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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자 (벧후 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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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가장 깊은 절망에서 가장 높은 소망의 축복을 얻은 사도 베드 로가 동양과 서양인 로마를 연결시켜주는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행인과 나그네와 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입니다. 여기서 수사도 베드로는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부활을 근거한 것이며 그 기독교 신앙의 최고 소 망은 하나님의 전지 전능 하신 능력과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맞는 것이라고 밝히 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박해를 당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면서 기독교의 적극적인 신 앙을 거짓 종교의 가르침과 혼합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소아 시아 지역이 종교적 혼합을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 농후하게 깔려져 있었던 점과 유 대교 안에 있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신을 섬기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이 있어서 기독교의 진리가 다른 종교와 혼합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 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를 믿는 것도 이와 흡사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기독교인으로 태어난 자가 아닙니다. 오로지 수천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샤마니즘과 유교적 전 통 아래서 길들여질대로 길들여진 무속신앙 상태에서 예수를 구주로 영접을 했던 사 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믿는데 있어서 순수한 신앙을 가지시는 분도 많 지만 때로는 혼합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는 정통 기독 교회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많은 종교들과 기독교라는 허울과 가면을 쓰고 있는 사이비 기독교 내지는 이단 종교들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교회와 신앙이 죄악 세상으로부터 둘러 쌓여 항상 위협과 도전을 받고 있다는 점에 마찬 가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혹시 우리 주변에 옛날에 무당을 좋아하다가 예수를 믿은 분도 있을 수도 있 을 것이고, 새벽마다 정한수를 떠 놓고 이름도 알 수 없는 신에게 복을 빌다가 예수 를 구주로 영접한 분들도 있을 것이고, 한 달이면 수 차례의 제사를 드리며 생활하 다가 예수를 믿은 분도도 있을 것입니다. 또, 사이비나 이단 종교에 발을 디뎌 놓았 다가 빠져나와 예수를 믿는 분들도 있을런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 이 편지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대상의 성도들은 열악한 환경과 엄청난 박해 속에서 평범하면서도 착실하게, 세인의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삶에 있어서는 주님을 믿는 신앙으로 알차게 살아갔던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인사말처럼 사도들과 똑 같은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 습니다. 우리들 역시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아직까지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 실이 보배로운 믿음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보배로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허락하시기를 원하 고 계시며, 우리는 이 보배로운 믿음을 유지하기 위하여 이 시대 속에서 어떤 자세 를 가져야 하는가를 살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보배로운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 니까

첫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했습니다.(3)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주셨습니까 1절에 나온 말씀처럼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을 갖게 되 었으며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가지신 신기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신 축복입니다. 여기 신기한 능력이라는 말씀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 이해하기 힘든 능력이라는 의미의 말씀 입니다. 다시 말해서 헬라 원어를 직역하면 '신적 능력'(신적 능력)이라는 말씀입니 다.

1,2년전에 TV에서방송한 여러 프로들 가운데 초능력을 행하는 사람을 출연시킨 프 로들이 있었습니다. 1984년도 유태인 유리겔라가 행한 초능력이나,작년 추석때 한국 에 온 일본인 초능력의 소유자가 sbs에 출연한 일이 든지, 만리 장성을 둠고 지나가 는 일이라든지,여러 초능력을 보이는 프로들이었습니다.어떤 사람은 집단 최면을 걸어서 손에 가지고 있는 숱가락을 힘들이지 않고 엿가락처럼 휘게 한다든지 상대방 이 가지고 있는 티켓이 어떤 모양인지를 알아 맞춘다든지 등등 여러가지 초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이는 마술과 같이 속임수로 하는 것이 아닌 사실이었습니다. 이와같은 능력을 사 람들은 신기한 능력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보통 사람에게도 잠재 능력이 있다고 들 말합니다만, 이렇게 특별한 사람들의 신기한 능력으로 말미암아,사탄은 사람들 도 하나님과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 또는 '인간이 곧 신이다'라고 미혹하는 하나 의 수단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이 갖고 있는 조그마한 능력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을 어찌 비 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을 말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입술과 글로 다 표현하기 불가능한 능력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로다 기록할 수 없다'고 하는 404장의 찬송도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저자는 요한복음 마지막 21:25에서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 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이러한 신기한 능력이 많으셔서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 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의 생명,곧 영적 생명과 모든 은혜를 가르킵니다. 영적 생명은 그 열매로 나타냅니다. 우리는 사실 죽었던 생명입니다.

엡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 리는 늘 감사하고 살 수 있는 근거는 바로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과 은혜를 힘입게 되었음을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입니00다. 또 한가지 기억할 것은 우리가 보배로운 믿음을 갖게 된 것은 바 로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을 때 비로서 주어지는 보배로운 믿음 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아닌 하나님이 먼저 나를 아셨기에 나를 불러 주시고 나를 생명과 경건의 은 총속에 인도하신 것입니다.그렇기에 내게 이런 귀한 믿음을 주신 하나님을 늘 찬양 하시길 바랍니다.

 둘째, 이 보배로운 믿음을 주신 것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함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4)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믿음의 열매는 어떤 업적주의가 아닙니다. 행동으로 나 타난 공적주의도 아닙니다.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했느냐도 아닙니다. 선하고 착한 일을 통하여 누구에게 칭찬을 많이 듣고 높임을 받았느냐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일들이 사람으로서는 크고 놀라운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사소한 일들이며 이 런 사소한 일들로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자랑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인인 우리 자신들의 성품인 것 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배로운 믿음을 주신 것은 그 믿음으로 물질축복이나 받고 기적이나 일으키고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 다. 주님은 그 보배로운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이면 마땅히 드러내야 하는 천국시민의 성품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누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대통령일까요 교회의 중직뿐 일까요 양무리를 많이 거느리는 세계적인 목회자뿐 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분 외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한 고귀한 인격으로 가치있는 주의 일을 담당해 나가는 성도인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믿음을 생각할 때에 간단하게 옷을 입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경우 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변화되지 않은 나는 나대로 있고 겉모양만 화려한 옷을 입었다고 해서 그의 인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품성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혹시 외형상으로 느낄 때는 많이 달라보인다 할지래도 그것은 느낌일 뿐이지 인격 이 달라져 성품의 변화로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란 자신의 인격의 체질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의 품성이 거룩해 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처럼 살 기등등 했을지래도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 겸손하고 샘물처럼 솟는 영혼을 사랑 할 수 있는 인격의 변화가 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말씀을 믿는 가운데서 순간적인 결단에 의하여 생겨날 수 있지마는 성품에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데는 상당한 많은 시간을 요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 다. 그래서 사도 바울 선생님은 고전 15:31에서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죄된 성품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되도록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 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 자신이 인생의 주인으로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내속에 그리스도를 주인으 로 섬기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덕으로 큰 약속을 주시면서 세상의 썩어질 육신의 일을 버리게 하시고 이제 신의 성 품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본질에 동참 하는 것이 아니고 거듭남과 성화됨을 통하여 아담이후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보배로운 믿음은 오랜 시간 가운데서도 주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주며 그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있는 썩어질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분량에 이르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4:13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라 고 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장만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숙해져야 합니다. 세상 의 모든 생명체는 자란다고 하는 공통점이 있는데 자라는데는 성장만 가지고 않됩니 다. 거기에는 반드시 성숙이 함께 따라야 합니다. 아무리 과일이 크게 성장했을지라 도 성숙하지 않은 즉 익지않은 과일은 값어치가 적고 맛도 없으며 상품으로서 가치 를 드러내지 못합니다.

어린이가 키만 멀쑥하게 크고 지능과 인격에 있어서는 저능아와 같다면 어떻게 될 까요 우리의 문제는 믿음의 크고 작은 것 에만 있지 않습니다. 믿음이 적으면 적은 대로 적은 믿음에 따른 성숙한 신앙인격을 가지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또 믿음이 크면 클수록 신앙 인격의 성숙함이 있어야 하는데 믿음의 성장만 있고 성숙한 신앙 인격이 따라 오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이 땅에 1200만 그리스도인이 있다고 양적인 성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리 스도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세상에서 다 담당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믿음이 성 숙하지 못한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기독교 신앙이란 단순하게 믿는다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을 지적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 할만한 보배로운 믿음을 조 금이라도 가지고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나고 능력은 나타날 줄을 믿습 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인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가운데 믿음을 굳게 쌓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 인생의 체질 자체를 개선시키기 위해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믿음이 아니라면 우리는 세상에 썩어 없어지고 말 것들을 구 하다가 끝낼 믿음만을 부둥겨 안고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 되어지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은 보배로운 믿음을 꽃피울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일곱까지 화려한 믿음의 색깔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5-9)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공중에 반원을 그리는 신비로움 때문이 아닙니다. 비온 후에 태양의 반대 편에 서기 때문도 아닙니다.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일곱까지 색 이 조화를 잘 이루어 화려한 색상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 안에 화려한 일곱가지 무지개와 같은 믿음의 색깔 을 지닐 때에 보배로운 믿음을 유지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5절에서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 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말 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흡족하게 있는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신앙이 되지 않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8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화려한 일곱까지 믿음의 색깔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여기서 덕이란 믿음의 적극적인 활동 가운데서 나타나는 거룩한 용기와 같은 믿 음의 그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덕이 있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사람이 모여들 고 가까이 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쉼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의 그 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덕을 끼칠 수 없는 믿음은 부도덕한 믿음이라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2.덕은 지식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덕스러운 일은 한답시고 무대포로 또는 막무가내로 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군에 전역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때에 새 중대 장님이 오셨는데 별명이 무대포였습니다. 항상 일을 무대포 처럼 밀고 나간다해서 붙여진 별명이었습니다. 좋은 의미와 조롱의 의미가 동시에 있는 것이죠,거기엔 자 원하는 마음보다는 불평만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식별을 할 수 있는 지식을 통해서 그 덕을 성장시켜 나가기 위해 믿음의 덕에는 영적 지식이 필요 한 것입니다.

 3.덕과 지식의 연합은 언제나 절제력을 요구해 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절 제치 못한다면 안됩니다. 믿음의 분수를 넘어서는 것은 자기과신에 불과하기 때문입 니다.(롬12:6) 방언을 잘 해도 절제없이 행하면 안됩니다. 방언은 개인의 유익을 위 하여 있는 것으로서 절제하지 못하면 타인에게 덕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고전 14:4) 이 절제는 믿음보다 더 큰 과욕을 가질 때에 자신의 욕심을 주관하여 정욕으 로 구하는 것을 피하게 해 주기도 합니다.

 4.자기의 욕심을 다스릴 줄 아는 절제있는 믿음을 가진 자는 어려운 것도 참을 수 있는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절제가 외적인 일이라면 인내는 내적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인내력 이 없어서 응답을 받지 못하거나 실패의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허다함을 알아야 합 니다.

 5.경건이란 존경의 정신으로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경건한 믿 음을 가진 사람은 항상 자기 앞에 하나님을 두고 일하게 됩니다.절대로 자기가 앞서 지 않고 하나님을 앞세우며 그의 모든 노력이 하나님을 위하여 진행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데만 마음이 열리도록 해 줍니다.6.그러나 경건한 믿음이라고 해서 형제를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요1서 4:20 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 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믿음에는 형제우애가 따라야 할 것 을 말합니다.

 7.마지막으로는 모든 것을 온전하게 매는 띠의 역할을 하는 사랑이 있어야 할 것 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13:13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모든 것을 온전하 게 하는 띠가 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골로새서 3:14에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 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할 때에 보배로운 믿음은 유지되고 그 믿음으로 영원한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0-11) 하나님이 우리를 왜 부르셨는지 모른다거나 왜 택하셨는지 모른다면 성도에게 있 어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들어 어떤 목적을 두고 회사의 사장님이 사 원을 모집하였습니다. 취직이 된 사원이 왜 사장이 나를 고용했는지 전혀 모른다면 사장님이 얼마나 답답할까요 믿음생활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첫번째 편지인 베드로전서 3:15에서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 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고 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부르심과 주의 택하심의 뜻이 어디있는지 모르는 자는 이단사설에 넘어가기 쉽습 니다. 믿음도 자라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목적을 모르 면 믿음을 키워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저 시계추처럼 왔다갔다 하는 맹목적 인 신자가 되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이 교회 안에서 무엇을 위해 헌신하며 봉 사하며 충성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많은 사람 가운데 왜 이 밤에 우리를 부르시고 왜 삼일밤 예배 를 드리는 성도로 택하셔서 이 자리에 와 있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을 아시고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시기에 ,진실하게 예배 하고자 하는 중심을 아셨기 때문에 우리를 부르시고 예배드리는 백성으로 택하신 줄로 믿습니다.

언제든지 주의 부르심과 택하심에 대한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흔들리지 않도록 해 야 합니다. 그래야만 보배로운 믿음을 간직하게 하는 동기를 제공받게 됩니다. 그리 하여 이런 믿음의 성도들은 영원한 나라에도 넉넉하게 들어갈 수 있는 아름답고 은 혜로운 주의 축복을 허락받게 되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르 심과 택하심을 굳게 한다는 것은 성도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자 신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 임을 확신있게 보이라는 것입이다. 이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 집니다.

성도의 성화를 통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으며, 택하 심을 입었다는 것을 확신 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 말씀 가운데에는 특이하게 나타나는 반복된 낱말이 있음을 봅니다. 그것은5절과 10절에 나오는 더욱 힘써 라는 낱말입니다.보 배로운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더욱 힘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더욱 힘쓸 때 에 보배로운 믿음을 소유할 수 있으며 그 보배로운 믿음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밤에 우리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 로운 믿음을 받은 성도로서 93년 한해가 이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회복되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성화가 날마다 진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며, 믿음에 7가지 덕목을 더하는 성도가 되어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시며 하나님의 나 라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 앞에 서기가 부끄러움이 없는 귀한 성도님 들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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