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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재의 고난과 영원한 안식 (눅 17: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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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 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 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 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 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 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 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려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 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 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 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 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 찌니라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 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 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 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 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 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생각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 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 요 두 여가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 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 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본문의 말씀을 누가복음 12장 32절부터 44절까지 있는 말씀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이 말씀 안에 있는 귀한 뜻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함께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고난과 영원한 안식'입니다. 또 하나 덧붙여서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은 '지혜 있고 진실한 종'입니다.

현재의 고난과 영원한 안식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진실한 종, 충성된 종, 또 지혜로운 종은 어떤 종인가 하는 것을 마음 속에 두시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안식이라고 하는 말 가운데에는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구비되었다 해도 성도가 흠모하거나 사모해서는 안될 안식이 있습니다. 또 고난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성도가 사모하고 흠모할 수 있는 고난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됩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말씀 안에 흐르는 흐름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난이라고 해서 다 고난이 아니고 안식이라고 해서 다 안식이 아닙니 다. 성도가 흠모할 고난이 있고, 성도가 사모해서는 안될 안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고난을 당한다 해도 그 고난을 당하는 사람이 다릅니다.

또 동일한 안식이라도 그 안식을 누리는 사람이 다릅니다. 하나는 성도요, 하나는 불신자입니다. 하나는 땅에 속한 자요, 하나는 위에 속한 자입니다.

사람이 고난을 흠모하고 사모하면서 그 고난의 생활을 복으로 알고 복 되게 살아간다고 하면 그 사람이 참으로 강하다 하는 것보다도 그 안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와 조건이 없이는 남이 다 싫어하는 고난을 흠모하거나 사모하거나 달게 누리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가지고 산다 해도 고난을 당하고 있는 내가 어떤 사람 이냐 하는 것이고 또 그 고난이 현재의 것이냐, 장래의 것이냐, 주님 앞에 서 그 고난이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냐 하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을 싫어합니다. 신자도 싫어하고 불신자도 싫어합니다.

불신자가 고난을 싫어하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당연 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고난을 흠모하지 못하고 원치 않는 것은 그 가 반드시 소유하고 누려야 할 위치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과 동일히 고난을 피하는 것입니다. 또 고난을 저주스럽게 생각 하고 짐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고난을 자기 자신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남에게 이 고난을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가복음 17장 5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함께 읽었습니다만 그 중 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성령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고, 성령에 충만한 사 람, 성령으로 충만한 길을 걷고 있는 사람과 그의 생활입니다. 또 어떤 사 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는가, 자기 자신을 구원할 믿음을 가졌는가, 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성령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 생활을 어떻게 했는가, 현재의 고난에서 그들은 어떻게 했고 장차 올 안식 에서 어떤 마음, 어떤 평안을 가졌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생활이 어떤 것이냐 묻는다면 한 마디로 말해서 바울 같 은 분들이 걸은 길입니다. 또 빌레몬이 걸은 길, 생활입니다. 오네시모가 걸은 길, 밟은 생활입니다. 이들이 성령과 함께 산 사람들입니다. 이 삶은 지식이나 이론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쌓은 수양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사울이 수양을 쌓아서 바울이 되었다고 하면 이 성경이 필요 없습 니다. 성경뿐만 아니라 성령도 필요 없습니다. 빌레몬과 오네시모 같은 사 람들이 좋은 교훈을 못 듣다가 좋은 교훈을 듣게 되어 고쳐졌다고 하면 성경이 필요 없습니다. '몇 날이 못되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시 는 약속의 말씀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후의 모든 사람이 다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사람 으로 살다가 성령의 사람으로 갔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먼저 제자들이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 서.' 하고 주님에게 간구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믿음에 대해서 다른 말씀을 하지 않고)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너희가 뽕나무더러 바다에 가서 심기우라 하여도 그것이 순종하였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제자들에게 지극히 작은 믿음조차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과 내 자신이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이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 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까 주 님을 따라 갔습니까 믿음이 없었는데도 그물과 배를 버리고 나아갈 수 있었느냐 그 말입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하는 그 '너희'에 베드 로를 포함한 12제자가 다 해당이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까지 주님이 보시기에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믿음의 생활을 못하고 있었습 니다. 이 점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믿음이 그 제자들에게는 없었느냐 하는 점을 생각해야 됩니다. 또 바꿔 놓고 생각해 보십시오. '내게 믿음이 없느냐' 하는 물음을 나를 향해서 물어 보면 믿 음이 있는지 없는지 가부간 내 안에서 답변이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네가 지금 믿음으로 살고 있느냐' 하고 물어 보십시오.

아마 전자의 물음에는 '내가 왜 믿음이 없어' 하고 반문할지 모르나 후자 의 물음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할 사람이 퍽 많을 것입니다. 한번 자기 자신을 향해서 '네가 믿음으로 살고 있느냐, 믿음이 갖다 주는 소망 안에 서 살고 있느냐' 하고 물어 보십시오.

왜 그런 말씀을 하는고 하면 묵묵히 주인의 밭을 가는 종들, 묵묵히 주 인의 양을 먹이는 종들이 있습니다. 또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는 종들 이 있습니다. 남이 안 먹이는 양을 먹이느라 고난이 많습니다. 남이 안 가 는 밭을 갈기에 땀 흘림이 많습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느라고 고 생이 많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렇게 한 종들이 자기 할 일을 다하고 돌아 왔을 때에 종을 대접하겠느냐, 앉혀 놓고 먹이겠느냐 아니라, 오히려 종 에게 명하기를 내가 먹을 때에 네가 서서 수종 들라, 내가 다 먹은 후에 네가 먹으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7-8) 이 말씀은 듣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그 분들도 듣기 어려운 말이고 오늘 우리들도 듣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이 말씀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요구는 무리한 요구입니다. 인정 사정이 없습니다. '수고 많이 했다' 하면서 그 수고의 대가를 더하는 것이 타당할텐데 수고했다는 말은 고사하고 '내가 먹는 것까지 수종 들라' 하는 요구입니다. 참 무리한 요구 입니다. 이 무리한 요구가 누구의 요구입니까 밭을 가는 사람은 누구이고 또 이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 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 (10절) 이것이 누구의 요구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아라 하는 말씀이 아닙니까 남이 안가는 밭을 가느라고 수고 많이 하 는 사람에게 자랑하거나 교만하거나 뽐내지 말고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한 것뿐인데 이것이 무슨 자랑이나 영광이 되 겠습니까' 하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남이 안가는 밭을 가는 사람이 오늘도 있다고 하면 그 심령 속에 그 생활 속에 나가서 낱낱이 들춰 보십시오. 불만과 불평이 없는가 또 교만 이 없는가 또 남이 안 먹이는 양을 먹이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마음 이 어떠한가 살펴 보십시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는 종이 있다고 하 면 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 물읍시다. 양을 먹이거나 밭을 갈거나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 는 종의 직무가 일시적입니까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서 일시적으로 이것 을 감당해야 됩니까, 아니면 일평생 동안 감당해야 됩니까 일평생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한 사건만이 아닙니다. 일평생 동안 밭을 가는 종으로 양을 먹이는 종으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는 종으 로 일평생 사는 것입니다. 참 어렵고 귀한 것입니다.

잠시만 한다면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평생 동안 그 일을 해야 된다고 하면 여러분들, 이 안에는 분명히 다른 비밀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살아갈 수 있는 어떤 힘, 새로운 여건이 이 안에 있습 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더 많은 믿음 곧 믿음의 풍성함을 말씀합니다.

또 그 믿음은 소망을 갖다 줍니다. 내게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소망이 나와 함께 합니다. 믿음이 따로 있고 소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게 믿음이 있으면 나에게 소망이 옵니다. 내게 믿음이 있으면 내 생활 가 운데서 소망이 나와 함께 동행합니다.

만일 주인의 이 요구뿐이라고 하면, 밭을 가는 일 후에 양을 먹인 후에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준 후에 다른 일이 전개되지 않고 이 요구로 끝난 다고 하면 주인은 아주 무정한 주인입니다. 아무도 순종할 수 없는 몰인정 한 주인입니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 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 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 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 이 되라.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 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 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누가복음 12:32-37) 17장에 있는 주인의 요구는 무리한 요구요,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요 구입니다. 그러나 그 요구의 배후에는 이 12장의 말씀이 숨겨져 있습니다.

37절 말씀에 '종을 앉히고...' 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앉힙니까 어떤 종을 앉힙니까 누가 앉힙니까 17장에는 종들이 일하는 것만 나타났습니다. 일평생 동안 일을 합니다.

그러나 12장에는 주인이 그 종을 앉히는 일이 나옵니다. 주인이 허리에 띠를 띠고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주인이 종을 수종 듭니다. 이것이 하나님 의 전체적인 뜻입니다.

만일 이것이 말씀이 아니고 복음이 아니라고 하면 17장에 있는 주인의 요구는 너무 무리한 요구입니다. 또 그 주인도 귀하지 않고 주인의 명령도 그렇게 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종된 것이 너무 억울할 뿐입니다. 종의 직책도 나은 것이 없고 불만과 불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종을 앉히고 주인이 띠를 띠고 서서 종을 수종 드는 날은 깁니 다. 얼마나 길어요 영원합니다. 아주 영원합니다. 밭을 갈고 양을 먹이는 때는 어떻습니까 짧습니다. 아주 짧아요.

여러분의 신앙 생활은 짧습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도 헌신도 다 짧 습니다. 주와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 사는 것도 짧습니다. 힘들지만 짧습니 다. 천대와 멸시를 당하는 것도 짧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을 위해서 준비하신, 주인이 종을 앉히고 띠를 띠고 종 을 섬기는 때는 영원한 때입니다. 이것이 교회 앞에 신자 앞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확실히 붙잡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 게 약속하신 약속을 예로, 아멘으로 받아 들이면 그 후에 주인이 종을 앉 히고 봉사하는 때는 영원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는 마 음대로 선택하십시오.

이 말씀뿐만 아니고 성서 안에는 우리가 참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 들이 기 어려운 말씀이 많습니다. 그러나 왜 어려운가 하면 여기에 대한 믿음이 우리 마음 속에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믿음이 갖다 주는 소망이 철저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이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 씀은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씀에서 살펴 보았듯이 밭을 가는 종이 돌아 왔을 때에 양을 먹이는 종이 돌아 왔을 때에 주인이 칭찬해 주거나 보상해 주는 것이 없 었습니다. 만일 보상을 해 준다고 하면 그 양을 먹이지 않을 사람이 없고 그 밭을 갈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길은 사람 앞에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닌 것을 여러분 이 확실히 알아야 됩니다. 확실히 아는 자리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조금도 변동하지 않고 굳게 서야 됩니다. 밭을 갈거나 양을 먹이는 일에 있어서 교역자나 교회가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듣는 우리에게는 다 무리입니다. 예사로 들으니까 그 렇지, 깊이 들으면 들을수록 받아 들일 수 없는 아주 무리한 말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많은 사람이 예수를 잘 믿으면 땅 위에서 보상을 받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보상이 없습니다.

제가 하는 말이 아니고 성서 자체를 상고하면 그렇습니다. 바울이 땅 위에서 보상 받은 것이 무엇이며, 베드로가 땅 위에서 보상 받은 것이 무 엇이며 오순절 후에 헌신한 모든 신자들이 보상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오히려 보상보다는 천대와 멸시와 갖은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기독 교의 길이요, 성령이 나아가는 길이고 성령의 질입니다. 이 점을 여러분들 이 알아야 됩니다.

그러나 땅 위에서 보상 받지는 못하지만 분명히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 다. 어린아이에게 찬 물 한 그릇을 대접한 것도 결단코 잊지 않겠다고 하 는 말씀이 약속으로 있습니다.

반드시 잠시의 고난 후에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안식의 때, 주인이 종 을 앉히고 종을 섬기는 영원한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종들은-밭을 갈거나 양을 먹이거나 양식을 나눠 주는 이 종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인데 어 떻게 그들은 주 앞에서 그렇게 아름답고 귀한 종들로 살다가 주 앞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겠습니까 참 귀한 종들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또 말씀이 성령이 되셔서 우리 마음 속에 거하십니다. 본래 말씀인데 말씀이 성령으 로 오셔서 믿는 자 마음 속에서 역사하셔서 이 아름다운 사실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종들은 말로만이 아니고 이론이 아니고 참으로 은혜 의 종들입니다. 굴욕적인 종이 아닙니다. 인격에 눌렸거나 돈에 눌렸거나 씨족에 눌린 굴욕적인 종들이 아니고 은혜의 종들입니다.

주님 앞에서 주께서 주신 은혜를 받으면 오늘 누구든지 다 은혜의 종입 니다. 그가 목사든지 장로든지 권사든지 집사든지 평신도든지 어떤 사람 이든지 주님의 은혜를 입고 주님의 은혜로 살 때에 그의 칭호는 은혜의 종이 됩니다.

말로만 은혜의 종이 아니고 감격한 종입니다. 항상 은혜에 감격해서 오 늘도 내일도 감격으로 사는 것이 은혜의 종입니다. 그 은혜의 종은 밭을 가는 것이나 양을 먹이는 일을 일시적으로 어느 한 때에 마음과 충성을 다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고 일평생 동안 그 일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원망 없이, 시비 없이 살 수 있는 것은 그가 은혜와 감격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원망 없는 그 시간, 밭을 가는 그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는 은혜와 감격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의 은혜와 그 은혜에 감격한 것이 없으면 복음과 교회를 섬긴다 해도 일시적으로 섬길 수는 있어도 일평생 주께서 예찬하는 종으로 은혜의 종으로 섬기질 못합니다.

그들은 은혜의 종이요, 은혜에 대해서 감격한 종인데 그 은혜가 그의 일평생에 같이 하고 그 감격이 그의 일평생 동안 같이 합니다. 그 은혜가 일평생을 같이 할 때에 돈이 있든지 없든지 밥장사를 하든지 떡장사를 하 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들은 즐겨 봉사하는 종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제는 즐겨 했는데 오늘 은 나에게 굴욕적인 것이 아니고 어제도 즐겁고 오늘도 즐겨 봉사하는 생 활이 곧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입니다.

이것은 모두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시작해서 성령의 충만하심, 성령 의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들은 변하지 않는 생활을 보냅니다.

내 생활이 변하지 않는다 하는 것보다도 성령이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성령이 내 마음 속에 내주할 때에 내가 하나님에 대해서 주님에 대 해서 감격이, 감사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없이는 아름다운 봉사를 못합니다. 아름다운 신 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의 감화와 감동이 또 풍성이 우 리와 함께 하실 때에 우리의 신앙과 생활과 교회가 은혜의 감격 가운데서 살게 됩니다.

현재의 고난과 영원한 안식을 두고 살 때에 사람의 생은 짧습니다. 이 짧은 시간 가운데 어떤 사람이 되느냐, 어떤 일을 하고 가느냐 하는 것만 이 문제가 됩니다.

자기 없는 종으로 밭을 갈거나 양을 먹이는 것을 사람들이 이론적으로 는 합당하게 생각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다 받아 들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 속에서 내 심령 안에서 이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 내가 그것을 수락하지 않고 사는 것은 성령의 충만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성령의 내주 하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종들에게 오는 심령, 질은 성령의 충만과 내주로 인해서 옵니다. 세 상의 어떤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교훈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성령의 풍성함이 있을 때에 내주함이 있을 때에 말씀은 성립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없는 종으로 양을 먹이거나 밭을 갈거나 양식을 나눠 준다 해도 조금도 부담 없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그 일을 하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오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시고 성결을 누리게 하시고 의에 참석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심령 안의 일입니 다. 심령 안에만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심령 밖의 삶에까지 몸의 생활까지 자 기 없는 종으로 밭을 갑니다. 자기 없는 종으로 양을 기릅니다. 자기 없는 종으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주는 깨어 있는 종, 충성된 종, 지혜로운 종이 되는 것입니다.

늘 말씀합니다. 나는 그 시간에 많은 것을 힘입었기 때문에 하는 말씀 입니다. 기도하는 중에서 능치 못한 것이 없는 하나님을 내가 알았습니다.

언제라도 당신이 하시려고 하면 역사나 개인의 일이나 교단의 일이나 무 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내버려 둡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는 일 가운데, 주님이 사랑하시는 스데반 집사님이 순 교 당하는 일을 내가 보았습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주님이 사랑하 시는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데 어떻게 주님이 그를 보고 계십니까 어떻 게 그를 보고 계십니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참으로 세밀한 생 각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도 능치 못한 것이 있다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이신데 또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종인데 마 음에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참히 돌에 맞아서 순교를 당하는데도 어떻게 그걸 보고 계셨는가 육을 입은 인간도 주님같이 사랑하지 못하는 나 같은 인간도 사랑하는 자녀나 가족이나 사랑하는 분들이 이런 박해를 당할 때에 잠잠하게 태연하게 있을 수 없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처럼 태연히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데반이 순교 당 하는 그 순간만을 보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 야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일은 순교 당하는 그 시간만 보는 것이 아 닙니다. 순교 당하는 그 시간 이후에, 주인이 서서 띠를 띠고 종을 앉히고 수종 드는 때,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서 영원히 함께 하는 그때를 보기 때문에 그것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참고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제가 생각한 것이 그런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를 당하는 시간은 아주 짧다. 눈 한번 감았다가 뜨는 시간도 안된다' 하는 것이었습 니다. 무엇에 비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히 영광을 누리는 것에 비하면 눈 한번 감았다가 뜨는 정도도 안됩니다.

신자가 이 땅 위에서 환란과 고난과 모든 박해를 당하고 굶주림을 당하 고 헐벗음을 당한다 해도 그것은 극히 짧은 것입니다. 이것을 보시는 주님 이나 이것을 아는 신자 사이에 이 일이 지속됩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 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불과 유 황이 비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누가복음 26:30) 노아의 때와 인자의 때를 말씀합니다. 노아는 죄악이 관영한 백성 중의 한 사람이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 긍휼을 얻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 씀이 왔습니다. 그 말씀은 '너와 네 가족을 위해서 방주를 만들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부당한 것 같습니다.

'어디에 나무가 있으니 갖다가 해라, 어디에 못이 준비되어 있으니 갖다 가 해라.'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방주를 지으라 하는 명령뿐입니다. 여러분 들, 이런 심령 안에서 내가 말씀을 받는 일, 받은 적, 또 내가 그 말씀을 가지고 나간 적이 있습니까 그것이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한 해, 두 해 가 아닙니다. 120년 동안입니다. 말씀을 받아서 말씀을 성취하는 기간이 120년 걸렸습니다.

여러분들이여, 노아가 120년 동안 방주를 짓던 그 생활이 오늘의 여러 분과 나의 신앙 생활이라, 교회 생활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확실하다면 우 리 마음과 생각과 우리 행동이 어떻게 달라지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비웃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 아니고 청청한 맑은 날에 그것도 산 꼭대기에서 배를 만드는 일입니다. 비웃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 면 신앙 때문에 이웃이 비웃습니다. 동네가 비웃습니다. 직장이 비웃습니 다. 그 비웃는 말은 퍽 많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먹는 걸 주나, 입는 걸 주 나, 많은 비웃음을 들을 수밖에 없고 듣고 있습니다. 만일 비웃음을 듣지 않으면 좋은 신앙이 아니고 소극적인 신앙입니다. 앞에 간 모든 신앙인들 이 모두 비웃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지나고 약속대로 물로 심판하는 날이 왔을 때에 믿음과 순종으로 방주를 완성한 노아는 그 전과 후가 전혀 다릅니다. 노아가 방주 를 지을 때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먹는 일, 입는 일, 장가 가는 일, 시집 가는 일, 자기의 주위를 돌아 보는 일에 분주했습니다. 그들은 이 날이 오 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방주가 물에 뜨는 날이 올 줄 알았다면 달리 생 각했으리라고 생각도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꿈이 아닌 실지로 왔습니다. 기독교는 꿈이 아니고 실지 입니다. 이 실지를 실지로 받아 들이는 사람과 받아 들이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부자와 나사로가 나옵니다. 부자의 홍포는 아름다운 홍포입니다. 남들이 입지 못하는 홍포입니다. 먹을 것이 풍성합니다. 입을 것이 풍성합니다. 부자는 그 홍포가 영원히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브라함 앞에서 자기 진상이 드러날 것을 생각도 못했 습니다. 남이 못 입는 홍포, 남이 못 먹는 음식, 그 먹고 남는 것으로 나사 로가 먹었습니다. 그때도 잠시입니다.

나사로는 먹을 것이 없습니다. 입을 것이 없습니다. 그의 몸은 헐어서 만진창이 되었습니다. 부자의 대문 앞에 누워서 얻어 먹습니다. 그의 몸의 헌 데를 사람이 간호해 주는 것이 아니고 개들이 와서 핥습니다.

그가 신자라고 해도 누가 그를 돌아 보고 방문하겠습니까 만일 그런 신자가 있다면 비웃지 않을 교회가 오늘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모든 것은 여러분 자신이 깊이 생각할수록 귀한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부자의 홍포도 잠시이고, 나사로의 헌 데를 개들이 핥는 것도 상에서 부스러기를 먹는 때도 잠시입니다. 우리 앞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주 를 위해 살든지 교회를 위해 살든지, 수고에 수고를 거듭한다 해도 희생과 희생을 거듭한다 해도 그 시간은 짧습니다. 또 자기를 위해서 먹고 입고 마음대로 영광을 누린다 해도 그 누림도 잠깐입니다.

우리 중에는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를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나니...

감당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만일 바울이 우리 교회에 교역자로 시무한 다면 바울이 아는 사람들 중에서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를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다는 이런 아름다운 말씀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참 귀한 것입니다.

두 가지로 나누게 됩니다. 하나는 짧은 자기를 보는 눈으로만 지쳐 있 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바라보고 사 는 사람입니다. 내 수고가 다 끝나고 유황불이 와서 나와 나의 모든 소유 를 태울 때, 나와 나의 소유를 다 땅에 두고 내 영혼이 떠나야 할 때, 그 두 종류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되어 있기를 원하십니까 내게 있는 아름다운 신앙과 아름다운 소망이 나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구성해 나갑니다. 이 아름다운 신앙과 아름다운 소망이 없으면 롯의 때의 많은 사람들이나 노아 때의 많은 사람들과 방불합니다. 홍포를 입고 거니 는 부자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 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 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0-21) 바리새교인들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과 소망 안에서 바라보는 나라가 아닙니다. 현재의 땅입니다. 이 땅에서 정치, 종교, 경제, 이런 것들이 정착 이 되서 완전하게 누리는 것을 그들은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나라는 그들이 찾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안식은 주님이 주시기를 원하시는 안식과 너무나 다릅니다. 주님이 주시려고 하시는 안식은 그런 안식이 아닙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렇게 회복할 줄로 알았습니다. 주님이 죽었다가 사신 후에 아주 가깝게 왔다고 생각한 것이 이스라엘의 회복이 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알 것이 아니라.' 아 주 후한 대답입니다. '너희가 알 것이 아니고 너희들은 먼저 성령을 구하 라, 성령을 기다리라.'-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는가 하면 같이 깨닫고 같이 돌아 서자 하는 뜻에서 말씀 드립니다. 제 자신도 그렇게 살지는 못하지만 이 질은 마음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양을 먹이는 종의 위치에 밭을 가는 종의 위치에 참여해야 되는데 그 참여는 다른 것이 아니고 믿음입니다.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유대인들이 찾는 나라가 아니고 참 신자가 원 하는 나라도 종교인들이 바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오늘 많은 교회의 많은 설교를 우리가 분석한다고 하면 땅의 것 외에 위의 것을 말하는 것이 백에 얼마가 되려는지 천에 얼마가 되려는지 모릅 니다. 아주 희소합니다.

오히려 위의 것을 말하면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고 비웃습니다. 또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니 그런 말을 한다고 합니다. 회개나 구원이나 죽 은 후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나라나 이런 것들은 현재 종교 지도자들에 게서 멀리 뒷전으로 밀려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신앙의 질을 생각해야 됩니다. 밭을 가는 종이라, 양을 먹 이는 종이라, 양식을 나눠 주는 종이라 하면 특별한 교역자나 특별히 사명 을 받은 사람만 해당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 닙니다.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 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 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 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 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 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 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누가 17:12-19) 밭을 가는 사람이 누구며, 양을 먹이는 종이 누구인가 하면 열 문둥이 중에 하나입니다. 모양은 다르지만 신앙의 질은 이와 같습니다. 열 문둥이 중에 하나, 그는 분명히 자기가 나은 것을 깨달아 알았습니다. 주님 앞에 나갔습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열 문둥이 중에 하나라고 하면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주님과 나 사이에 이런 사실이 있어야 될 것입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 방인 외에 하나님께 돌아 와서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없느냐' 그에게 직 접 하시는 말씀이 '일어나라, 평안히 돌아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 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주님께서 오셔서 여러분을 대할 때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신다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 까 수십 년 믿어 나왔는데 수십 년 믿는 생활을 해 왔는데 이 말은 분명 히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그는 문둥이였는데 이 사실이 오기 전에는 문둥이였는데 '네 믿음이 너 를 구원하였느니라' 하는 말씀과 함께 이제 그는 문둥이가 아닙니다. 영원 히 문둥이가 아닙니다. 잘 아십시오.

만일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아서 죄의 가리움을 받았든지 죄가 씻김을 받았다고 하면 다시는 죄인이 아닙 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죄인이 아니고 내 자신이 볼 때에도 죄인이 아 니고 문둥이가 아닙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기 전에 문둥이지, 긍휼히 여김 을 받았는데 왜 문둥이입니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는 말 씀이 왔는데 왜 문둥이입니까 문둥이지만 문둥이인 줄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열 왕기하 5장을 읽어 보면 엘리사와 게하시, 그리고 문둥병자인 나아만 장군 이 나옵니다. 여러 가지가 사실이 많습니다만 나아만 장군이 하나님의 사 람 앞에 나아와서 낫기를 원했습니다. 처음에는 안 믿었습니다. 돌아 설 뻔했습니다. 지극히 작은 여종의 말에 다시 돌아섰습니다.

여러분, 깨달은 것과 깨닫지 않은 것과 듣는 것과 듣지 않는 것이 차이 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자기의 길로 그대로 가면서 깨닫는 것이 아 닙니다. 알았다, 믿는다, 깨달았다 하는 것은 방향 전환입니다. 방향 전환.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수락했습니다. 받았습니다. 순종한 것이 요 단에 가서 일곱 번 씻는 것입니다. 한 번이 아니고 일곱 번인데 그 일곱 번은 만수입니다. 다 나을 때까지 피부가 어린아이와 같이 새로와질 때까 지 요단에 가서 씻는 일을 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실지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나아만 장군이 무엇을 믿었습니까 요단에 가서 7번 씻으라는 말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나아가서 믿음은 바라 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그 말씀 자체를 믿는 것이 나아만의 신앙과 순종인 데 그것은 말뿐만이 아니고 이론만이 아니고 실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이 믿음 은 자기를 구원해 주십니다. 자기의 구원을 보장해 주십니다. 나아만 문둥 이도 열 문둥이 중에 그 한 사람도 다시는 문둥이가 아닙니다. 깨끗한 사 람입니다.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드리 는 감사를 드리는 성도의 무리입니다.

밭을 가는 사람, 양을 먹이는 사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 이 다 이런 은혜를 받아 온 사람들입니다. 저 밖의 사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 안에 밭을 가는 종의 질, 양을 먹이는 종의 질이 있습니다. 자기 없는, '예' 밖에 없는, '아멘' 밖에 없는 질이 그 안에 있습 니다. 불평이 없습니다. 불만이 없습니다. 남이야 잘하든지 못하든지 관여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할 일을 할 뿐입니다. 그 일에 있어서 그들을 위해 주인이 서서 띠를 띠고 종을 앉히고 대우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질입니다. 교역자가 아니니까 양을 먹이는 사람도 아니고 밭을 가는 일군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은 특별한 사람에게나 해당하지, 나 같은 사람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특별한 사람도 이 질로 살아야 하고 또 아주 미약한 사 람에게도 이 질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질. 이 질이 하나님 앞에서 존귀함을 받습니다. 즉 이러한 질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주인의 시종을 받습니다. 자리에 앉아서 주 인의 시종을 받는 그 종들만이 이 신앙의 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 없어도 우리는 바울처럼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바울이 아 닙니다. 만일 바울처럼 산다고 하면 거기에는 뭔가 잘못 되었습니다. 그러 나 바울의 신앙의 질과 내 신앙의 질이 같습니다. 이것만은 귀중합니다.

늘 말씀하지만 바다의 물이 큰 파도를 몰고 오는 엄청난 분량의 물도 있고 바닷물이지만 접시에 담겨 있는 물도 있습니다. 만일 분량으로 보면 그 위력으로 보면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그릇에 넘치는 물과 나라고 하는 그릇에 넘치는 물의 차이가 그만큼 큽니다. 그러나 질은 같습니다. 저 바다를 덮고 있는 큰 물의 질이나 접시에 담겨 있는 바닷물 의 질이 같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 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 (누가복음 17:10) 이 말씀을 여러분이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 도) 주 앞에서 우매 무지한 저희지만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심을 감사 드립니다. 지금까지 저희가 어디서 어떻게 왔는지 주께 서 아십니다. 이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문둥이에서 깨끗함을 받아서 다시는 주님 앞에서 문둥이가 아닌 죄인이 아닌 참되고 정결한 처녀로 주 앞에 서는 일이 교회 안에 창일하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주의 온 교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찬송을 받 으시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우리 자신이 예로 아멘 으로 받아들이기에 넉넉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감화도 알게 하시고 감동도 알게 하시며 풍성과 내주함을 교회 가 알게 하시며 알 뿐만 아니라 넉넉히 체험하게 하시며 성령의 풍성함이 내게 가장 귀한 말로 영접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 내주함이 있어서 밭을 갈거나 양을 먹이거나 양 식을 나눠 주거나 하는 일에 자기 없는 삶을 주의 집에서 살게 하시고 후 에 주께서 서시고 종들을 앉히는 날에 말할 수 없는 감사와 찬송과 영광 을 함께 주께 돌리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이 때가 가기 전에 말씀으로 우리를 권면하시고 이 말씀으로 우리를 흔 들어 깨워 주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말씀이 떠나는 신앙과 말씀이 떠나 는 교회가 되지 않게 하시고 말씀으로 양육 받는 저희들이 다 되게 하시 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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