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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두 종류의 근심과 기쁨을 아는가? (요 16: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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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말씀을 중심해서 생각하는 것은 '두 종류의 근심과 두 종류 의 기쁨을 나는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근심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을 얻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근심이요, 또 하나는 세상에 대한 근심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요한 16:22) 이 말씀은 사랑하시는 주님이 인성으로 계시다가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죄인처럼 버림을 받고 죽을 것을 말씀할 때에 모든 제자들이 슬퍼했습니다. 주님을 떠나 보내야 하는 근심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한복음 14:1) 신자에게는 이 근심이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고 나를 떠 나시거나 내가 주님을 떠나고 있거나, 말씀이 나를 버렸거나 내가 말씀을 버렸을 때 근심하지 않는 신자가 없습니다. 또 이런 근심이 아니면 신자될 길이 없습니다. 이것 역시 세상의 근심이 아니고 주 안에 있는 성도들의 근심입니다.

말씀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근심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수고요, 영 적인 근심입니다. 이 수고와 근심이 크면 클수록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기 쁨이 넘치게 됩니다.

다윗은 무엇 때문에 근심했습니까 먹을 것이 없어서, 전쟁에 패해서 근 심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중에서 슬피 근심한 사람이 있다고 하 면 다윗입니다. 심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요가 썩도록 침상이 뜨도록 슬피 울고 탄식했습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바울도 역시 근심했습니다. 심한 근심을 했습니다. 그 가 바리새교인으로 있을 때에 근심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을 받았을 때에 죄에 팔려서 죄의 종이 된 것을 알았을 때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 하는 울부짖음과 함께 심히 근심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영적인 근심이 없는 신자는 비정상입니다. 영적인 근심이나 탄식이 없 이 기쁨으로 나갔다고 하면 그가 말씀을 속이고 있든지 말씀이 그를 속이 고 있든지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또한 신자라고 하면서 심한 근심으로 만 사는 사람도 비정상입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근심과 눈물이 없 는 것도 비정상적인 신앙이고 근심과 눈물과 함께 살다가 근심과 눈물로 그 생을 마치는 것도 비정상적인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여 러분의 신앙과 생활을 이 말씀 가운데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부모를 떠난 탕자, 그는 심한 근심을 했습니다.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 구나' 하는 것은 당연한 근심입니다. 누구든지 그렇습니다. 아버지 앞에 나가서 아버지가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받기 전에 평안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세상 것이지, 성령으로 인해서 얻는 안식은 아닙니다. 혹 믿는 사 람과 믿는 사람 사이에서 주고 받는 잘못된 근심도 성령의 근심은 아닙니 다. 육의 근심이고 육이 갖다 주는 결과일 뿐입니다.

신앙에는 근심이 따릅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구체적으로 자기의 구원 에 대한 약속과 언약이 없는데도 근심하지 않는다고 하면 비정상입니다.

비정상일 뿐만 아니라 여리고 성이 망할 때 같이 망하게 됩니다. 용납해 주는 일이 없습니다.

기생 라합도 심한 근심을 했습니다.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 속이 완성되기까지 근심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한당을 만난 사람이 불한당을 만난 자리에서 근심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근심을 모르고 눈물을 모르고 주막 집에 들어가 는 길은 없습니다. 주막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심한 근심이 있습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이 말씀은 주님과 그들이 떨어져 있을 때에 제자들이 근심할 것을 예상하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 은 주님이 함께 계시므로 평안하십니까 아니면 주님과 떨어져 있어서 근 심하고 계십니까 스스로 물어보세요.

그런데 만일 주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모르면서도 평안하다 안식이다 라고 한다면 그 안식과 평안은 멸망 받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안식 과 평안일 뿐이지, 성령이 주시는 안식과 평안은 아닙니다.

주님이 인성으로 계실 때 제자들은 주님만 계시면 만족했습니다. 풍랑 이 일어서 걷잡을 수 없는 처지에 있을 때 주님이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 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먹을 것이 없었을 때도 주님이 적은 떡, 적은 생 선을 축사하시자 수천 명이 먹고 남았습니다. 병들은 것도, 죽는 것도 그 렇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이미 여러 날 되었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실 때 그가 무덤에서 살아났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실 때에 죽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실 때에 평 안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심령 속에 주님이 함께 계실 때에 불 안이나 공포나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을 실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자리 잡고 있을 때에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해서 평안을 누리거 나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나를 평안케 해 주십니다. 내가 누리는 말씀이 나를 안식케 하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떠날 때에 제자들에게 근심이 따랐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떠나는 근심을 아십니까 잘 생각해야 됩니다. 주님이 떠나도 말씀 밖에 있어도 평안하다면 그 평안은 재검토해 야 됩니다.

말씀인 동시에 주님이시고 주님이신 동시에 곧 성령이십니다. 그가 나 와 함께 계실 때에 내게는 근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아직까지 주님을 떠나 보내야 하는 근심, 잃어 버려야 되는 근심, 말씀 밖 에 있는 근심이 그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이 여러분의 심령을 위협하고 있습니까 나이 많은 것이 위 협합니까, 돈 없는 것이 위협합니까 자녀 없는 것이, 가정 없는 것이 위 협합니까 위협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당연한 처지에 있을지라도 거리에 배를 깔고 누워 있을지 라도 주님이, 주님의 말씀이, 성령이 함께 계시면 내 마음 속에서 평안과 안식이 흘러 나옵니다. 그 평안과 안식은 세상이 손대지 못하는 평안입니 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안식입니다.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니... 여러분, 잘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제자들 이 근심하는 원인은 주님께서 떠나시는 데 있습니다. 또 조금 후에 얻을 기쁨의 원인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데 있습니다. 그때 그 제자들뿐만이 아 니라 오늘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일을 해서 그것에 대한 보상 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기쁨과 근심의 핵심이 주님에게 있다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것만이 교회에게 드리고 싶은 내 심령입니다. 그러나 성도들 이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 평안을 얻고 다른 것에서 안식을 찾고 있습니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 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기 전과 후가 크게 다릅니다. 무엇이 다른가 하면 아는 것, 깨닫는 것, 누리는 것이 다릅니다. 배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지 않아도 배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감당하지 못했던 일을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감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어떤 일에 있어서 양적으로나 혹은 질적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할 수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기가 쉽습 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것 이 아닙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먼저 은혜를 감당하게 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 시지 않으면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은혜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이것 은 참 깊은 말입니다. 놀라운 사실을 안고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 기 전에는 은혜를 은혜로 모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은혜이신 주님 을 내게 알게 하실 때에 그가 나를 점령할 때에 은혜를 아는 법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은혜를 모릅니다. 다른 것은 다 합니다.

다 흉내를 냅니다. 그러나 은혜를 모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일을 많이 하는 것에 있지 않고 은혜를 아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은혜를 감당하는 데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탕자 가 감당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그가 감당해야 될 것은 아버지의 은혜 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긍휼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 이 오시지 않으면 이것을 모릅니다. 알 수 없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셔 서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또 하나는 진리의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주님을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신 후에 따라가는 것이 진정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 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요한복음 14:36) 베드로가 이 진리의 성령이 오시기 전에 주로 더불어서 옥에도 갇히고 죽을지라도 주님을 좇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네가 오 늘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못 갔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은혜의 길을 갈 수가 없습 니다. 혹 행위의 길은 갈 수 있을지라도 은혜의 길은 갈 수가 없습니다.

감당 못하는 법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신 후에 그들이 간 길과 오늘 우 리가 품고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던 것 을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따라가고 알게 되고 행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이 참 많이 있습니다. 구원도 성결도 의도 영광도 안식도 평안도 우리가 다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미 많이 배우고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아름다운 사실들이 내 마음 속에서 결정적으 로 생명화되지 않느냐, 그렇게 많이 듣는데도 왜 생명화 되지 않느냐 하면 진리의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주셔서 가지는 것과 내 가 가지려고 애쓰는 것과는 다릅니다.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내가 너와 상관이 없다.'고 하신 말씀이 베드로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 앉은 우리도 주께 서 씻기시는 씻김이 아니면 어떤 수고와 눈물도 소용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해 주시는 앎 가운데서 이 사 실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린도후 서 7:10)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근심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아무리 근심해도 후회할 것이 없 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주님이 내게 계시지 않고 떠나는 일로 말씀이 내 안에 없는 일로 근심한다고 하면 그 근심은 복 있는 근심이요, 후회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왜 그 근심은 결국 구원을 이루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멸망을 이룹니다. 다시 말하면 국가를 위한 것이나 가정을 위한 것이나 자녀를 위한 것이나 돈을 위한 것이나 간에 세상의 근심을 자꾸 따라 나가면 멸망으로 인도됩니다. 중간에 쉬는 법이 없습니 다. 쉬려고 하면 다른 것이 와야 됩니다. 다른 것이 오기 전에는 쉬지 않 습니다. 육의 근심은 사망을 이룰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하나 님의 약속이 내 안에 없어서 그 말씀이 내 안에 확신되지 않아서 근심한 다고 하면 그것은 후회할 것이 없는 근심입니다.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 옵 니다.

사망을 이루는 근심이나 구원을 이루게 하는 근심이나 근심하기는 마찬 가지입니다. 마음이 시리고 아픈 것이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말씀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질의 근심을 내가 아는가,' 또 '이 두 가지 질의 기쁨을 내가 아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느 것을 품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보리니....

주님이 오셔서 보시는 것으로 우리는 평안이요, 안식입니다. 교회 밖에 서는 이 말을 이해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이해하기 보다는 미친 사람이라고 저주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어렵습니다. 이해하기 가 참 어렵습니다. '내가 다시 오리니'-주님이 다시 오심으로 평안과 기 쁨을 갖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이 비밀을 아는 자가 누구입니까 '내가 떠나리니' '내가 다시 오리니'-주님이 떠나면 우리에게 오는 결 과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다시 오심으로 우리가 얻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육신의 노력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행위의 노력이 아닙니다. 신앙의 노력 도 아닙니다. 다만 주님을 내가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요한 16:23) '물을 것이 없다.'-아주 엄청난 말씀입니다. 주님 앞에 물을 말이 없어 집니다. 이 관계가 참으로 귀중한데 먼저 근심 있는 사람이 주님과 함께 거하면서 아무것도 주님 앞에 물을 것이 없는 위치로 옮겨져 완숙하게 되 는 것입니다.

그날이 신자된 우리에게는 기필코 있어야 됩니다. 불신자나 멸망 받는 자에게는 이런 날, 이런 때가 귀하지 않겠지만 신자된 우리에게는 그날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날입니다.

물론 그날은 아름다운 신자가 땅 위에서 몸을 벗고 주님 앞에 영접함을 받는 날이나 주님이 영광 중에 강림해서 성도들을 영접하는 날이 되겠습 니다. 그러나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도 육신 안에서 우리의 심령이 그날을 체험하고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히 생각하기도 어렵지만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앞서 간 신앙 의 사람들이나 이미 앞서서 나가는 사람들은 이 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들입니다.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것, 믿는 것 전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는 늘 말씀하지만 신앙 생활 가운데서 기도 가운데서 성령에 대해서 참 목말라서 많이 구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내 마음 가운데 두 가지 의문이 있었는데 하나는 '내가 추구하는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불 가능한 것인가 내게 실지로 임하는 것인가, 아니면 보기만 하고 말만 할 뿐이지 실지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앞서 간 사람들이 성령의 풍성을 다 누렸는데 그것이 '그들 이 가진 어떤 조건에 의한 것이었느냐, 아니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자라고 하면 내게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조건이 내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자라고 하면 저들이 하나님 의 은혜로 되었다고 하면 내게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들도 육신으로 났고 나도 육신으로 났는데 육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 으로서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은혜로 오는 것이 라면 그가 은혜를 입는 것이나 내가 은혜를 입는 것이 마찬가지이기 때문 에 내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사람의 마음을 그 사람 외에는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말 씀이 함께 하는 성령의 마음, 성령의 사람이 아니면, 성령이 오셔서 그 안 에서 알게 해 주지 않으면 알지 못한다' 하는 말씀이 왔고 그 말씀 가운 데 아주 절실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남목사님을 아느냐고 물으면 열이면 열이 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알지 못합니다. 부분적으로 알지, 온전히 알지는 못합니 다. 내 아내도, 내 자녀들도 나를 다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들보다는 내 식 구들이 나를 더 알겠습니다만 그러나 나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얼마나 깊이 알고 얼마나 넓게 알아야 아무 것도 물어 볼 것이 없는 만큼 아는 것인가, 그만큼 믿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가 처음에는 모릅니다. 그러나 목을 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 지를 대하면서 제일 좋은 옷을 갖다가 입히시는 아버지를 대하면서 가락 지를 끼우고 신을 신기는 아버지, 양을 잡아서 잔치를 하는 아버지를 보고 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돌아온 아들이 그때에는 아버지에게 물을 말이 없습니다. 아버지, 나를 참으로 용서해 주십니까, 내 허물과 과오를 다 덮고 계십니까, 나를 어떻 게 해 주실 것입니까 라는 말을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돌아온 탕자라면 아버지를 대할 때에 그 아버지한테 물을 말 이 없을 정도로 아버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큰 아들보다, 세상의 누구보 다도 아버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신앙은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 데서 주님을 보고 알다가 차츰 가까이 나아가면서 주가 내 안에 오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게 되면 주님에 대한 의아심이 다 없어집니다. 불신이나 거역 같은 것이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없어지고 맙니다.

불한당 만났던 사람이 주막 집에서 사마리아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 니다. 그 주막 집에 있는 사람은 사마리아인에게 물어 볼 말이 없습니다.

신앙의 성숙, 신앙의 완성을 말씀합니다. 물어볼 말이 없습니다. 자기에게 오셔서 상한 상처를 모두 씻기시고 싸매시고 나귀에 태우고 주막에 와서 두 데나리온을 내주면서 '이것이 부족하면 다시 와서 갚아 주리니 그가 원하는 대로 주라' 하는 그 사마리아인에게 더 이상 물어 볼 말이 없습니 다. 동시에 그 마음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은 그를 아는 것, 그를 믿는 것, 그를 의지하는 것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말이지만 므비보셋이 왕자 중에 하나로 같이 먹고 같이 입고 같 이 낙을 누리고 있습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다윗이 책임지고 있습니다.

왕자로 대우 받고 있는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물어볼 말이 없습니다. 과거 사에 대해 물어볼 말이 없고 미래사에 대해서도 물어볼 말이 없습니다. 감 사와 찬양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절정에 이른 성숙한 신앙입니다.

순종하고 돌아온 고멜도 호세아에게 물어볼 말이 없습니다. 물어볼 말 이 다 떨어져 나갑니다. 이것이 돌아온 사람, 참 성숙한 사람들이 입고 있 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다시 돌아오심으로 기쁨이 오는데 세상이 그 기쁨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한 명이 되든지 백 명이 되든지 세상이 빼앗 을 수 없는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에 대한 물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를 영원히 버리지 않겠습니까 나를 어떻게 대우해 주 시렵니까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겠습니까 고난이나 환란이 왔을 때에 나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는 의문이 다 없어집니다.

아주 순수하고 깨끗한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한 신부가 자기 남 편을 참으로 안다고 하면 남편에 대한 불평이나 불만이나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하는 요구가 다 떨어집니다. 이것이 그를 알고 그를 좇는 참 모습입니다. 6.25 때에 대전 나환자 병원이 해체되자 어떤 나환자가 개천에 나가서 얻어 먹으며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은 나환자가 아니고 깨끗한 사 람이었습니다. 고생을 모르고 산 사람이었는데 남편이 병이 나는 바람에 그렇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밥을 얻어 가지고 왔습니다. 밥을 따뜻하게 하려고 주워 온 나 뭇가지를 놓고 입으로 불면서 불을 붙이는 것을 남편이 보고 하는 말이 '이제 더 이상 나 때문에 고생하지 말라. 나를 위해서 하는 고생을 내가 감당하지 못하겠다. 나를 버리고 좋은 데 가서 살라'고 권면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부인은 그 자리에서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대성 통곡을 합니다. 우는 이유가 다른 것이 아니고 남편과 운명을 같이하고 고락을 같 이하는 자기의 마음을 남편이 알아주지 못하는 섭섭함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주님을 얼마나 알고서 주님을 나의 구주라고 하십 니까 나의 왕이라고 하십니까 주님을 어느 만큼 알기에 주님을 나의 왕 이라고 인정하십니까 아마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의 몇십 배의 깊이 와 넓이와 높이에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참 많 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불신이 끝나는 날이 옵니다. 원망이 끝나는 날이 옵니다. 부부라고 하면 남편이 나를 돈 받고 팔아서 술을 사 먹든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넘기든지 간에 그것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남편을 따르는 사람이 순전한 아내, 만족한 아내일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서도 왜 주님 앞에 불평과 불만과 공허를 느낍니 까 사마리아 사람이 오늘 오면 어떻고, 내일 오면 어떻고, 안 오면 어떻 습니까 아버지가 전보다 더 많은 일을 시키면 어떻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왜 근본적으로 한 걸음 넘어 서지 못합니까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주님과 내가 함께 있음으로써 만족할 것인데 이 사실을 추구 하지 않고 다른 데 뜻을 두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 가운데서 저는 이런 시간을 여러 번 가졌습니다. '주님이 나 를 보시는 것으로 내 잔이 넘칩니다. 내가 고생하거나 천대를 받아도 다만 주님이 나를 보시는 것으로, 주님이 내 고난을 내 환란을 내 생을 보시는 것으로 내 잔이 넘칩니다. 내가 만족합니다' 하는 고백의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고백하고 참으로 사랑에 화합한 것이 내 육신의 감정이나 육신의 어떤 요소에서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끝까지 '주님 이 나를 보시는 것으로 내 잔이 넘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으 로 나의 잔이 넘칩니다' 하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라고 하면 누구나 이런 사실을 다 가져야 될 것입니다.

다윗도 주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좋은 일만 온다 는 것이 아닙니다. 사망의 음침한 길을 걸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음은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심이라.' 앞서 간 성도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당신이 참으로 안식했느냐, 평안을 누렸느냐 무엇을 근거해서 안식을 누렸느냐, 평안을 누렸느냐' 하고 물 어 보세요. 주님이 자기를 보시는 것으로 자기와 함께 계시는 것으로 안식 과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 외의 것으로 안식과 평안을 찾으려고 하면 끝이 없고 그 안식과 평안은 성도의 마음 속에 오지 않습니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원수 되었을 때에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나의 죄의 보장이 되시고 나의 의의 보장이 되시는 주님을 내가 알면 그 주님에게 내가 더 이상 무엇을 물을 게 있겠습니까 죄에 대해서 의에 대 해서 영광에 대해서 주님에게 다시 물어야 할 것이 있습니까 이것이 여 러분의 신앙 생활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은 봉사를 해도 봉사인 줄을 모릅니다. 아무리 봉사를 해도, 주 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아무리 봉사해도 봉사인 줄을 모릅니다. 봉사인 줄을 모른다 하는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를 생각하시 기 바랍니다.

또 아무리 수고해도 수고인 줄 모릅니다. 남이 하지 못하는 충성을 해 도 충성인 줄 모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대신 죽으셨고 나는 주의 보 혈로 사신 바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 다. 주님은 나를 사시고 나는 주님의 사신 바 된 이 관계가 어떠한 관계냐 하는 것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눈물로 주의 발을 씻기던 마리아에게 물어 보세요. 마리아가 수 없는 눈물로 주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았습니다. 값 진 향유를 갖다가 주님의 머리 위에 부었습니다. 그 마음 속에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일을 나는 이렇게 했다' 하는 그런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뿐입니다. 잘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동방 박사는 메시야이신 아기 예수님을 찾 아 뵈옵고 예물을 주 앞에 드리면서 경배했습니다. 동방 박사만 이런 신령 한 예배나 예물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도 이런 예배와 이런 예물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들은 주님에 대해서 더 이상 물을 말이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 다. 만일 동방 박사들에게 '이 아기가 메시야인가, 정말 메시야인가' 하는 의혹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런 예물을 드리지 못합니다. 그런 의문의 여지가 있다면 평안이나 안식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황금은 없습니다. 그러나 황금에 뒤지지 않는 것이 주님 에 대한 예배요, 경배요, 감사입니다. 우리에게는 몰약이 없고 유황이 없습 니다.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한복음 16:24) 영적 기쁨입니다. 영적인 낙오가 없습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 령으로 인도함을 받으며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 날에 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 것도 물을 말이 없으리라' 하는 이 말씀도 내 안 에서 장시간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다 표현을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회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이 있었고 구원에 대해서도 성 결에 대해서도 의에 대해서도 많은 갈등을 가지고 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구원과 성결과 의에 대해서 또 주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서 물어 볼 것 이 없습니다. 만일 아직도 주님에 대해서 주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서 물 어야 할 것이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말씀한 대로 그에게는 평안이 없습니 다. 안식이 없습니다.

평안과 안식은 잔잔한 물 위에 배를 띄우는 것 같이 만사에 형통한 것 이 아닙니다. 육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만사에 형통할 길이 없습니다. 그 러나 그 육 안에 사는 심령은 만사가 형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에 내가 가고 주님이 거하는 곳에 내가 거하고 주님이 당하는 일을 내 가 당하고 주님이 가지는 영광을 나도 가질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 신앙 하는 사람만이 누리는 안식이요, 평안입니다.

더 말씀드릴 것은 이렇게 성숙한 신앙에 도달하려면 그 통로는 물론 말 씀입니다. 물론 성령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그 통로는 기도입니 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은 극히 다릅니다. 기도하면 할수 록 그 마음이 주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마음이 넓어집니다.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스가랴 12:10) 주님은 분명히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기도하는 영을 부어 주 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것을 부어 주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부어 주겠다거나 다른 사람은 굶어 죽어도 나는 굶어 죽지 않도록 해 주 겠다거나 다른 사람은 헐벗어도 나는 헐벗지 않게 해 주겠다는 것이 아닙 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기도할 수 있는 영을 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 다. 은혜 중에 은혜입니다. 힘 중에 힘입니다.

너희 입을 크게 벌리라. 내가 채워 주겠다. 입을 크게 벌리라 하시는 그 입이 무엇이며 또 무엇을 채워 주시겠다고 하는 것인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크게 벌리면 내가 채워 주겠다'는 이 약속이 우리에게 성취될 때에 이런 사실의 결과가 오게 됩니다. 그 외에는 안됩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 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 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고린도전서 13:10) 이 말씀이 성취된 것이 바로 요한복음 16장 23절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주님에게 아무 것도 물을 것이 없는 위치입니다. 바울뿐만 아니라 우 리 모두에게 이 말씀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 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 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 스스로 내 신앙의 모습이 여전히 어린아이인가 하는 것을 돌이켜 볼 수 있습니다. 주 안에서 어린아이입니다. 주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어 린아이라 하는 칭호를 못 줍니다. 주 안에서 어린아이를 말씀합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립니다. 언제 세상 떠난 후에 아닙니다. 이 몸을 입고 있는 동안에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게 됩니다. 아는 것도 일하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어린아이와 다릅니다. 확실히 다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내가 주님을 온전히 알리 라...' 그때란 어느 때입니까 몸을 벗는 날에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몸 안에 있는 동안에도 주님이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나도 주님을 압니다. 참 귀합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신앙의 말씀이나 신앙의 내용 밖에서 살 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붙들고 많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 말의 뜻을 모릅니다. 이 해를 못합니다. 많이 기도한 가운데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것, 나타나지 않았던 것이 수없이 나타나게 됩니다.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같이 내가 주님을 알게 됩니다. 참 귀한 것입니 다. 주께서 오십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함으로 이 사실이 이루어집니다. 주 께서 주시고 나는 받지만 구체적으로 받는 통로는 기도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 됩니다. 과거에도 그 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미련하게 들리는 것이 없습 니다. 왜 우리의 생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우리 육신으로는 이해하지 못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안 맞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 님의 능력입니다. 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잘 생각해야 됩 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 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 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5) 참 귀한 말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영적 판단입니 다. 성령이 오셔서 알게 해 주시는 앎으로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 야 될 것인지 저렇게 해야 될 것인지 남에게 가르침을 받지 않고 스스로 알고 행하게 됩니다.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않느니라.' 바울은 모든 것을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판단을 받지 않았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사람으로서 하 기 어려운 말입니다. 아무리 바울이라 해도 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나를 본받으라' 하는 말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본받으라고 할 것입니 까 우리 마음 속에 내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어려운 것 입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이성으로써 판단할 수 없는 것이 이 안에 있습 니다. 사람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이 안에 있습니다.

 (기 도) 우리가 예측도 못하고 감히 헤아릴 수도 없는 주의 크신 부름에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를 허구 많은 시간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인도해 오시면서 주님을 나타내 보이시고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을 맛보게 하시고 노래 하게 하신 주님, 이제 그 날이 우리에게 속히 와서 다시는 주님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잠잠히 따라 나가는 저희들이 다 되게 하여 주 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아직까지도 저희가 세상에 대한 근심이 있다고 하면 그 결과가 무엇인 것을 밝히 알게 해 주시며, 주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소망 이 있는 것을 알고 열심을 더하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약속하신 말씀 가운데로 이 대열 가운데로 앞서 간 성도들이 다 나아갔 듯이 저희들도 뒤따라가서 주께 예배하는 자와 함께 예배하게 하시고 주 와 함께 기쁨을 나누는 자와 함께 기쁨을 나누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하며 육신의 장막을 벗어 놓을 때에 얼굴과 얼굴을 대함같이 주님이 나를 아시 는 것 같이 내가 주님을 아는 일에 우리의 심령이 나가게 하시기를 바라 고 원합니다.

다시 만날 때까지 주께서 우리 안에서 말씀으로 역사해 주시기를 바랍 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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