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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죽음과 신앙 (살전 04: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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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들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마치 소망없는 세상 사람들이 슬퍼하듯이 몹시 땅을 치면 슬퍼했던 모양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슬퍼하지 아니했다면 이와같은 충고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무 슬퍼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하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성도의 죽음을 놓고 불신자나 다름없는 곡을 하며,괴로워 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들이 너무 예수님의 재림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믿는 성도의 죽음과 그 죽은 후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고요. 그러니 자연적으로 그 당시의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대처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살던 당시의 헬라 문화권에서는 주로 죽음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철학적인 사상들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에스큐로스 같은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 완전히 비관론입니다.그리고 카툴로스 같은 철학자는 [우리의 짧은 생명의 불이 꺼지면 잠을 자는 영원한 밤이 계속될 뿐이다.] 더 이상 낮이라는 것은 있을수 없고 햇빛을 볼수 없다. 완전히 밤이다. 이런 철학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무엇을 배운 것이 없는 이상, 지금까지 예수 믿기 전에 사로잡고 있던 잠재적인 의식이 지배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심지어는 예수 믿고 나서도 가끔씩 그런 생각에 빠지는 경우가 있어요. 불교의 윤회설을 너무나 오래 믿어 왔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조상의 업보에 따라서 소가 되기도 하고, 개가 되기도 한다고 윤회가 된다는 것을 어쩌면 그렇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습니다.
이 헬라 문화권에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이다 하는 철학적인 사상에 자기도 모르게 감염되어 있어서 슬퍼하지 않을수 없는 형편에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해, 소망 없는 사람들처럼 죽은자를 앞에 놓고 슬퍼하지 말라. 하는 것은 슬픔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울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끔씩 이런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고, 냉정하게 자기 자신을 억제하면서 지키는 사람들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야, 믿음이 좋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은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믿음이 좋은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죽은자를 앞에 놓고 유달리 슬퍼하고 통곡하는 자를 보면, 아, 저사람 믿음이 약한가 보다 하고 은근히 비판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죽은자를 놓고 슬퍼한다고 해서 곧 믿음이 적은 사람이라고 우리가 평가를 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볼때는 [소망이 없는 자와 같이 슬퍼하지 말라는 것] 곧 죽은자를 앞에 놓고 슬퍼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도 자기 사랑하는 자가 죽었을 때 우셨다고 그랬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우신 차원은 우리가 생각하는 어떤 감정의 차원과는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에 놓고는 통분해서 우셨다고 그랬습니다. 정상이에요. 또 스데반이 돌더미 속에서 기독교 역사상 첫 순교자의 꽃을 피웠는데, 그 피투성이가 된 스데반을 친구들이 찾아와서 그 눈으로 볼수 없는 스데반의 시신을 추스려서 피를 씻고,옷을 갈아 입히고 장례를 하면서, 저를 위하여 크게 울었더라고 사도행전에는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앞 길이 창창하고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 크게 기대를 걸었던 젊은이가 돌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에 크게 울었더라. 이것이 믿음이 없어서 운 것입니까 아니에요. 그렇게 해석을 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경험을 한바에의하면,믿음이 좋은 사람이 가는 경우에 더 슬플 때가 많아요. 왜 그런가하면 우리가 잘 아는바와 같이 믿음이 좋으면 하나님이 장수하게 할 것이라고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믿음이 좋으면 하나님께서 있던 병도 고쳐 주시고,또 이모저모로 축복을 주신다고 생각하고 의지하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믿음이 하루 아침에 뿌리채 뽑히는 것 같은 절망을 느끼는 사건이 일어 납니다.
너무 기대했던, 너무 젊고,너무 아까운 형제가 먼저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떠나 버리는 모습을 볼 때에 그것만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믿음이 없어서 슬퍼하는 것인가요,소망이 없기 때문에 통곡하는 것입니까 아니에요. 어떤 면에는 더 슬퍼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린자녀가 먼저 떠나는 것을 볼 때에 누가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자가 자기 곁을 떠나는데 누가 목석처럼 덤덤히 바라 보겠습니까 그러니 만약에 믿음이 있어야 된다는 이유 때문에 인간의 감정과 정서의 흐름을 강제로 틀어 막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만큼 폭군이 없다고 봅니다.
울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실컷 울도록 내버려 두라고 그럽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아요 울 때는 울어 야지요.
저는 성도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주체하지 못해서, 임종 예배를 드릴 때에도 눈물 때문에 책을 읽지 못할 정도로 슬퍼하고, 장례식을 치루면서도, 수백명의 조객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설교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누가 죽음의 슬픔 앞을 가로 막을 자가 있습니까 누가 사랑하는 자를 떠나 보내면서 우는 자를 울지 말라고 말할수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우리가 여기서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소망이 없는 불신자의 슬픔과 소망을 가진 성도들의 슬픔과의 차이점이 어디있나요. 똑같이 눈물 흘리고, 똑같이 통곡하고, 똑 같이 몇일을 자지 못하고 몸부림치는 것은 다를 것이 없는데, 무엇이 차이가 있습니까

제가 볼 때는 소망이 있는 성도의 슬픔에는 세가지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눈물 가운데서도, 탄식 중에도 세가지가 있어요.

첫째는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주여, 내가 이렇게 슬픔을 당하고 내 몸을 가누지 못할 슬픔 앞에서도 주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주님은 나의 구원잡니다.주님은 나의 생명이요,내 행복입니다. 고백하는 것이 있어요. 이것이 신잡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승복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내가 이해 할수 없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처음에는 정신없이 막 헤메다가도 주님 앞에 엎드려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주님,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하면 저는 따르겠습니다.] [주님이 주신 잔이면 저는 마시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있습니다.
신자의 슬픔 안에는 감사가 있어요.
비록 내가 견디지 못할 슬픔을 안고 있지만,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 주실 줄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또 불러간 영혼을 구원해 주심을 감사하오며,남겨 놓은 우리들에게 은혜로 위로로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하면서 감사하는 것이 있어요. 이것이 신자들이 다른 점입니다.

성경에 참 좋은 예가 있지요. 사무엘하 12장을 여러분이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한번 들어 보세요.
다윗 임금이 신하의 아내를 빼앗아 불륜의 관계를 맺었고,거기에서 어린 옥동자 하나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니까 다윗이 하는 짓이 도무지 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 아이를 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막연히 병들었다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치시는 것이구나. 하고 해석을 하지 아니할수 없도록 그 아이를 다루신 것입니다.] 다윗이 보니까 하나님이 매를 드셨구나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에 다윗은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식음을 전폐하고, 모든 신하들을 주변에서 물러가게 하고, 땅바닥에 엎드려 일주일을 몸부림을 쳤습니다. 아마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분명히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하나님, 죄를 지었으면,내가 지었지 저 애가 지었나요. 하나님이여, 저 핏덩이가 무엇을 안다고 그러시나요. 차라리 벌을 주시려면 저에게 주세요.] 그러나 아이가 죽었습니다. 아이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자말자 다윗 보세요. 그는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 입고, 그 다음에 보세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자기 궁으로 돌아 왔더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 속에는 고백과 승복과 감사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 그 어린아이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아버지의 뜻이 어디 있든 간에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의 하시는 일은 모두가 선하십니다. 내가 감히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 드립니다. 이 다윗의 행위를 보세요. 믿음이 없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일주일 동안 눈물흘리고, 탄식하고 고통하고 몸부림친 사람이라도 세상 사람과 달라요. 소망 없는 사람과 달라요.

우리 모두가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만, 우리 앞에 어떤 일이 닥칠지 아무도 모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내 앞에 모든 사람들을 한없이 울려 놓고 갈지도 모르고요. 아니면, 내 사랑하는 가까운자들이 먼저 떠나므로 내가 넋을 잃고 통곡을 할지 모르고요. 알수 없어요. 다행히 하나님의 은혜로 그저 자녀들이 빨리 좀 죽었으면 좋겠다 할 때까지 살다가 죽으면 좋겠지요.
그러나 그 누구도 죽음을 앞에 놓고 통곡하고 슬퍼하는 아픔을 한번도 안 당하고 세상을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소망 없는 자와 같은 슬픔을 보이지 않도록 지금부터 자기 자신을 믿음으로 잘 다듬어 두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가지고 사랑하는 자를 이 세상에서 먼저 보내는 슬픔을 이해하고, 또 먼저 간 영혼이 어떻게 되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으면 우리는 슬픔을 당한 형제들을 위로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됩니다.
18절 보세요 바울이 죽은자의 모든 운명을 다 설명한 다음에 [그러므로 너희는 서로 위로하라.]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위로 하라고 했나요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 하라고 했습니다.
사실 현대교회는 위로할 수 있는 자격자들이 너무 적다는 것이 문제점입니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시간과 함께 점점 그 수가 많아 지는데 위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도무지 가누지 못하는 슬픔과 혼자서 도무지 마음으로 삭일수 없는 고통을 않고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은데, 그들을 위로 할수 있는 사람들이 주변에 적어요. 왜 적습니까 이 여러말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위로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자들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지나가는 말로 [세월이 지나가면 약이다-세월이 지나가면 다 잊어버리게 되느니라]고 말하고, 눈물이나 닦아주고, 등어리나 두드려 주고 끝납니다마는 그것은 답답하니까 하는 짓이지, 진정한 위로가 됩니까 진정한 위로는 어디에서 옵니까 이 이 여러말로-이 여러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깊은 진리를 가지고 슬픔을 당한 사람들을 적절하게 위로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알아야 위로 할 것이 아닙에요.
저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참으로 슬픔과 고통 당하는 형제들이 옆에 있을 때,위로 할수 있는 자격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 축원합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제동을 걸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급하게 돌아가는 현시점에서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일어 날지 전혀 예측을 할 수 없습니다. 정치적으로,군사적으로,경제적으로,세계의 외교간계가 갑자기 어떻게 엉클어져서 어떤 일이 우발적으로 일어날지 전혀 우리는 알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쳐 버리는 일도 일어 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잃어 버리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길 거리를 방황하는 때가 올지도 모릅니다. 마땅히 슬픈 일을 보아도 슬퍼할 줄 모른는 인간들이 온 사방에서 날뛰는 무서운 세상이 될지도 모릅니다. 누가 그들을 진실로 위로 할수가 있습니까
이 여러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 만이 위로 할 수있습니다.
그런의미에서 골 3:16절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풍성히 거하여 피차 서로 권면하고, 피차 서로 가르치라]그랬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속에 풍성히 거하지 아니하면 안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여러말이 내 마음의 양식으로 또 내 마음에 진리로,내 마음의 능력으로 준비되어 있지 아니하면, 슬픔 당한자 위로하지 못합니다. 그런의미에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더 가까이 하세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죽은자를 앞에 놓고 슬퍼하지 말아야 할, 다시말하면 세상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아야 될 중요한 두가지 이유를 바울이 본문에서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그들이 죽은 것이 아니고, 자는 자들이기 때문이고
두번째 이유는 주님이 재림 하실 때 그들을 데리고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처럼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 시간에는 시간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성도는 죽는 것이 아니고, 잔다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육체의 죽음을 놓고, 잔다는 하는 의미가 어디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13절을 보면,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 다음에 14절 중간에 가서도, [이와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 15 끝에 가서도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라고 세번이나 나옵니다.
어떻게 성도의 죽음이 자는 것일수 있습니까

마가복음 5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예수님이 야이로의 간청에 못 이겨서 그의 집을 찾아 갔을 때는 그의 딸은 숨을 거둔지가 오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울며,촛불을 켜고,꽃을 가져다 놓고 야단법석입니다. 그런 분위기를 주님이 들어가 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비웃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세요. 조금 후에 예수님이 그 아이를 보고, [일어나라]하니까 일어났어요. 안 일어 났어요.
주님이 잔다고 하는 말씀을 한 이유가 있어요. 성도의 죽음을 놓고,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하는 그 말속에는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 것이냐하면,다시 일어 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부활한다는 것을 그 말속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잔다잔다 하니까 무의식 속에서 영원히 자는 것을 말하는 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거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런 큰 축복을 받게된 근거가 있습니다.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진데, 이와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자 보세요. 예수님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꼭 같은 절 안에서 성도의 죽음에 대해서는 잔다고 표현합니다. 무엇이 있을 것 같지 않으세요. 여기서 예수 안에서 라는 말은 원문 상으로도 그렇습니다마는 권위있는 성서 학자들은 원문의 뜻대로 예수를 통하여 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러면 예수를 통하여 가 킵니다. 이 키를 놓고 양쪽을 한번 연결시켜 보자 그 말입니다.
예수는 죽었다, 우리는 잔다. 그 사이에 우리를 통하여. 아마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 무엇인가 중요한 진리를 가르쳐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렇게 표현해 보겠어요.
예수님은 언제 죽으셨나요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렇게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그 잔인하고 무도한 십자가의 형틀에 달려 완전히 죽어 주셨습니다. 믿습니까 그는 영적인 죽음을 당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무엇이 영적 죽음입니까 하나님을부터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영적인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의 죄 때문에 우리가 당할 죽음을 완전히 뒤집어 쓰고 완전히 영적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6시간 매달리셔서 완전히 피를 쏟으시고, 나 중에는 심장이 터져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나를 위해서 당하셨습니다.
그것 뿐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지옥에서 당할 영원한 죽음까지 십자가 위에서 완전히 다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적죽음이든,육체의 죽음이든,영원한 죽음이든 예수님은 모든 죽음을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완전히 다 체험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완전한 죽음이요!

자,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수는 완전히 죽음으로 우리는 부활할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하여 전에 이 말이 키라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얻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 예수가 계시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죽음은 영원한 죽음이 되고 말았을 것이요, 완전한 죽음이 되고 말았을 것이지만, 예수가 계셨기 때문에 우리의 죽음은 잠자는 것으로 끝납니다.
완전히 우리를 위해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일으켰습니다. 베드로가 설교를 하면서 큰소리로 외쳤던 것처럼,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느니라. 예, 완전히 죽은 예수를 살렸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통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자가 된 우리를 살리지 않겠습니까 어느 것이 더 쉬울까요 완전히 죽은자를 살리는 것이 쉬워요 잠자는 자를 살리는 것이 쉬워요 잠자는 것이 쉽겠지요. 그러니까 우리의 불활이라는 것은 이미 물으나마나한 기정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우리에게 큰 축복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비록 키도 크지 못하고,외모도 볼 품이 없고, 가진 것이 보잘 것 없어도, 오히려 예수 잘 믿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이 더 큽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55절을 보면 바울의 위대한 승전가요 개선장군의 노래가 나옵니다. 다 같이 읽읍시다.[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이것은 사망을 비웃는 말입니다. 사망이 우리를 이겼나요 천만에요. 57절을 봅니다.[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이 말을 좀 바꾸어 봅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죽음을 극복하고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왜 우리가 죽음을 극복했다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다가 깨어날 사람입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승리잡니다. 그래서 58절에 [그럼으로 내 사랑하는 자들아, 견고하며,흔들리지 말며,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아무리 슬프고 고통 스러운 일을 당하도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며, 하나님 나라에 먼저 간 형제들을 만나는 그 날까지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것이 하나님의 자녑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이와같은 능력,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한가지만 더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중요한 숙제가 하나 있습니다.
14절을 봅니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 진데, 이와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그러면, 하나님이 예수의 재림 하실 때 데리고 오는 그 시간까지 자는 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느냐 무엇을 하고 있다가 예수 재림 때에 나타나느냐 하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중간기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대답이 간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시한번 정리를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 안에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가르쳐 준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많은 이론들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재세례파 같은 사람들은 아예 잔다고 이야기를 해 버렸습니다. 영혼이 다른 곳에 가지를 않고 깨끗한 상태로 자다가 재림 때에 부활한다고 말을 합니다. 들으면 그럴듯하지요.
또, 오리겐 같은 사람들은, 천당과 재림, 사이의 중간의 어떤 상태가 있을 것이다고 이야기를 하고 이것을 자꾸 발전 시켰습니다. 이것이 천주교에서 말하는 연옥설입니다. 잘 아시지요.상당히 흥미있는 이론입니다. 카톨릭이 말하는 연옥설을 50%는 진리고 50%는 가짭니다. 50%가 진리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잘 믿고 세상에서 성자와 같이 산 사람은 죽자마자 그 영혼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 간다. 또 이 세상에서 예수 안 믿고 되는대로 함부로 악하게 산사람은 죽자마자 지옥으로 간다. 그러나 교회를 적당히 다녔고,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사람들은 지옥도 천당도 갈수 없는 어중간한 사람들로서 중간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만들어 낸 것이 연옥입니다.
영혼이 천당에 갈 만큼 천당에 들어갈만큼 깨끗하지를 못해서,부정한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죽으면 그 영혼이 연옥에 가서 그 더러운 것이 깨끗이 씻어질 때까지 정하게 하는 불로 연단을 받는다. 그랬습니다. 개인에 따라서 그 연단 받는 기간은 틀린다고 가르칩니다.묻은 것이 적은 사람은 빨리 끝날 것이고, 더럽혀진 것이 많은 사람은 오래 걸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거기서 정하게 하는 연단을 다 받고 그 영혼이 정하게 되면 하나님이 비로소 하나님 나라에 들여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어려서 죽은 어린아이들은 다 이 연옥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구약의 성도들도 예수가 오는 것을 보지 못했던 성도들도 다 연옥에 들어가서 한번 더 연단을 받고,깨끗함을 받아서 천당에 들어 간다. 또 그 연옥에는 예수를 전혀 몰랐지만,성자처럼 살다간 쏘크라테스 같은 사람들도 다 들어 간다고 가르칩니다. 참 얼마나 그럴듯합니까

영계에 관한 지식을 분별하는 기준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천주교에서 하는 말이 상당히 그럴듯합니다마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비교를 해보면, 성경안에 없는 이야기라는 금방 알게 됩니다. 저도 연옥이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연옥설이 또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세상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는다하는 굉장히 낙천주의적인 사람들입니다. 왜 이 세상 사람들이 다 구원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저렇게 높고 크고 위대한데 어떻게 한 사람인들 지옥으로 보낼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듣고 보면 그럴듯하지 않아요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의 그 피의 댓가가 얼마나 비싼 것인데, 그 피의 댓가를 지불하고도 한사람이라도 지옥을 보낸다면 하나님이 무능하신 하나님이 되어 버릴 테니까 한사람도 지옥으로 보내시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만인구원설론자들입니다.굉장히 매력있는 이론이에요. 그러나 아무리 매력이 있어도,성경에 비추어 보아서 성경 안에 없는 이야기이면, 또 성경과 상반 되는 것이면 미련 없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연옥설을 좀더 발전 시켜서 이렇게 주장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천당으로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다 어디로 오느냐하면,이 중간기라고 하는 연옥으로 온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세상에서 예수를 잘 못 믿은 사람도 들어 오고,또 특별히 예수 믿으라고 하는 말을 한마디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전부다 이리 들어 온다. 그래서 예수 믿으라는 전도의 기회를 다시 한번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굉장히 기분 좋은 이야깁니다.
만약에 천당과 지옥을 다 보고, 중간에 서서 예수 믿으라는데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만인구원설이지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에게 상당히 호감을 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 할 때에, 자주 질문 받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어서 구원 받지만, 신라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되나요] 하고 얼마나 집요하게 묻습니다. 그들에 대해서 이 만인구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대답을 척척합니다. 연옥으로 가서 전도를 받는다는 것이지요.

만약에 이 이론을 따른다고 하면, 세상에서 전도할 필요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전도하는 것이 바보짓이에요.
그러나 성경에 보세요. 하나님이 문 밖에 나오셔서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신다고 했습니다. 왜 기다리십니까 연옥에가서 예수 믿으면 될 텐데..., 그런 기회가 없다는 이야깁니다.
하나님께서 전 세계의 수많은 젊은이들을 불러서 복음을 들고,지구촌 구석구석으로 떠나게 만드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살아 있을 때, 예수 믿으라는 말 듣고 믿지 아니하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거기에 대한 성서의 증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요8:21절에 보면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가운데서 죽겠고] 또 요8:24절에는 [네가 만일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인 것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가운데서 죽으리라]
그리고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않고 세상 떠난 사람들은 아깝지 않느냐 그 사람들이 멸망 받는데 대해서는 우리는 할 말이 없어요.
인간은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도 연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잘못 믿은 사람들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는 것이 좋지요. 그러나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리 좋아 보이는 교리라도 우리는 받아 들일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잘 믿는 하나님의 자녀는 어디가서 무얼하고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기다리느냐 그것은 한마디면 끝납니다.
고리도후서 5:8절을 보세요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자는,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 것이라] 우리가 죽으면 예수와 함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눅23장에 오른편 강도가 구원 받은 다음에 주님이 약속한 것 있습니다. [네가 오늘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 다음에 빌립보 넘어가서 1:23절에 지금 바울은 감옥에 있습니다. [지금 내가 그 사이에-생.사-두 사이에 끼었으니,차라리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욕망을 가지는 것이 더욱 좋다] 예수 믿는 사람의 영혼은 죽자말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게 됩니다. 이것이 답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디에 계실까요 연옥에 계시겠습니까
가장 좋은 천국에 있습니다. 거기에 성도들이 함께 있습니다.
계시록에 보면 먼저간 성도들이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들이 나옵니다.경배하고 찬양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다가 준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 전보 새몸을 입고 따라 나옵니다. 이런 면에서 부활은 먼저 죽은 성도들이 기득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반면에 예수 믿지 않던 자들은 그 영혼이 부자가 간 곳으로 갑니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시에 그들도 몸을 입고 살아 납니다. 그런데 이것을 부활이라고 하지를 않아요 더 죽기 위해서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렵습니까

그리고 저는 이거 하나는 믿습니다. 영혼이 먼저가서 대기하는 그곳,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누리는 그 축복과 그 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한 다음에 우리가 신령한 몸을 다시 입고 그 다음에 누리는 영광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어느 것이 더 좋겠습니까 나중의 것이 더 좋겠지요.
영혼만이 누리는 복락보다, 영육이 함께 누리는 복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더 완전하겠지요. 그래서 주님의 재림은 더 기다려 지는 것이고, 우리의 부활은 꿈에 도 잊을수 없는 하나의 큰 비젼이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여러분!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봅니다마는, 우리는 소망 없는 자와 같이 슬퍼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음 속에 굳게 다시 한번 확인 하시기를 바랍니다.그리고 형제들이 먼저가든 내가 먼저 가든,주님이 재림하기 전에 우리가 설혹 육체의 죽음을 죽을 지라도 그것은 잠자는데 지나지 아니하며 결국은 완전한 죽음을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하나님이 우리를 결국 깨어 나게 하실 것이라는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음을 우리 마음 속에 꼭 간직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먼저 죽더라고 우리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낙원에서 복락을 누리는 아름다운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도 우리가 다시 한번 마음 속에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은 소망 우리가 가지면, 우리 주변에 많은 부조리를 보고, 많은 모순을 보고, 어떤 때는 참을 수 없는 고통도 당합니다마는 이길수 있습니다. 웃을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일어 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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