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율법의 정신 (마 23:23-24)

첨부 1


I.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A. 박하와 회향과 근채
박하와 회향과 근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향료로 사용하였던 극히 작은 식물들의 이름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채마밭에서 나는 것으로서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로 정원 같은 조금한 터에 심어서 거두어 들였습니다.
율법은 먹을 수 있는 것, 땅에서 나는 것들은 무엇이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규정했으므로 (레 27:30, 신14:22) 경건한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것까지라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이러한 유대인들의 철저한 십일조 생활을 나무라신 것은 아닙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말씀은 오히려 철저한 십일조 생활이 반드시 필요함을 가르쳐 주며 다만 작은 것에 철저하다는 핑계로 큰 일들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됨을 교훈해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이 무엇이 더 중하고 우선해야 할 일인지를 알지 못해 무분별하게 신앙생활을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경건하고 의로운 생활을 하는 채 했지만 그들이 치중했던 것은 박하와 근채와 회향으로 대변되는 지극히 지엽적이고 사소한 것들이었던 것입니다.
B. 십일조 정신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위선자들은 아닙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에는 처음의 개혁정신을 계승한 매우 경건하고 의로운 자들도 있었습니다.
또 그들이 추구했던 종교적인 열심도 무조건 정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그들은 다만 극히 작은 것으로서 큰일을 대신하려고 한 데 잘못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경우와 같이 박하와 회향의 십일조까지 드리려 한 신앙적 열심은 오늘날 우리들이 계승해야 할 신앙 유산입니다.
십일조는 레위 족속과 고아, 과부, 가난한 자들을 부양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제정하신 제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II. 의와 인과 신(信)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A. 의와 인과 신
의와 인과 신은 주님이 친히 요약하신 율법의 진수요 정신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율법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는 것을 고발한 바리새인들에게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으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마12:7)고 답하신 적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신 것은 자비였습니다.
주님은 형제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보고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십니다. 따라서 율법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충실하기를 원하는 자들은 이웃의 허다한 죄와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랑을 지녀야 합니다.
다음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착하고 충성된 마음입니다. 주님의 눈은 마음이 신실하고 항상 변치 않는 믿음의 소유자들을 향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인정받고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바라는 자들은 두 마음을 품어서는 안되며 오직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의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B. 더욱 중한 것
예수께서는 의와 인과 신을 ‘율법의 더 중요한 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영적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것이 더 중하고 덜 중한지를 아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의 생명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에 아들을 제물로 바치려 했고 사사 입다는 딸보다도 하나님과 세운 언약을 더 중히 여겼기 때문에 딸을 제물로 드렸으며 주님의 제자들은 부모와 재산보다도 주님을 따르는 것이 더 중하다고 생각했기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았습니다.
사도 바울 같은 이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인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빌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빌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빌3: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빌3: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여기에 덧붙여 성도들은 같은 하나님의 말씀, 같은 하나님의 일 중에서도 우선해야 할 일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지녀야 합니다.

III. 하루살이와 악대
(마23:24)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A. 불결한 것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리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린 것을 가리켜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고 비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하루살이는 불결한 것으로 여겨 포도주를 마실 때 반드시 무명 천에 걸러내어 마신 유대인들의 습관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어쨌던 하루살이가 걸러내야 할 곤충이라면 약대도 입에 대서는 안될, 아니 도저히 입에 들어가지도 않을 엄청나게 거대한 짐승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루살이를 삼켜서도 안되고 약대를 삼켜서도 안된다는 주님의 경고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어떤 계명도 소홀히 취급되어서는 안됩니다. 예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반드시 이루리라고 하셨고
(마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고하셨습니다. 크고 작은 계명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 한 모든 계명은 귀하고 중한 것입니다.
B. 중한 것이 더 잘 간과됨
한편,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계명 중 중한 것이 성도들에게는 더 쉽게 취급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약대는 인간 육체의 생리상 도저히 입으로 넘어갈 수 없음에도 아를 삼켰다는 것은 성도로서는 도저히 어길 수 없는 그리스도의 막중한 계명들을 아주 쉽게 범하는 우리들의 악하고 못된 습성을 비유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에게는 옛날 바리새인들의 못된 신앙의 습성이 유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요구하시는 의와 인과 신보다는 외적인간의 경건에 더 치중하며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 믿음의 형제들을 쉽게 비난하고 정죄합니다.
주님께서 살인죄로 규정하신 증오의 마음을 곧잘 가집니다. 이는 모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를 삼키는 위선된 행동입니다. 사단은 함정을 파 놓고 성도들을 이러한 행동으로 유도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자신의 행실과 신앙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