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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의 중요성 (벧전 05: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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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은 우리가 진정한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무엇을 믿든지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진실 되게 믿는다고 해도 아주 그릇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버스 정류장에서 9번 버스가 꼭 온다고 진심으로 믿고 기다릴 수 있겠지만, 전혀 잘못된 확신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마음으로 잘 믿어도 9번 버스의 노선이 다르면, 기다리는 일은 무용할 것입니다.

믿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잘못 믿을 수 있고 우리의 믿음이 그릇된 목표를 지향할 수 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원한 가치가 있는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신뢰하는 유일한 방법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따라서 하나님께로 가는 단 하나의 길임을 믿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여러번 ‘굳게 서라’고 권면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견고해야 하며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모든 염려를 맡기라고 촉구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에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습니다.

 마귀는 실존합니다.

마귀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졌습니다. 사단도 그의 이름인데 ‘대적자’란 뜻입니다. 마귀는 고발자입니다. 스가랴 3장에서 마귀는 대제사장인 여호수아의 오른편에 서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같은 마귀의 위치는 여호수아를 고발하기 위한 것입니다.

마귀는 가장 악한 존재인데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 그는 성경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이 그의 사악한 제안을 따르도록 유혹하였습니다(참조, 마4:1-11, 눅4:1-13, 막1:13).

마귀는 바알세불이라고도 불리는데 하나님을 대항해서 싸우는 악의 세력들을 이끄는 왕을 가리킵니다(막3:22).

요한복음 14:30절에서는 마귀를 “이 세상 임금”이라고 하였고 바울은 그를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2:2)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고린도후서 11:14절에서는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자”로 묘사되었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과 사람을 중상하고 서로를 이간시키며 하나님에 대한 신자들의 믿음을 붕괴시키려고 합니다.

마귀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계획들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원수이며 선하고 참된 모든 것들의 대적입니다. 그는 모든 영역에서 맹활약 중이며 온 세상에 그의 대리자들을 두고 있습니다. 그의 하수인들은 잘 훈련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을 온갖 종류의 죄악 속으로 유인합니다. 마귀는 도색 잡지나 필름, 정계 및 재계, 마약, 기타 사회의 구석구석에서 부패와 육욕을 자극시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죄악에 가담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교인들이 부도덕한 마귀의 은근한 유혹에 쉽게 끌리고 있습니다. 마귀는 교인들을 실족시킴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려고 애씁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5:8). 로마의 원형 극장에는 지하에 가두어 둔 굶주린 사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물어 뜯으려고 풀려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굶주린 사자는 먹이를 찾기 마련입니다. 베드로는 사단을 이 사자의 모습에 견주어 묘사한 듯합니다. 사단은 주님으로부터 유인해 낼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노리면서 입에 침을 흐르며 기다립니다. 사자의 울부짖음은 성도들의 가슴에 공포와 전율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보호하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단은 포효하며 생명을 위협하여도 하나님의 손에 안전히 거하는 거듭난 신자들을 삼킬 수 없습니다.

한편 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큰 속임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귀 자신의 존재가 실존이 아니라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잉글랜드의 저지(Jersey) 섬에 가면 ‘마귀의 구멍’(the Devil's Hole)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 곳은 땅 속에 뚫린 대형 동굴인데 그 옆에 한 조각자가 상상한 마귀의 모습이 새워져 있습니다. 이 마귀는 꼬리가 말려 있고, 머리에 뿔들이 돋아 있으며, 색깔은 검고, 입가에 바보스런 미소를 짓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우스꽝스런 마귀를 보고 전혀 그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것입니다. 마귀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사람들이 생각할수록 마귀는 마음놓고 활동합니다.

 신자들은 마귀에 대항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그릇된 것들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나쁜 생각들로부터 자신들을 순수하게 지키려면 그릇된 생각, 마음을 자극시키는 것들을 의식적으로 회피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른다면 우리들의 삶에 악한 영향을 끼치는 일체의 사물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고 성경은 명령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들이 피해야 할 것들을 여러 가지로 열거하였습니다. “음행을 피하라”(고전6:18),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전10:14),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딤후2:22).

그런데 성경은 우리들이 마귀를 만날 때, 도망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굳게 서서 마귀를 대항하여야 합니다. 야고보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귀를 대항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싸우는 자입니다. 마귀의 울부짖음은 우리를 물어뜯고 싶은 욕망과 또한 그럴 힘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럼 마귀를 대항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이것을 하라’거나 혹은 ‘저것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우리 스스로 마귀를 저항하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악한 자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있는 매우 실제적인 조언을 해 줍니다.

첫째, “근신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1:13절과 4:7절에서 이미 이와 똑같은 권면을 하였습니다. ‘근신’이란 현실을 직시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우리는 옳다고 알고 있는 것에서 이탈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술취하는 것이 위험하고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과음하여 만취된 후 여러 가지 어리석은 언행을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매일 성경을 묵상하지 않으면 신앙 생활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자랄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말씀의 묵상을 자꾸 빼어 먹다 보면 자신이 세상 일에 정신이 쏠려 있음을 알고 후회하게 됩니다. 근신은 우리들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둘째, “깨어라.”는 것입니다. 만일 야수가 길에 나와서 으르렁거린다면 지각이 있는 자라면 모두 경계할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에게 주셨던 말씀을 기억했을지 모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라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8). 그러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잠을 자느라고 배반자와 그의 일당들이 접근하는 것을 몰랐습니다.

셋째, “믿음을 굳게 하여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주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거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믿음이 ‘복음의 교훈’을 뜻할 때도 있습니다. 9절의 믿음이 바로 그런 의미로 쓰여졌습니다. 이 말은 우리들이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을 많이 연구하고 높은 학위들을 소유한 성경 전문가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근본적인 복음의 교리를 믿지 않는 자들도 있습니다. 또한 마귀의 존재를 부정하는 신학자들도 있고 성경의 기적을 유치한 신화처럼 다루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읽고 그 교훈을 실천에 옮기는 자들은 “믿음으로 굳게”하는 사람들입니다. 참된 신자들은 ‘믿음의 시련’(1:7)을 겪으면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제 생활 속에서 이행해 보면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음을 금방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고난들은 신자의 믿음을 더 강화시켜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느낌이나 어떤 복잡한 신학적 논쟁을 이해하는 지적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분명하고 직설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에서 가르친 교리들 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예수님 자신처럼 우리 신앙의 반석입니다. 이 기초 위에 굳게 서 있는 자들은 결코 붕괴되지 않습니다.

 격려의 말씀 (벧전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성도들이 매우 어려운 시련을 통과할 때, 마귀는 우리 마음을 자신들의 고난 속으로 다 쏠리게 하여 우리를 침체에 빠지게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른 성도들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만 고난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의(義)를 위하여 고난을 당한다면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그러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들도 여러분과 동일한 종류의 시련을 겪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바울도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와 비슷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빌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1:30)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우리들이 고난을 받을 때, 다른 성도들도 비슷한 믿음의 시련을 겪는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귀를 대항하려는 우리의 마음에 큰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항상 도우신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벧전5:10)“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은혜라는 말을 여러번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풍성하고 다양합니다(4:10). 이 은혜는 겸손한 자들에게 주어집니다(5:5). 은혜의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은혜가 하나님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람이 응해도 되고 거절해도 되는 단순한 초청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령한 부름입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신령한 명령이므로 부름을 받은 자는 반드시 복종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1:15, 2:9, 21 3:9, 5:10절에서도 하나님의 부르심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부르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엡1:4)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또한 우리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고난을 받을 때에는 고통이 너무도 오래 지속되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고후4:17) 한다는 바울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고난이 비록 일생 동안 계속될지언정, 우리의 마음이 고통으로 멍들고 한숨으로 채워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손수 우리들을 회복시키시고, 강하게 하시며 굳게 서게 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커다란 위로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고 당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전투가 종료된 후에 다시 우리들의 힘을 온전히 회복하시고 강건케 하실 것입니다.

본 항목 끝의 송영에서 베드로는 권력이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말은 큰 통치자의 속성이나 직명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력은 시들고 마는 이 세상 지배자들의 권위나 능력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모든 은혜의 하나님)에게 있을 지어다 아멘”(5:11)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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