 삼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집 장가를 갈때 여자가 얼마나 예쁜 가, 남자가 얼마나 멋있는가를 생각합니다. 헤밍웨이는 아무리 아름다운 경 치도 일주일만 보면 따분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은사 한분은 "데 이트를 할때 여자가 영어 단어를 하나 좀더 아느냐 모르느냐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얼굴이 좀 예쁘냐 콧대가 좀 섯느냐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음식을 준비할 줄 아느냐, 얼마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가정을 꾸려 갈줄 아느냐 하는 것이다"고 늘 저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야기할 때 이렇게 이야기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놓고 이야기할 때 바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인지 아닌 지를 늘 살피며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말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만"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 예 배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하실 때 그 앞에서 우리는 영원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엑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과 불신의 문턱을 드나들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다고는 하지만 정말 그런가'하는 고민을 할 수 밖 에 없습니다. 물론 그런 고민이 전혀 없이 믿음으로 들어오는 것은 거의 불 가능하다고 봅니다. 특히 어릴때부터 믿은 사람이라 할찌라도 그런 관문을 다 통고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가진 이후에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만'하는 단서를 포기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하나님 이 주시는 능력을 경험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내어놓는 순종 =

오늘 이 본문의 여인을 보십시오. 나무가지를 줍고 있는데 어느 남자가 나 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말합니다.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만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10절).

 물이 그냥 돌아서서 그냥 뜰 수 있는 것이었다면 물한 그릇 주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습니까그러나, 중동 지역은 그런 지역이 아닙니다.

물 한잔 주는 것이 우리나라처럼 그냥 '물 한잔 주십시요'해서 주는 것과 다릅니다. 찬물을 그냥 마실 수 있는 나라가 이 지구상에 그리 흔치 않습니 다. 독일 사람들이 맥주 많이 만들어 마시고 프랑스 사람이 포도주 많이 만 들어 마시는 이유가 물이 나빠서 그런다고 하지 않습니까. 더구나 지금 이 중동지역은 가뭄이 들어서 그릿 시냇가도 물이 말랐던 그런 시기입니다. 그 러니 물 한잔 달라는 나그네의 청이 상당한 수고를 해야 하는 요구였습니다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여자가 어떤 여자입니까 인생의 귀찮고 만사가 귀찮은 여자입 니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즐겁게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어쩌면 당신에게 물주기 전에 '내가 죽겠소'라는 생각을 품을 만큼 이 여인의 상태는 비참했습니다. 이 여인은 지금한끼 겨우 먹을 수 있는 음 식을 조금 남겨 놓고 있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 전에는 배불리 먹었을 것 같습니까먹을게 없으니 아끼고 아꼈을 것입니다. 음식을 구할 수 있는 가 능성도 없으니 그 한끼를 안 먹으려고 몇날 며칠을 허리띠를 졸라매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나무가지를 주으러 나온 것입니다. 나무가리를 주워다 불을 피우고 밀가루 반죽을 마지막으로 구워 먹고 나면 이젠 끝인 것입니다. 그런 고달픈 여자를 향하여 물을 좀 달라고 엘리야가 청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르밧의 과부처럼 인생의 짐이 다 한짐씩 되는 사람들입 니다. 어려움이 좀 있으면 나 하나만 이런 어려움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피곤한 삶을 우리가 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 면 이런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나그네가 '물을 좀 주십시오'하는 데 '아이고 귀찮소,나 하나 몸도 가누지 못하는 내가 당신한테 물을 준단 말이요'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있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물 을 가지러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1절). 이 여인의 태도를 우리가 가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주보와 함께 봉투를 하나 받으셨을 것입니다. 외국인 노동 자를 위한 봉투입니다. 당회에서 이 일을 하기로 결정을 하고 제가 이 말 씀을 묵상하는 중에 오늘 본문 말슴이 우리가 하기로 작정한 일과 잘 어울 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르밧의 이 여인이 지금 자기 땅에 온 나그네를 위 해 수고하라는 하나님이 요구에 순종하는 것 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국 땅에서 온 나그네들을 위해 조금의 수고를 아끼지 않고 섬기는 일은 하 나님의 축복을 받는 근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전 통계로 한국에 61,000여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고 합니다. 그중 에 59,000여명이 불법 체류자들입니다. 절반은 중국에서 온 중국 교포들이 고 필리핀,네팔,파키스탄 등지에서 온 노동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중 절반 이상이 대졸 이상의 고학력자들입니다. 이들 나라에서는 제법 똑똑한 사람 들이 비행기 타고 한국까지 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여기 와서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릅니다. 60년대 이전에 미국에 가서 불법체류하면서 죽을 고생을 하며 살았던 우리 한국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카톨릭 노동자 사무실의 조사에 의하면 한국에 와있는 외국인 노 동자들이 하루 근무하는 평균시간이 11시간이고 한달 평균 임금이 33만원이 고 합니다. 얼마나 착취를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전에 38세의 임호라는 중국교포 한 사람이 영등포 고가도로 위에서 차 도로 뛰어내려 자살을 했습니다. 임씨는 6개월간 한국에 와서 열심히 일을 해서 200만원을 벌었습니다. 이 돈이면 고향에 돌아가서 사업이라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출국하기 위해 목동에 있는 출입국 관리국 에 갔더니 불법체류에 대한 벌금이 180만원이 나온 것입니다. 6개월동안 임 금도 제대로 안주고, 사람 천대하는 곳에서 온갖 고생을 다 했는데 이렇게 되니 절망이 될 수 밖에 없었겠지요. 조국이라고 왔는데 온갖 고생을 다 당 하게 되니 여리서돈 더 벌어서 간다는 것은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생각 했던 것입니다. 거기다 올 때 빚을 내어 여행경비를 마련했고, 집에 돌아가 면 가족들이 돈벌어 오기를 기대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을 것입 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런 것 저런 것 생각하니 살기가 싫어서 그만 영 등포 고가도로 위에서 뛰어 내려 자살를 한 것입니다.여러분 이것이 우리 숨쉬고 살고 있는 서울에서 수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입니 다.

 이보다 더 처참한 상황이 많습니다. 나바라제라고 하는 28살된 네팔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은 대학을 졸업한 교사 출신인데 91년 1월달에 한국 에 와 김포 근처의 어느 가구 공장에 취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못된 사람을 만났는지 하루에 노동을 20시간 했다는 것입니다. 잠을 4시간 자고, 밥 먹고 나면 돌아서서 또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이 사람이 일하는 방과 공장이 함께 붙어 있었는데 24시간 문을 잠궈 놓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으면 문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24시간 감 금해 놓고 노예처럼 일을 시킨 것입니다. 거기다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했 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임금을 전부 포기하고 도망쳐 나온 것입니다. 그 리고는 두번째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거기서 일을하다 기계에 팔을 끼어 오 른팔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했는데 오랫동안 치료를 받 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의사가 말하기를 한달만 치료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 다. 놀고 있을 수가 없어 계속 일을 했습니다. 일을 하는 데도 임금을 주지 않아 항의를 했더니 업주가 하는 말이 '지금 너는 팔하나 가지고 일하니 임 금도 반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반에 해당하는 임금도 제대로 주 지 않았습니다. 임금도 못받고 팔은 아프고 병원에 갈 형편이 못되어 돈을 빌려 약과 진통제를 사먹고 해서 몇달 동안 약값 빚을 100만원 지게 되었습 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의사도 공장 주인도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게 되 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영등포에 있는 외국인 상담소에 와서 고발함으로 이 사실을 폭로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영등포에 있는 구로 희년 선교회와 남서울 교회, 잠실중앙교 회와 힘을 합해 구로희년 선교회를 설립하여 외국인 노동자를 섬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미미합니다. 수 많은 외국의 나그네들 이 이 땅에 와서 당하는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온 천지 에 교회가 있고 예수믿는 사람들이 많이 사는 서울 장안에서 이들은 외면당 한채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뜻있는 몇몇교회와 경실련 기 청협등에서 주관하여 외국인들을 돕는 행사들을 준비하는 일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이들을 돕는 일에 있어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기쁨으로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여인이 물을 좀 갖다 달라는 말을 듣고 순종하여 물을 가지러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11절에 이런 말씀이 또 나옵니다. "저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저를 불러 가로되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이 요청은 이 여인에게 참 고통스러운 요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먹 고 죽으려고 조금 남겨 놓은 밀가루 한웅큼 밖에 없는데 이 사람이 그걸 달 라고 한단 말입니다. 이런 점가한 상황에 그걸 조금 나눠 먹자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가찬 요청입니까. 생명을 내놓으라는 요청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박한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 여인에게 주어 집니다. 13절 14절에 그 말씀에 나옵니다.

 "두려워말고 가서 내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을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에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에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말씀 앞에서 여인은 순종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이 여인은 하 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참되므로 '내가 그 말씀대로 순종하리라' 하고 떡을 구워 엘리야에게 먼저 갖다 주고 그리 고 자기들이 먹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말씀이 권능을 발할 것을 믿고 내가 그 말씀을 의지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말씀에 기회를 주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듣고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로 결단하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행하고자 하는 결단을 가지고 이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 을 듣고 참 좋은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에게 그렇게 행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사르밧 과부의 이 야기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며, 나로 하여금 무엇을 고치기를 원하시며, 무엇을 포기하기를 원하시고, 무엇을 새롭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가를 배우 지 못하면 안됩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순종의 삶을 배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 다. 또한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축복의 말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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