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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홉은 어디에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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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추수감사주일을 드리는 것은 1620년 당시 신대륙인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에 의해서 유래되었습니다.

1620년 9월 16일 102명의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 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의 식민지인 버지니아주의 제임스 타운을 향해 화란의 암스텔담을 떠났습니다. 2개월이라는 긴 여정 후 그들은 행선지와는 거리가 먼 동북부 케이프 코드 항구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거주할 만한 곳이 있는지 알아보 기 위해 남자들만 상륙하였는데, 주변을 경계하던 인디언들을 보고 위협을 느껴 다시 승선하여 프리마우스라는 곳에 그해 11월 21일 정착을 하게 되 었습니다. 그들은 먼저 예배당을 짓고 자신들이 거처할 집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해 겨울을 넘기면서 102명 중 44명이나 죽게 되는 엄청난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이듬해 3월 하순경 한 인디언 추장이 찾아와 관계를 맺은 후로, 인디언들과 친해져서 그들로부터 옥수수 재배하는 것을 배우게 되었고, 1621년 가을 첫 수확을 거둔 청교도들은 농작물과 생선, 과일을 차려 놓고 인디언들을 초청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초기의 청교도들은 하나님과 인디언들에게 감사를 드렸 던 것입니다. 모진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여 신대륙에 정착함과 첫 수확을 주신 하나님께, 그리고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가르쳐 준 인디언들에게 대한 감사였습니다. 청교도들의 감사는 바로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감사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땅에 들어가 지켜야 할 세 가지 큰 명절 가운데 하나로서 장막절(수장절,초막절,추수절)을 지키라는 것에서 유래된 것입니다(출23:16,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34:22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 라). 이 장막절은 출애굽 이후의 40년간의 광야생활을 기념하는 의미와 올리 브와 포도 등을 추수하는 수장절을 지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축제는 8일 동안 지키며, 매일매일 하나님께 제물을 삼가 바쳤고 첫 날 과 마지막 날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모두 생업에서 손을 떼고 성회로 모여 번제물과 곡식예물과 친교제물과 제주를 하나님께 바치며 축제를 즐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들에 나가 초막을 짓고 살았다고 합니다. 그것을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 광야에서 초막을 치고 살게 했던 일을 후손 대대로 상기시켜 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구약시대에 감사절을 지킴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시고 다스리신다는 창조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 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구원신앙을 몸과 마음을 합해 고백하면서 즐기는 축제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감사하다는 말의 성서적 어원을 찾아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감사하다라는 말은 '야다'인데 이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고백 하다'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항상 '찬양하다'는 말과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 57: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 하리이다"라고 다윗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사울을 피해 굴 속에 숨어 있으면서 고백한 것입니다. 이처럼 감사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경배가 함께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 나님께 감사할 때 그 동기는 반드시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약성서에서 감사하다는 말은 '유카리스테오'라는 말인데 이것은 '잘, 매우, 적절하게'라는 뜻의 '유'와 기쁨의 감정을 표현하는 '카르'와 결합된 단어입 니다. 곧 마음속의 감격을 잘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한자의 感謝와 어쩌면 의미가 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感 자는 다할 함(咸)자에 마음 심(心)자를 합한 글자로 '마음을 다한다'는 뜻이 고, 謝자는 말씀 언(言)에 쏠 사(射)를 합한 글자로 "활을 쏘듯 마음을 다해 말씀을 드린다", 즉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는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은 "감사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돌아가는 마음이다. 역사 의 의미를 깨닫는 마음이다. 역사에 새 통일을 주는 일이다. 역사의 근본이 되는 정신 속에 자신을 발견함이다. 우주의 윤리적 질서를 회복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올 한해 동 안 우리들이 씨 뿌린 것을 거둘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과 동시에 숱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결코 우리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깨달으며 그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중대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읽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왜 우리가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만 하는 가를 마음 속 깊이 새길 수 있는 은혜의 시 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나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은 기사입니다. 먼저 본 문의 구조를 보면, 첫째 열 명의 나환자(아홉은 유대인, 한 사람은 사마리아 인)가 예수님을 만나 멀리 서서 큰 소리로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라고 말합니다. 나병을 일명 한센병이라고도 하는데, 이유는 노르 웨이의 의학자 한센이 1879년 나병의 병원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나병은 무서운 병이며 사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하는 부정한 것입니 다. 레 13:45-46에 보면 나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털을 풀고 손으로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고 외쳐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지 못하며 마을에서 격리되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환자가 서 있는 곳에서 건강한 사람들 쪽으로 바람이 불 때 약 50 야드(50 미터)는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 서 오늘 본문에서도 '멀리 서서'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시니 저희 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당시 율법에 제사장이 이 사람은 깨끗하다고 선언 하기까지는 사회적으로 일반 다른 사람들과 같이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나음은 제사장에게로 가는 도중에 일어났습 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과 예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신 뢰, 다시 말해 불치의 병까지도 낫게 하는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믿음을 시험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열 명의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 중에 단 한 사람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 엎 드리어 사례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은 바로 사마리아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뒤이어서 예수님께서 강한 어조로 반문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해 야 겠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두 번째 질문은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이방인 외에 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성도 여러분, 왜 90 %의 사람들이, 그것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병 고침에 대해, 그것도 죽음의 병인 나병으로부터 나음을 입었음 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고쳐 준 은인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았을까 요 그는 선택받은 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비 콕스의 말대로 "자기 들이 병 고침받은 사실을 축복과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바클레이의 말대로 "대부분의 사람들 은 일단 자기가 원하는 바를 얻게 되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인간의 보 편적인 속성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많이 받은 사람 (믿은지 오래된 사람) 보다 오히려 비교적 덜 받은 사람(적게 믿은 사람)이 더 감사할 줄 알고 더 낫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종교인일 수록 더 편견과 아집이 세다는 얼마전 어느 일간지의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 다.

하나님께서는 두 천사를 땅으로 보내시면서 사람들의 기도를 모아오라고 하셨다. 한 천사는 자기 바구니를 사람들의 탄원으로 채우고, 다른 천사는 감사 찬송의 기도들을 모으기로 했다. 얼마 후 그들이 하나님의 집으로 돌 아왔을 때 한 천사의 바구니는 무수히 많은 탄원으로 철철 넘치고 있었다 . 그러나 다른 천사는 슬프고 무거운 마음으로 되돌아왔다. 그의 바구니는 거의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천사가 아무리 열심히 찾아다녔어도 지구상 에서 감사 찬송의 기도는 좀처럼 찾기 힘들었던 것이다.

"제일 가르치기 어려운 수학문제는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어 보는 것이다." 라는 서양 격언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화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전에 미국 미시간 호수에서 배 한 척이 침몰된 적이 있었습니다. 타고 있 던 많은 사람들이 배의 침몰과 함께 호수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노스웨스트 대학의 한 학생이며 수영선수였던 한 사람이 사력을 다해 23명을 구출해 낸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 수십년이 지나 R.A.토레이 박사가 L.A.에서 설교를 하면서 위 사건의 청년의 용기와 인간애를 극구 칭찬했습 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그 때의 젊은이가 노인이 된 채 앉아서 그의 설교를 듣고 있었습니다. 설교 후 토레이 박사는 그 주인공이 그 자리에 있 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면서, "그 사건을 통해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이 무 엇이냐"고 물으니까 "단 한 사람도 고맙다는 말을 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 이처럼 감사는 어려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어느 잡지에 이런 해외 토픽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사는 한 주부가 남편을 팔겠다는 이색 신문광고를 낸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 다. 주말이 되면 남편은 아내보다는 사냥이나 골프를 즐겼기 때문에 불만에 차있던 아내가 이런 엉뚱한 광고를 냈던 것입니다. 광고의 문안은 이러했습 니다. "남편을 염가로 양도함. 사냥 도구와 골프채 및 개 한 마리는 덤으로 드림." 광고를 내니까 흥미를 가진 여성들로부터 60여 통의 전화가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남편을 구입하겠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남편이 살아 있다는 것을 다행하게 여기라"고 하는 한 과부의 충고가 있었고, "남편 이 바람 안 피우는 것을 고맙게 여기라"는 한 주부의 조언이 있었고, "남편과 헤어진 뒤 아이들의 양육문제로 어려웠었다"는 이혼녀의 충고가 있었고, 더 러는 "남편 말고 개만 줄 수 없느냐"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할 때에는 감사 대신에 오히려 불평과 불 만, 원망만이 들어옵니다. 감사할 이유를 하루에 한 가지라도 찾는 연습을 해 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던 이방인,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리어 감사를 고했습니다. 우리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한 사람만이 배은망덕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게 해서 되돌아 올 수 있었을까요 집이 없어서 아니면 가족이 없어서, 아니면 어디 마땅하게 갈 데가 없어서일까요 아닙니다. 이 사람은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엎드리어 감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문둥병자였지만 하나님을 알고 믿는 자였던 것이었 습니다. 또한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것으로 보아 주님의 높으신 인격과 사랑과 능력을 깨달아 존경과 감사를 드리는 깨어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명한 성경 주석가였던 메튜헨리가 어느 날 강도를 만나서 많은 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 때에 그는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 네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① 이전에 도적을 맞지 않은 것이 감사 ② 자기의 생명이 도적 맞지 않은 것이 감사 ③ 아직도 자기에게 무엇인가 남아 있는 것을 감사 ④ 자신이 강도가 되지 않고 목사가 된 사실을 감사했다고 합니다.

 감사는 현실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 는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William Law 는 "최대의 성자는 고행, 금욕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도 감사를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흔히 감사의 맥락에서 3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감사할 이유가 있어도 하지 않는 자, 감사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자, 그리고 감사할 이유가 없어도 하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9명의 유대인은 감사할 이유가 있어도 하지 않는 사람에 속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부류에 속할까요 저는,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 철구씨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희망대 수련생으로 있다가 사회에 복귀하여 바쁜 직장생활을 하면서 예전 에 그가 있었고 하나님을 새로이 만난 교회를 잊지않고 찾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19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 였느니라".

성도 여러분, 9명의 유대인들은 육체적인 병은 고침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나 라를 볼 수 있는 구원은 받지를 못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병을 고침받는 것 만이 구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에게 구원 을 허락하신 것은 그의 감사하는 태도를 보시고 결정하신 것입니다. 물론 믿 음으로 병 고침을 받는 것이지만, 구원을 받기에는 불충분했다는 사실입니다 . 감사가 없으면 믿음은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감사는 세상의 삶의 법칙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질서를, 하나님의 세계를 깨닫는 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감사는 인간의 단어가 아니라 하나님의 단어이다.

 그리스의 철인 아리스토텔레스가 기원 125년 친구에게 쓴 편지가 발견되었 는데 그 당시의 기독교도들에 대하여 이런 말을 썼다. "기독교들은 정말 이 해하기 힘든 새 종교집단이다. 사람이 죽으면 슬퍼하지 않고 기뻐하며 그들 의 신에게 감사의 예식을 드린다. 그들은 시체를 들고 묘지로 행렬할 때 마치 즐거운 소풍이나 가듯이 노래를 부르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고 말 하며 행진한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전해주는 산증거이다. 초대교 인들은 부활의 신앙, 영생의 확신을 가지고 살았던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남기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과학을 남 겼으며 예수는 영원한 생명을 남겼다."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위대한 유산은 하나님의 아들 에수 그리스도가 남기신 부활의 믿음,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아무리 이해가 깊고 열심히 뛰어난 행동을 한다 할지라고 하나님께 향한 높은 감사심이 없다면 생명있는 신앙생활이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감사는 믿음의 결론입니다.

성도 여러분,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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