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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의 합당한 증인 (살전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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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전 2:1-5절을 읽으면 얼른 마음에 들어 오지를 않지요. 또 “야 이 말씀은 정말로 좋다”고 줄을 그을 만한 귀절도 찾아 지지가 않을 거에요. 이것이 서신서가 갖는 약점입니다. 특히 데살로니가 전서는 그럴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느끼지 못하면 나도 그래요. 여러분의 마음에 쏙 들어 오지 않는다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을 대할 때는 더 겸손하고 더 신중해야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런 말씀들은 하나님이 아직도 뚜껑을 열어 보여 주시지 않는 비밀에 속한 부분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배우면서 2가지 단어만 꼭 기억하면 되겠습니다.
은혜 충성 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들어와서 전도한 것이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지금 스스로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하고 1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전도한 것이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평가하고 있습니다.이렇게 바울의 데살로니가 전도는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도가 다 성공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도 가끔 실패를 했습니다. 아덴의 선교는 실패라고 볼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전도한 것은 바울이 스스로 이것은 성공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바울의 후예들입니다.
바울이 복음의 사역자로 일했습니까 우리 모두도 복음의 사역자로 주님 앞에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바울이 성공한 사례를 놓고 우리도 관심을 기울일수 밖에 없습니다. 그가 성공한 비결이 어디 있느냐 나도 바울처럼 해서 성공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전도가 실패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이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실패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는 도구인 인간이 어딘가 잘 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의 내용을 이 시간에 살펴 볼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은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완벽합니다. 따라서 성공하는 복음의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 바울로부터 인간인 바울,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바울이 어떤 면에서 특별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나도 바울처럼 되어야 하겠다
나도 남은 여생 주님의 복음을 가지고 일할 때에 항상 성공할 수 있겠다
이렇게 느낄수 있습니다.

1.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전부터 하나님
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입니다.

4절을 봅니다.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얻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누가 하나님의 옳다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바울이, 또 바울과 함께한 실루아노가...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받아서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다.-말을 좀 바꿔 볼까요 나와 실루아노는 하나님 보기에 신실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맡기셨다 그 말입니다.
여기서 옳게 여기심을 받았다는 말은 인정을 받았다, 신뢰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신뢰했어요! 그래서 바울에게 복음을 맡겼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비슷한 말씀이 디모데전서 1:12절에 나옵니다.나를 하나님이 충성되이 여겨서 내게 복음 전하는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똑 같은 의미지요.

여기에서 우리의 흥미를 끄는 대목이 있습니다.
언제 바울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느냐 하는 점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가지고 열심히 연구하고,열심히 전하니까 그 충성됨을 보시고 하나님이 바울을 인정한 것입니까 아니면, 바울이 아직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바울을 그렇게 보셨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어느 쪽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아도, “내가 한번도 복음 전한 일이 없는데, 하나님이 먼저 나를 충성한 자로, 신실한 자로,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언제 바울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까-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습니다.
인간의 공로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빈손인 데도 하나님이 그를 좋게 보셨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괴수인 사람을 놓고, 하나님이 충성되게 보셨다니,진실하게 보셨다니 하나님도 이상한 분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을 했지요,포악자요,핍박자요. 아무리 보아도 그를 진실하다고 볼 근거가 없어요.
하나님이 아무리 뜯어 보아도, 그에게서 충성될 수 있는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놀랍게도 하나님은 죄인의 괴수를 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점을 찍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한마디로 요약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에요.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우신 분이에요.
저 같은 경우에도 바울의 경우와 꼭 일치한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 강단을 맡기실 때에, 하나님이 저를 충성되이 보셨으니까, 아마 저를 신실한 사람으로 보셨으니까, 맡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내가 신실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언제 보셨을까요
내가 사랑의 교회 강단을 맡기 전에, 하나님께 특별히 한 것이 있나요 아무리 생각해도 한 것이 없습니다. 한 것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보시고 사랑의 교회 강단을 맡기셨습니다. 이것이은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복음을 맡겼습니다.
뭘보고 압니까 우리 모두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한 성령을 마셨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부어 주신 이유가 온 천하에 복음의 증인 되라 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증인이 되리라 는 말은 하나님이 너희를 내 증인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피동형입니다. 우리는 끌려가는 것이고, 우리를 그의 증인으로 능동적으로 만드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우리를 증인으로 만들었을까요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맡기셨을까요
그 이유가 있어요!
우리를 어떤 자로 인정하셨기 때문입니까
우리를 신실한 자로 인정하셨습니다. 참 이것은 놀라운 은혭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복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끼시는 보뱁니다. 고린도후서 4:7절에 말씀대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그랬는데, 이 보배는 무엇일까요 복음일수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일수도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라고 해도 좋고, 복음이라고 해도 좋아요. 왜 그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곧 복음이니까요.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구원의 진리, 이것은 보배로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가끔 그것이 무엇인가 하고 들여다 보고 싶어 한다고 어느 저자는 말했습니다. 천사들이 굉장히 궁금해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이 소중히 간직하는 보물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누구나 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가 제일 아끼는 것을 어떤 사람에게 맡길 때는 굉장히 주의를 합니다. 믿을수 있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맡기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복음의 증인으로 삼으셔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주셨다면, 우리에게 복음을 맡기셨다는 말인데, 바울을 신실하게 보신 하나님이 우리도 신실하게 보셨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하면,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내가 복음 전할 수 있는 능력자로 평가도 받기 전에, 하나님이 무조건 나를 신실하게 보시고 복음을 맡기신 것입니다. 이것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습니다.

사실 보배를 맡길 때는 그 보배를 맡을 사람을 이모저모로 많이 뜯어 보고, 관찰하고 검토해서 믿을수 있다고 했을 때에 맡겨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목회를 잘 하고 계신 분입니다. 몇년전에 L.A에 와서 부흥회를 인도했습니다. 마치고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로 돌아 갈려고 하는데, 부흥회한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은 자매가 떠나는 목사님께 지갑 같은 것을 맡기면서 이것을 꼭 누구누구에게 전해 주십시요.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요 했더니 보석이 들어 있습니다.했습니다. 보석이 꽤 많이 들어 있는 것 같았어요.
목사님은 그것을 받아서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그런데 이 맡기는 사람은 아무 보관증도 받지 않고, 서류도 남기지 않고 맡겼습니다. 왜 맡겼습니까 목사니까 믿으니까 맡기는 것이지요.
그러데 이 목사님이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그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도난을 당해 버렸어요. 그래서 목사님이 아주 홍역을 치루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인이 법정에다 고소를 했습니다. 고소한 제목은 목사가 중간에서 감추고 잃어 버렸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가막힙니까 무슨 재주로 변명을 합니까

아무리 은혜를 받아도 돈 문제만 나오면 금방 마귀로 변해요! 참 그것이 인간의약점이에요. 그런데 이 목사님도 어리석었습니다. 그것을 받았으면 소중하게 간직하든지, 아니면 자신이 없으면 못 맡겠다든지 해야지. 얼마나 남의 나라 가서 피땀 흘리고 번 것으로 마련해서 보내는 것이었는데 실수를 해가지고...,해결의 방법이 없습니다.

무엇이든지 가장 귀한 것을 맡길 때에는 믿을 사람에게 맡긴다는 말입니다. 목사니까 맡겼다는 것이지요. 지갑을 열고 한두개 꺼내고 전해 줄 일도 없었다고 믿고 맡긴 것이지요. 그런데도 탈이 났습니다.
여러분들 저에게 절대로 그런 것을 맡기지 마세요.

우리 하나님이 복음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은혭니다. 그러니 자연히 이 은혜는 큰 감격을 안겨다 줍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인데, 하나님이 나를 신실한 자로 믿으신단 말인가 도대체 나 같은 것이 어디에 믿을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보배로 인정하시는 복음을 나에게 맡겨서 전하라고 말씀하시는가 이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기가막힌 감격을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바울은 일생동안 이 은혜에서 오는 감격에 붙들려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몇십년을 하루처럼 전했고, 아무리 어려운 고통과 시험이 와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왜 이 은혜의 감격 때문에 그랬습니다. 이런 은혜의 감격이 뒤에서 추진력이 되지 않았다면, 아마 한 1년쯤 전하다가는 매 맞고,감옥에 갇힐 때에 끝났을 겁니다. 아무리 고통을 당해도 복음을 전하는 일을 중단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을 나를 믿어 주셨다는 그 감격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감격이 있어요.

이 은혜의 감격이 우리로 하여금 충성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충성의 정신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즉 복음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왜 이렇게 말합니까
하나님이 이와같은 복음을 맡겼다는 것은 감격 없이 받을 수 없는 은혜이기 때문에 이건 생명을 걸고 충성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뜨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자, 바울에게 이와같은 은혜가 있었어요.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있어야 하겠어요.
집사니까. 속장이니까, 전해야지. 교사니까 어쩔수 없어서 설교해야지.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믿으시고 그 귀한 보배같은 진리를 맡겨 주셨는데, 내가 충성을 안하고 어떻게 견디겠어!
이 시간 우리 주님께서 이 은혜의 감격 주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의 마음 속에 나를 믿어 주신 그 감격 말입니다.
나를 믿어 주시고, 하나님의 보배를 맡겨 주신 그 감격말입니다. 그 감격을 우리 가슴 속에 뜨겁게 한번 느껴 보자구요. 그러면 충성 안할래야 충성 안할 수가 없습니다. 남이 알아 주든, 못 알아 주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이 보배를 소중히 간직하고, 하나님이 전하라는 사람에게 감격한 마음에서 전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야겠습니다.
사랑의 교회의 추진력이 바로 이런 은혜의 감격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자 이래서 바울은 생명을 걸고 충성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충성하는 사람이었는가를 세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많은 고난 가운데서 충성했습니다.

2절 봅니다.너희가 아는 바와같이 우리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도,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오기 전에 바울은 빌립보에서 전도했습니다.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붙잡혀서 매를 싫컷 맞고 쇠고랑에 차여서 감옥에 갇히는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고린도후서 12:23절에서 바울이 자기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나는 매도 수없이 맞았다 고 했습니다. 바울이 그 수없이 맞은 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디서 맞았으며,얼마나 맞았는지를 이야기를 안합니다. 꼭 하나 이야기합니다. 빌립보에서 맞은 것 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울이 평생 못잊을 매였는지도 모르지요.
구약에 보면 40대까지는 매를 때려라. 그러나 그 이상 때리면 네가 그 사람을 짐승처럼 대우한다는 오해를 받을까 두렵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간답게 때려야 합니다. 오늘날 숨어서 행해지는 고문이라든지 갖가지 추악한 폭력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일단 사람 대우를 하는 면에서 그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잘못을 해도 사람답게 벌을 가하고, 때려야 합니다.
그런데 빌립보에서 바울이 맞을 때에는 자기가 로마 시민이라는 것을 일체 말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매를 맞아도 호되게 개처럼 맞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사건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심한 고통과 모욕을 당했으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 정상이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어디가서 몇년간 쉬고 나서 악몽 같은 일을 잊은 다음에 다시 일을 해야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느나,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너희 중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 그랬습니다.

너희 중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도 순탄하지가 않았어요.
많은 도전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많은 반대가 있었다고 그랬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포기하지 않고 전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은혜의 감격 때문입니다.
은혜라는 것이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강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가 그 교회의 생명입니다. 성경을 얼마나 아느냐 그것 아니에요. 은혜를 얼마만큼 깊이 체험하고 감격하느냐 이겁니다. 이게 교회의 생명이에요. 그러면 성경을 많이 안알아도 되겠네.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천만에요.
제가 말하는 것은 성경을 많이 아는데서 머무른 사람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 말입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 만큼. 은혜 속에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그러니까 성경을 가르치는데서 끝나 버리면 안돼요. 그 성경을 공부하고 그 성경을 깨닫는 안에서 은혜를 얼마만큼 체험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은혜에 강하게 사로잡힌 사람은 어떠한 핍박과 고난이 와도,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후퇴를 안합니다. 믿습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강한 힘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강한 열정, 강한 감격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은혜가 부족한 사람인지요.
복음들고 나가서 전도하다가, 누구에게 모욕 한번 당하고 오면, 저녁 밥도 먹지 아니하고 그냥 이불 뒤집어 쓰고 자버립니다.그리고는 몇일, 몇 달 동안 복음 전할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 일을 잊어 버릴 때쯤 되어야 다시 복음을 전할 마음이 생깁니다. 우리는 얼마나 약합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러지 않았어요. 빌립보에서 고난과 모욕을 당했는데도, 그래,좋다 데살로니가에 가서 내가 또 해 본다. 왜 그렇게 할수 있었나요. 은혜의 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깨끗한 마음을가지고 충성했습니다.

3절을 보면 우리의 권면은하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간사한 생각이나, 부정한 방법이나, 궤계를 쓰지 않았다 그랬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의 할 것은 부정이라는 말입니다. 부정이라는 뜻은 불순한 동기를 말합니다. 깨끗하지 못한 동기를 말합니다.
그 다음에 5절에 가서 보면,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그랬습니다. 탐심의 탈이라는 말을 주의 하세요.
그러면 두가집니다.
부정과 탐심의 탈, 이 두가지를 묶어 놓고 보면, 이것은 동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순한 동기가 마음에 들어 있으면, 부정한 사람이요, 그 불순한 동기를 우리가 구체적으로 한번 분석을 해보며, 대부분이 탐심입니다.
무슨 교회가 욕심이 있어서 복음을 전한다 그 말입니다.
바울 당시에 좋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복음을 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를들면, 자기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예수 전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기 세력을 확장하는 수단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동기가 불순한 것입니다.
특별히 자기 생계를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바울의 눈에 정말로 불순한 것으로 비쳤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바울은 돈문제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돈거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나칠 정도로 과민한 사람이었어요.
몇 곳을 지적해 드립니다.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말할 때에, 사도행전 20:33절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 고린도후서 7:2에 우리가 아무에게도 불의를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전혀 경제적인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11:9절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어떤 물질적인 폐를 끼치지 아니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고린도후서 12:17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경제적인 이윤을 위해서 일한 일이 자기도 없었고, 자기가 보낸자 중에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고린도후서 12:14-15에는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자신까지 허비 하리니 그는 자기 자신을 털어 가면서 복음을 전했지, 경제적인 어떤 이문을 마음에 두고, 어떤 돈버는 수단으로, 자기 배를 채우는 수단으로, 자기 욕심을 메꾸는 수단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이야깁니다.
바울은 복음 외판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일을 하든, 교회 밖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든 간에, 이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어떤 경우에는 불순한 동기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어요. 저 사람은 경제적으로 부유 하니까 사귀어 두면 좋겠다. 또 그러고, 저런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면 십일조도 많이 내고,그러면 교회도 부유해 지고 여러가지 면에서 좋겠다. 그래서 접근해서 교회로 인도해 볼려고 애를 씁니다. 벌써 동기가 틀렸어요.
잘못된 동깁니다.

요즈음 선교사로 가기를 지원하는 젊은이가 많고, 신학교에 가서 목회 하겠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 사람들이 정말로 그 동기가 순수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습니다.

날마다 살피고 살펴야 되는 것이 있다면 동기가 순수하냐 하는 것입니다.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진심으로 순수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충성하느냐
가만히 보면, 교회 안에서 충성하는 배후에 사심이 많이 도사리고 있으며, 얼마나 불순한 동기들이 많이 작용하고 있는지 가끔가끔 보면 가슴을 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무엇이 하나라도 안되면 벌써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이 교회마다 얼마나 많아요, 잘 믿는 다는 사람들에게서,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교회 안의 어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신실하다고 보아준 그 감격하나로 만족했습니다. 아무것도 다른 것 욕심이 없었어요.
다른 것은 하나도 없어도 좋으니,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신 이것만 해도, 나는 내 생명 다 바쳐 주님 앞에 충성하겠노라.
바울의 중심이 이거에요.
오늘 우리에게 이런 중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순수한 동기가 있기를 바랍니다.

3. 바울은 진실한 방법을 가지고 충성했습니다.

우리가 읽은 3절과 5절에 보면 간사 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아첨의 말이라는 말 이 나옵니다.그 다음에 3절 끝에 괴계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세가지 단어를 묶어서 보면,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수단을 이야기합니다.
이 세가지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잘 못하면 이용될 수 있는 수단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밖힌 것을 들고 나가서 전할려고 해 보세요. 사람들이 그 복음을 어색하게 듣는 줄 아세요. 사람들의 눈에 그 복음이 얼마나 어리석게 보이는지 아세요.
여러가지 시국이야기라든지 우리 주변에 있는 사소한 이야기를 할 때는 열이 나고 즐겁게 하던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한마디 전해 드릴까요 하면 얼굴이 시커매져 버리는 것, 우리가 잘 알잖아요. 얼마나 복음 전하는 것으로 거리감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우리가 어떤 유혹을 받느냐 하면,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도록 어떻게 말을 할수 없을까 그래가지고 좀 직선적인 말은 슬슬 다듬어 보고, 어떻게 그 사람의 아픈 데를 찌를수 있는 말은 살작살작 피해 보면서 좀 그 사람을 거스리지 않을수 있는 말을 해 볼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은 벌써 아첨의 말로 우리가 돌아 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급적이면 우리가 사람들에게 안도감을 줄수 있는 말을 사용할려고 합니다. 뭔가 자극을 주는 것을 피하고요, 뭔가 평안한 마음을 줄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우리는 나도 모르게 이상한 말을 사용합니다. 진실한 복음은 말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이런 유혹을 얼마나 많이 받았겠어요. 그러나 그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고집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맡겨 주신 보밴데...., 어떻게 내가 적당히 포장을 해 가지고 전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전하라고 한 그대로 전해야지요.
그 보배를 보배답게 전해 야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은혜의 감격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안됩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듣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좀 바꾸어야지요. 사람들의 마음에 들게 좀 각색을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 그거 하나 만으로 만족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좋게 들리든, 사람들이 자기를 욕하든, 자기를 이해해 주지 못하든 상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할려고 노력했습니다.
집회를 한다든지, 전도를 위한 행사를 하려고 보면, 아첨의 말을 한다든지,궤계를 쓴다든지,간사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가 참 고통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복음의 중매장이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지 중매장이가 아닙니다.

바울은 이런 인간적인 방법을 조금도 동원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조금도 변색시키지 않고 전했습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전한 말씀은 두가지로 요약할수 있습니다. 은혜와 충성.
어떤 사람이 충성할수 있습니까 은혜 받은 사람.
어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충성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보배를 맡겨 주셨다하는 감격입니다. 이 감격 가진 사람이 복음을 위해서 충성 할 때, 고난이 와도 낙망하지 아니하며, 참으로 사심이 없는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충성할 수 있으며, 인간적인 수단 방법을 동원하지 않고, 사람에게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전할려고 합니다.
이것이 충성이요!
우리는 바울의 후예들입니다. 이와같은 충성하는 하나님의 자녀들,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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