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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0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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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 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 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 니라.

 (기 도)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저희가 다른 것을 원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뜻이 우리 마음 속에 펼쳐질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입에 두실 것을 원하게 하옵소서 말씀을 가졌으면서도 말씀이 없는 자처럼 방황하지 않게 하시고 광야에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마음이 끊어지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밤 새도록 우는 무리와 같이 되지 않게 하시고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법궤와 함께 요단을 건너서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을 유업으로 얻는 데까지 나아가 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에게 주셔야 할 말씀과 주셔야 할 시간을 이미 주셨사오니 축복해 주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주고 안

다음(엔터) 연속출력(NS) 기타(Z) > 주시는 것은 주의 뜻에 있사오나 우리가 구하고 찾는 것은 마땅한 일인 줄 압니다. 주께서 은혜로 채워 주시기를 비옵니다. 이를 위해서 수고하는 모든 손길 위에 주께서 함께 하시고 교회와 함께 동행해 주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 멘.

 우리가 함께 봉독한 요한일서 4장 7절에서 9절까지 있는 말씀과 예레미 야서 31장 3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중심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내용을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의 그 사랑이 나를 향하신 사랑이라 는 것을 확실히 믿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저 입에 붙 은 말로 하거나 남의 일로 생각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 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예 레미야 31:3) 하나님은 무궁한 사랑이십니다. 누구에게 무궁한 사랑이십니까 나에게 무궁한 사랑이십니다. 만일 이것을 깨닫고 이렇게 산다고 하면 여러분이 땅 위에서 오래 살거나 잠깐 살거나 무엇을 많이 하거나 적게 하거나, 그 는 실패자가 아니고 말씀과 함께 승리하는 사람입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앞서 간 성도들의 마음 속에, 입에 주신 것이 하나님 의 애가와 애곡이요, 감추었던 것을 펼쳐 주신 것이 애가와 애곡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애가와 애곡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근원 없는 일이 없습니다. 신구약 66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의 근원은 다른 것 이 아니고 사랑입니다. 사랑을 근거로 해서, 근원으로 해서 하나님의 애가 와 애곡이 펼쳐졌습니다.

만일 절대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의 근원이 아니라고 하면 이름은 아무리 애가와 애곡이라 해도 그 질이 다릅니다. 따라서 실행하는 것도 다르고 그 결과도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이라, 또 언약이라 하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 속에 혹 애가와 애곡이 있다 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주시는 애가와 애곡과는 전혀 다릅니다. 또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이나 자 녀에게 둘도 없는 맹세나 약속을 한다 해도 그것과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하신 맹세, 약속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 때 에 우리가 귀중한 것을 잡게 되고 또 귀중한 것을 신앙하게 됩니다.

주님 말씀에 '내 생각과 너희 생각이 다르고 내 길과 너희 길이 다르다' (이사야 55:8)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 릅니다. 우리의 길과 하나님의 길이 다릅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인정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 은 그 근원이 하나님 자체이지만 우리는 다소의 인정을 가지고 산다 해도 그 인정의 근원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주님을 사랑한다, 교회를 사랑한다, 복음을 사랑한 다, 별별 말을 다해도 내가 하나님을 향해서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실천하신 사랑입니다. 또 실행하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해서 그 사랑을 실행하신 일이 많고 또 나에게 실행하실 일이 많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면 참 귀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무궁한 사랑을 실천하셨다. 동시에 나에게 실천할 사 랑이 무궁하다.' 하는 이 사실을 우리 마음 속에 품는 것이 참 귀합니다.

우리가 돈 벌 마음이나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듯이 우리 심령 속 에 이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을 품고 있다면 얼마나 귀한 신앙인지 모릅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자를 믿으면서 후자에 속한 신앙을 강하게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이런 사실을 믿지 못하면 믿을 수 없다면 이런 사실이 믿어지 지 않으면 하나님의 하신 일을 보고라도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지금까 지 하신 일, 앞으로 하실 일, 다시 말하면 실존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믿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별다른 재주를 부린다 해도 하나님은 그 재주에 속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것으로 과장한다 해도 하나님은 그것 에 속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누가 자기에게 향한 하나 님의 애가와 애곡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 중에 이것은 '구약이니까, 율법이니까...' 하고 넘기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또 이것은 '말씀이니까...' 하고 넘기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이 렇게 넘기는 사람이 얼마가 되든지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또 누가 그렇게 하든지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 할 사람입니다.

만일 이 말씀을 구약 시대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던 말로만 듣고 믿 지 못한다고 하면 신약 시대에 사도 요한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우리 에게 증거하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 무궁한 사랑입니다. 누구에게 나에게, 또 믿는 자에게 무궁한 사람이십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하다가 놓고 저것을 하든 지, 여기로 왔다가 다시 저기로 간다 해도 이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지 내시기를 원합니다. 이 무궁한 사랑이 여러분의 생활 전체가 되기를 원합 니다.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도 또 주님이 성육신하셔서 인간 가운데 오신 것 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주 님이 하신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이나 17절 말씀을 하나님의 애가와 애 곡으로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나간 말로 듣지 않습니다. 지나간 구슬픈 노래 한 가락으로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실하신 약속으로 받습니 다. 절대 이루시고 이루실 말씀으로 듣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하 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이 신자입니다.

만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못 믿겠거든 우리 가운데 있는 하 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라도 보고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는 부모의 사랑입니다. 물론 부모님의 사랑을 거역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러나 부모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의 사 랑이 대표적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것과 같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있습니다. 그는 부 모를 거역했습니다. 범죄했습니다. 나아가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않았습니 다. 더 나아가서 부왕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자기 아버지에게 원수가 되었 습니다. 대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기를 압살롬이 어떻게 자기 아버지 다윗을 대적하게 되었는가, 원수가 되었는가 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 있겠습니다. 그 러나 사실입니다. 아버지를 대적했습니다. 원수가 되었습니다. 나아가서 힘을 모아서 부왕의 자리를 뺏는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조금도 변 하지 않습니다. 또 변할 수 없습니다. 다윗의 모든 대신들이 모두 압살롬 을 처단해야 된다 죽여야 된다고 하지만 그 아버지 다윗의 마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 아버지의 사랑의 근원이 어디인가 하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원수처럼, 대적처럼 벌을 받기에 합당한 생활을 오늘까지 하고 있지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습니다. 무궁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모르는 아들, 이 사랑을 거역하는 아들은 이름만 아들이지 아들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변치 않지만 이 아들은 공의에 대해서 심판을 받았습 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거역한 아들, 대적한 아들은 돌무더기에 묻혀서 비 참하게 생을 마쳤습니다. 여러분, 이런 말씀은 우리가 허술히 넘겨도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가 되는 다윗의 사랑을 그가 깨닫고 뉘우치고 최후에라도 '아버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용서하십시오.' 하고 아버지 앞 에 손 들고 항복했더라면 압살롬을 죽일 법이 없습니다. 왜 왕이 그를 사 랑하기 때문에 못 죽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된 사람,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심령을 완전히 채 운 사람이 많은데 그 중에 예레미야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가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하나 밖에 없습 니다. 다윗의 법이 아무리 많아도 압살롬을 향해서 우는 법은 없습니다.

많은 대신이 있을지라도 다윗 같이 압살롬을 사랑하는 대신은 없습니다.

다윗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주님 외에는, 아버지의 사랑을 나에게 실천하 신 주님 외에는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버 지라 부르고 돌아갈 수 있는 위치는 하나뿐입니다.

늘 말씀합니다만 탕자가 아버지에게 돌아올 때에 아버지는 탕자를 향해 서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책망 없는 아버지, 책망 없이 받아 주시는 아버 지, 오히려 제일 좋은 것으로 아낌 없이 입혀 주시는 그 아버지... 만일 여 러분의 심령 속에 이 말씀이 펼쳐진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애가와 애곡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탕자와 그 아버지 사이의 사랑을 통해서, 탕자인 나를 하나님은 (주님 은) 어떻게 용납하시는가 하는 것을 깨닫고 감격의 눈물, 감격의 헌신이 있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이 펼쳐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궁한 사랑입니다. 아침에 있다가 저녁에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무궁한 사랑을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통해서 우리 마 음 속에 옮겨 주시는데 그 무궁한 사랑이 내 마음 속에 펼쳐지면 하나님 의 애가와 애곡이 내 마음 속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랑이 내게 없 으면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이 내게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말씀하 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이 없으면 여러분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까 무엇으로 생을 끝마치겠습니까 여러분의 생애 안에 나 를 향한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이 펼쳐져서 산다고 하면 다행이지만 그것 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 설 재간이 없습니다. 설 법이 없습니다. 끝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외치시는 말씀이 바로 '내가 네게 주는 무궁한 사 랑에 거하라, 무궁한 사랑 안에서 쉬어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 속 에 펼쳐지지 않으면 주님 안에 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담배를 피우면 못 거하는 것 같고 담배를 안 피우면 거하는 것 같고, 충성하면 거 하는 것 같고 충성하지 못하면 못 거하는 것 같아서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거하는 것도 모릅니다. 하 나님의 애가와 애곡을 모르니까 그 애가와 애곡 안에 거하는 것도 모릅니 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만 가지를 요구한다 해도 (그렇게 요구하지도 않 습니다만) 한 가지로 말하면 '모든 것을 쉬고, 너를 향한 나의 애가와 애 곡 안에, 무궁한 사랑 안에 거하라 안식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의 사랑을 알아야 안식하고 하나님의 심령을 알아야 안식합니다. 안식하 지 않는 것은 범죄입니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 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예 레미야 31:3) '나는 너를 무궁한 사랑으로 또 인자함으로 인도하였다.'-하나님의 사 랑을 모르면 나를 향한 사랑이 무궁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또 하나님의 사 랑을 모르면 그의 인자를 알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하나님의 사 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나에게 무궁하다, 내가 이렇게 살든지 저 렇게 살든지 이 땅에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고 무궁하도록 나를 사랑하신 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너를 인자함으로 인도했다, 영접했다.'-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인 자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면 영접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여러 분을 어떻게 영접하고 계시는지 모른다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을 모르기 때문에 왜 성경 말씀이 애가 인가 애곡인가, 또 저 목사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애가라고 하는가 애곡이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귀를 흥분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백성의 반응, 오늘 신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만일 그들에게 홍해가 없었고 광 야 40년이 없었다면 좋은 반응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홍해 가 그들 앞에 있었고 그들은 광야 40년을 살아 왔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 님의 애가와 애곡 앞에서 인자로 너를 인도했다는 말씀 앞에서 그들이 아 무 반응이 없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심령은 반응이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여러분 들과 달라서 교회가 주시는 것을 흡수하고 삽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 러분들과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돌아온 탕 자와 같이 돌아온 므비보셋과 같이 감격과 감사가 있어야 할 것인데 그것 이 없습니다.

홍해나 광야 40년이 그들에게 찌르는 가시가 되었고 눈물 흘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반응 을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했다.-오늘도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은 사 람이 있다고 하면 벌써 이 애가와 애곡을 알고 무궁한 사랑에 감복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할례, 신앙의 할례가 없기 때문에 '인자함 으로 너를 인도하였다'고 하시는 말씀 앞에서 아무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과 신앙의 할례가 없으면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겠는데 그렇 지가 않습니다. 마음과 신앙의 할례가 없는 사람들은 깨든지 자든지 밥을 먹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누구를 거역해요 항상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 니다. 내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요, 성 령의 말씀입니다. 내 자신이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면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또 항상 성령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성령을 거역하면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시는 애가와 애곡 속 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습니다. 무궁한 사랑에 내가 접근하 지 못합니다.

이 사랑은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의 사랑은 하나님을 향 한 사랑도 교회를 향한 사랑도 좋으면 하고 나쁘면 안합니다. 유익이 있으 면 하고 유익이 없으면 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 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다 해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 습니다.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입니다.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를 향하여 이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사랑은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고상하게 배우고 고상하게 가르치면 되는 줄 알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과 상관 없 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배워서 압니까 가르쳐서 압니까 공부를 많이 하 면 압니까 아닙니다. 부모의 사랑을 아는 것은 배움에 있지 않습니다. 똑 똑함에 있지 않습니다. 직업에 있지 않습니다.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부모의 심정 속에서 흘러나오는 그 사랑을 어릴 때부터 느끼든지 커서 느끼든지 자기가 직접 느낌으로써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느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무슨 글로나 제도를 통해서가 아닙니다. 제도보다 글보다 훨씬 더 큰 비중으로 내 마음 속을 차지합니다.

또 하나는 평상시에 내가 불효를 한다 해도 어느 단계에 가면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에 감격해서 남이 안 우는 울음을 울게 됩니다. 가슴 을 찢으며 우는 시간이 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시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을 내가 느끼는 시간, 무궁한 사랑을 내가 느끼고 그 는 인자함으로 나를 인도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특별히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이 사실에 대한 물음을 잊는 시간 이 가장 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애가와 애곡이라 하는 것을 누가 모릅니까 그러나 그 가 그 애가와 애곡을 내 입에 두시고 내 심령 속에 펼쳐 주시는 일은 아 주 귀합니다. 신자라고 해서 다 그런 것도 아니고 목사라고 해서 다 그런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이 땅 위에 사는 동안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에 감 격해서 무궁한 사랑, 알파와 오메가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하나님은 나에 게 원하십니다. 다른 일을 원치 않으십니다. '먼저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 안에 거하라. 도피성 안에 거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지 못 하면 다른 것도 다 불순종입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스바냐 3:17) 같은 사람이지만 어린아이는 자기로 인해 부모가 기뻐하고 만족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은 부모의 최대의 기 쁨입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알지 못하는 것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 하시고 또 기뻐하시면서 만족하시는 것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장성해서 자기가 직접 자식을 키우게 되었을 때 부모가 나를 이 렇게 사랑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을 많이 해서, 귀하게 살아 서 사랑하기보다는 그 아이 자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많이 하거나 잘해서 하나님 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아니고 또 하나님이 그 잘하고 많이 하는 분량을 보시고 기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독생자의 흘리신 피로 구속함을 받은 그 심령 자체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만족해 하십니다.

걸음을 가르치고 (호세아 11:3) 어린아이가 어렸을 때에 부모가 자기에 게 걸음을 가르쳤다고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생각도 못하고 그런 줄 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 어린아이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후에 가서 그것을 압니다. 신앙도 어느 정도 성숙해야 하나님과 주님의 사 랑을 알게 됩니다.

내가 걸음을 가르치고 팔로 안을지라도 내가 저희를 고치는 줄을 저 희가 알지 못하였도다. (호세아 11:3) 이것이 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 있는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심령이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교회, 아는 신자가 극히 귀하고 드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고치신다는 것보다도 내가 다시 나는 일을 준비해 놓 고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내게 달라진 것이 없으므로 성경이 나를 고치신 다는 말을 그렇게 실감하지 못합니다.

내가 다리가 부러졌거나 팔이 부러졌을 때에 어느 의사가 또는 부모가 그것을 고쳤다고 하면 나은 다리를 보고 고쳤다 하는 말을 실감하게 되지 만 그런 것이 없으면 실감하지 못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심령 속에 주의 성령(말씀)이 오셔서 고친 것이 무엇 인지, 새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사실이 무엇 때문인지를 모르기 때문 에 이런 말씀이 실감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 었노라. (호세아 11:4) 어떤 무력의 줄이나 율법의 줄이 아니고 사랑의 줄입니다. 참 귀한 말 씀입니다. 이 사랑의 줄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내 생활 가운데서 이 런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런 말씀을 실감 하고 감사할 수 있었다고 하면 광야에서 죽지 않습니다. 죽을 이유가 없습 니다. 절대 안 죽습니다.

그러나 광야 생활 가운데서 이런 말씀을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걸음을 가르치시거나 고치시거나 또 율법의 줄이나 계명의 줄이 아닌 사 랑의 줄로 나를 이끌고 오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말하면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온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무엇으로 이끌어 주셨는가 하면 사랑의 줄이었습니다. 사랑의 줄! 역시 우리도 주님의 사랑의 줄로 이끌림을 받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 이것을 믿는 것이 참 귀한 일입니다.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었으며'-우리 마음의 멍에를 주님 이 벗겨 주셨습니다. (호세아 11:4) 주님이 죽으심과 사심으로 죄의 멍에, 사망의 멍에, 심판의 멍에를 다 정리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아는 신자와 모르는 신자, 거기에 대한 감사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판이하게 다릅 니다.

'저희 앞에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죄와 사망의 멍에를 벗겨 주셨을 뿐만 아니고 그들 앞에 먹을 것을 준비하시고 마실 물을 준비하셨습니다.

(호세아 11:4) 이 사실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처녀 이스라엘이라. (예레미야 31:4) 이것은 너무 감당할 수 없는 말입니다. 처녀라고 하는 것은 남성을 알 지 못하는 처녀, 또 남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처녀라고 합니다. 깨끗한 처녀, 정결한 처녀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 을 가리켜서 '처녀 이스라엘'이라는 말을 아주 많이 했습니다.

사실상 저들은 처녀가 아닙니다. 더러울 대로 더러워졌습니다. 다시 말 하면 다섯 남편을 둔 여인, 고멜, 음행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바로 우리의 신분인데 성경은 (말씀은) 이러한 우리를 처녀 이스라엘이라고 부 릅니다. 참 귀합니다.

처녀가 아닌 부정한 나를, 더러운 나를 부정치 않은 깨끗한 처녀로 대 해 주시는 이 사랑,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런 것을 깨 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에다 하나를 보태면 둘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처녀가 아닌 사람을 처녀로 인정해 주심을 아 는 것, 깨닫는 것이 신앙입니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 네가 다시 소고로 너를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며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과실을 먹으리라.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숫군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 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나아 가자 하리라. (예레미야 31:4-6) 이 말씀을 보면 먼저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온전치 않은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럽고 썩고 냄 새나는 우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너를 다시 세우리라' 하는 것인데 참 귀한 말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그 앞에 도저히 설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께서 다시 세우시는 일인데 그가 세우실 때에 세우심 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리하게 억지로 세우지 않습니다. 즐겨 세우심을 받아야 합니 다. 온전치 않은 것, 더러운 것, 처녀 아닌 자를 그것과 상관 없는 위치로 세워 주시는 것을 깨닫는 것이 참 귀중합니다. 그가 세우실 때 세우심을 받는 사람, 그가 부르실 때 부르심을 받는 사람, 그가 영접할 때 영접함을 받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더 나가서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다시 소고로 장식하고 즐거운 무리처럼 춤추며 나올 것이라.'-내가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입을 때 영 접을 받을 때 나 자신은 아무 감각도 없고 아무 것도 모른 채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분명히 압니다.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해도 탕자는 압니다. 자기 옛 생활과 현재의 생활 을 압니다. 세상 사람은 몰라도 불한당 만난 사람은 자기가 어디에서 누구 에게 고침을 받아서 주막에 와 있는지 잘 압니다. 세상 사람은 다 몰라도 자기와 사마리아인과의 관계를 불한당 만난 사람은 압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았다, 내 심 령이 소생함을 받았다 하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해도 주와 나는 압니다. 세상이 흠모하지 않아도 나 자신은 흠모하고 있습니다.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원을 심되 심는 자가 심고 그 실과 를 먹으리라. 에브라임 산 위에서 파숫군이 외치는 날이 이를 것이라.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에 올라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 와께로 나아가자 하리라. (예레미야 31:5-6) 여기는 두 가지입니다. 에브라임 산에서 외치는 자입니다. 이 외치는 자 가 하나님의 심령을 모르고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을 모르고 외칠 수가 없 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모르고는 외칠 수가 없습니다.

외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특별히 만인 중에 세우심을 받고 성령의 계시함을 입었다 해도 그에게 먼저 주님을 알게 하십니다. 하나님 을 알게 하신 후에 외치게 하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특별히 외치는 자의 사명을 모르고 그렇게 넉넉한 그릇 은 못된다 해도 먼저 믿은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 애가와 애곡 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외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입니다. 내게 피치 못할 질병이 있었는데 누가 어떤 약을 소개해서 그 약을 먹고 나았거나 혹은 누가 어느 병원을 소개해서 어느 의사를 소개해서 내가 진단 받고 수술 받아서 그 병이 나 았다고 하면 나는 입을 다물고 있지 못합니다.

점잖고 체면이 있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법이 아닙니다. 그 염치 나 체면을 떠나서 나와 같은 함정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외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가 그렇습니다.

물론 지금은 상황이 다릅니다만 외치는 사람이 없으면 듣는 사람이 없 습니다. 외치는 사람이 없으면 고침을 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외 치는 사람이 참 귀합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 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예레미야 31:7) 하나님의 신령한 일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계속됩니다. 하나님 의 음성을 바로 들으면 율법이 아닙니다. 책망하시는 음성이 아닙니다. 또 무엇을 많이 가져 와야 많이 해야 그 보상으로 이것을 주겠다 하는 것도 아닙니다.

'목마르냐 값 없이 돈 없이 그냥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와 여러분을 부르시는 부름의 대표적인 음성입니다. 만일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무엇을 많이 해서, 더러운 것을 다 벗고, 자기 스스로 깨끗하게 해서 가려고 하면 갈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는 시간도 안 납니다. 가기 전에 포도주와 젖을 알기 전에 멸망 당합니다.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 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하 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예레미야 31:8) 부르짖는 소리 자체가 모읍니다. 그런데 모이는 사람들이 누구냐 그 소 리를 듣고 따라오는 사람들이 누구냐 성령이 부르는 사람이 누구며 그 소리를 듣고 따라오는 사람이 누구냐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참 귀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서 오는 사람은 눈이 밝은 사람이 아닙니다. 소 경입니다. 소경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율법에 제단에 예배에 소경이 필요합니까, 필요치 않습니까 필요치 않습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 랍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성령이 인도해서 모으는 사람은 소경, 절뚝발이, 잉태한 여인, 해산하는 여인입니다. 잉태한 여인, 해산하는 여인은 어떤 사람을 말 합니까 율법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렇지 못한 사람들 입니까 잉태한 여인이나 해산하는 여인-자기 몸이 정결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 앞에 못 나갑니다. 즉 율법으로 다 더러운 자, 부 정한 자입니다. 잉태한 사람도 해산하는 사람도 모두 그런 동류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생명은 이런 질의 사람들이지만 교회는 그렇 지 않습니다. 교회는 봉사, 절름발이, 문둥이, 부정한 여인들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함께 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소경 은 소경대로 함께 하고 부정한 여인들은 부정한 여인대로 함께 한다는 말 보다는 큰 무리를 이룬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가는 사 람들, 다시 말하면 선지자나 예언자나 제사장이나 아름다운 사람들도 그 사람들과 함께 떼를 이뤄서 큰 무리를 이룹니다.

이것이 신령한 부흥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부름의 부흥이요,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결과가 신앙의 부흥입니다.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울며 올 것이며...'-먼저가 통회 의 눈물입니다. 통회하면서 돌아옵니다.

다음에는 감격의 눈물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부정한 내 자신 이 하나님 앞에 어엿이 서서 동일한 백성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에 감격 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종류의 눈물이 예레미야의 눈물 에 화답하는 눈물입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누구의 눈물입니까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저는 자, 병든 자, 부정한 자, 그 앞에 갈 수 없는 자들이지만 그가 우 리를 부르셔서 큰 무리가 되어 그 앞에 나갈 때에 하나는 옛 자기를 보고 우는 눈물과 다른 하나는 새 사람이 된 감격의 눈물입니다. 저는 이 말씀 을 생각하면서 이들의 눈물은 곧 예레미야의 눈물에 보답하는, 동참하는 눈물이라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은 아버지의 눈물입니다. 용서해 주시는 자의 눈물입니 다. 용서해 주시기 위한 눈물입니다. 성도의 눈물은 용서해 주시는 그 용 서의 눈물에 대한 보답의 눈물입니다. 일치합니다.

어느 눈물은 귀하고 어느 눈물은 천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돌아와서 찬양하는 그 찬양의 눈물은 천하고 아버지의 눈 물은 귀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동일히 귀한 눈물입니다.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사람이 아무리 많을지라도 교인이 아무 리 많을지라도 다 교인이 아닙니다. 같은 말씀, 같은 예배에 참석하지만 그들이 다 성도가 아닙니다. 다만 인도함을 받는 사람입니다. 모자라도 절 어도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 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인도하시는데 그냥 인도하는 것 이 아니고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성령은 여러분을 인도하되 또 여러분이 인도함을 받되 아무 데나 갈팡질팡 인도하거나 따라 가는 것이 아니고 다 른 길이 없는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바른 길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교회가 수없이 많지만 그 많은 교회들이 낙오된 사람, 부정한 사람들을 불러내서 인도해 나가시되 하나님을 대신하시는 그 인도, 주님 을 대신하는 그 목자의 사명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 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예레미야 31:9) 인도함을 받을 때에 반드시 간구함이 따라옵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간 구가 따라옵니다. 그 간구를 따라서 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넘어지지 않게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인도하심을 받는 대상이 생명이 없는 물체 같으면 그것이 화장 실 같은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다가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보좌로 옮겨졌 다고 해도 그것에게는 감사나 찬양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생명 없는 물체가 아닙니다. 양심이 존재하지 않는 지 정의가 없는 동물이 아닙니다. 분명히 여러분은 지정의를 가지고 있습니 다. 기쁜 것에 대해서 기뻐할 줄 알고 슬픈 것에 대해서 슬퍼할 줄 아는 존재들입니다.

에스겔서 16장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피투성이가 된 사람, 벌거숭이 적신이 된 사람이 아버지의 옷으로 갈아입고 아버지가 주시는 모든 장식 물을 소유하고 좋은 가루와 좋은 꿀을 먹으면서 황후의 자리에 나갈 때에 돌이나 나무같이 옮겨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에게는 반드시 통회의 눈물과 감격의 눈물이 함께 합니다.

그뿐 아니라, 감사와 감격 안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이 은혜를 갚을꼬 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갚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람의 일로 본다면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입었을 때 앉으나 서나 어떻게 하면 이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은 혜를 망각하지 않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신앙에는 반드시 눈물이 있습니다. 통회의 눈물과 감격의 눈물이 같이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와서 큰 무리를 이루어서 나갈 때는 통회의 눈물보다는 감격의 눈물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예레미야 31:9) '나의 아버지...'-여러분이 참으로 자격 없는 사람으로 아버지라고 넉넉 하게 부를 수 있는 자리에 나갔다고 하면, 혼자 있든지 여럿이 있든지 교 회 안에 있든지 교회 없는 곳에 있든지 내 아버지, 내 주님이라고 하는 말 은 거짓이 없는 실상일 것입니다.

무궁한 사랑 안에서 애가와 애곡 안에서 듣고 믿고 거하는 자의 생활이 바로 이러한 생활입니다.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찌어다 그 때에 처녀 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 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니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을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예레미야 31:12-14) '그들이 와서...'-다가 아닙니다. 온 자, 돌아온 자에 한해서입니다. 아무 나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실질적으로 주님께 돌아온 자, 예전 땅과 지금의 땅이 분리될 수 있도록 돌아 우편한 자라야 합니다.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나는 언제 이런 벅찬 신앙의 개가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돌아온 자의 찬송입니다.

시온의 높은 곳에서 부르는 찬송입니다. 나를 돌아오게 하신 주님, 나를 대신하신 주님에 대한 감격의 찬송입니다. 주께서 부르실 때에 부르심을 듣고 돌아오는 사람, 그 사람들을 시온의 높은 곳에 세우십니다. 다시 말 하면 영적 높은 세계를 말합니다.

'여호와의 은사,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 에 모일 것이라.' (12절) 이것이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고 우리에게 주 시마 하시는 약속입니다. 어린 양의 떼도 사람이고 소의 떼도 사람입니다.

어린 양의 떼도 어린 양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성도의 떼고 소의 떼도 이 성도의 떼를 말합니다.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에 모일 것이라.'-찬양하면서 모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가 아는 대로 마음 가운 데 품고 이런 사실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 에게 이루어 주시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 (에스겔 36:37) 24절부터 약속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 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 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 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죽 약속의 말씀이 계속되다가 37절에 가서 '이 렇게 해 주기를 이스라엘이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구하면 사람의 떼를 양 떼같이 많게 하겠다.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양은 다른 양이 아니고 제사 드릴 양떼 곧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 할 수 있는 성별된 양입니다. '성별된 양으로 그 떼를 많게 하겠다. 가득 채우리라'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서의 소떼나 양떼는 구별된 떼입니다.

참 귀합니다.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12절) '그 심령'은 누구의 심령입니까 돌아온 자의 심령입니다. 이 돌아온 자의 심령을 무엇 같이 되게 한다고 요 물 댄 동산 같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돌아온 자입니다. 옛 사람이 아닙니다. 옛 길이 아닙니다. 옛 일이 아닙 니다. 새 일, 새 길, 새 사람입니다. 은혜도 새 은혜입니다. 다가 아니고 돌 아온 자에 한해서인데 그의 마음은 눈물, 한숨, 비애. 고통이 끝납니다. 새 삶을 보냅니다.

돌아온 자의 심령, 마음은 물 댄 동산 같이 됩니다. 참 귀한 말입니다.

늘 말씀하지만 물이 땅과 분리되어 있을 때는 만물이 자라나는 법이 없습 니다. 그러나 물과 마른 땅이 결합될 때에는 물인즉 땅이요, 땅인즉 물입 니다. 물이 따로 있지 않고 땅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심령에 돌아가면 주님의 심령이 따로 있고 여러분의 심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기쁨이 따로 있고 주님의 기쁨 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모르는 이유는 자격 없는 사람이지만 그가 부르실 때에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통회의 눈물과 감격의 눈물 없이 지금까지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통회의 눈물 안에서 감격의 눈물 안에서 이런 것이 다 밝아집니다.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다시는 죄 에 대한 근심도 의에 대한 근심도 영광에 대한 근심도 없습니다.

돌아온 탕자에게 한 번 물어 보세요. "당신은 무슨 근심을 가지고 있습 니까" "나는 근심 없습니다." 불한당 만나서 주막 집에 간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무슨 근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수없는 사람에게 물어도 이 근심이 다 끝났다고 할 것입니다.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목마름과 굶주림이 영원히 없습니다. 왜냐 하면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라고 하 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거짓말로 아는 사람은 거짓말로 압니다. 아무리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도 그 말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주는 물은 세상이 주는 물과 같지 않고, 야곱의 우물과 같지 않아 서 그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 다. 영원히 목마름이 없습니다. 영원히 헐벗음이 없습니다. 본래는 내가 벗 은 몸이요. 본래는 부끄러움 투성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옷을 입은 사 람은 다시는 부끄러움을 찾지 못합니다. 자기도 찾을 수 없고 남도 찾을 수 없고 하나님도 찾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말씀했고 임산에서도 말씀했듯이 제가 마음에 아주 귀하게 여기는 것은 너울 속에 있는 자의 행복입니다. 그가 남자든지 여자든지 교 회에서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든지 나사로와 같은 지위를 가지고 있든지 불문하고 그가 이 너울 속에 있다고 하면 신랑되신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 답습니다. 나는 거기서 8가지, 9가지를 예찬하는 것을 보았고 이것을 교회 에게 증거해야겠다. 확실히 더 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은 들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주의 인도하심이 참여해야 하는데 주님의 인도하심은 성령의 감화와 감동입니 다. 또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내가 들어서 알아야 됩니다. 나 없는 감동, 나 없는 감화가 없습니다. 나 없는 충만도 없고 나 없는 내주도 없습니다.

왜 우리는 지정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쁜 일에 기뻐할 수 있 고 슬픈 일에 슬퍼할 수 있습니다. 다른 동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 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피조물 중의 피조물입니다.

그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 니 (13절) '그때'는 어느 때입니까 돌아온 때입니다. 이 은혜를 입는 때입니다. 물 론 우리가 몸을 벗고 저 나라에 갔을 때 이런 사실을 누리게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때를 말하지 않습니다. 왜 말하 지 않을까요 그 말을 해 봐야... 참 어떻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 땅에서 살다가 몸을 벗고 그 나라에 갔을 때는 나를 위해 준비된 대로 다 펼쳐집니다. 더 물어 볼 것도 없고 가할 것도 없고 이러니 저러니 여기서 말할 것이 없습니다. 따라서 몸을 벗고 주님의 나라에 갔을 때를 나는 말 하지 않습니다. 평생 내가 말하는 것은 지금 현실에서 이것이 오느냐, 안 오느냐 하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그때에,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성취될 때 에 말입니다. 처녀에게 성취되면 어떻습니까 처녀는 젊은 사람입니까, 노 인입니까 처녀에게 임하면 처녀도 춤을 춥니다. 세상의 춤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먹는 일, 입는 일의 춤이 아니고 신령한 춤입니다. 다시는 거리 낌이 없는 춤을 춥니다.

청년도 그때가 오면 (말씀이 이루어지면) 또 노인도 그때가 오면 (말씀 이 그 심령 안에 이루어지면) 그때가 가장 즐거운 때입니다. 80을 살았다 고 하면 그 일평생 중에 최고의 즐거운 때가 그때입니다. 자기가 군수를 했어도 도지사를 했어도 임금을 했어도 그런 즐거움에 비할 수 없는 즐거 움입니다.

저는 이런 말씀을 늘 합니다. 내 일평생 동안에 즐거움을 두 번 보았다 고 하면 하나는 해방된 날이고 하나는 '네 죄를 다 속하였으니...' 하시는 주님과 내가 접근했던 날입니다.

청년도 새 날입니다. 노인도 새 날입니다. 청년도 기뻐하고 노인도 기뻐 하는데 노인이 다 되었을지라도 이 날이 마음 속에서 성립이 되면 그 노 인에게는 다시 없는 즐거운 날이 됩니다.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이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근심한 후에 기쁨을 얻게 할 것이라...'-돌이킨다는 것은 그 슬픔을 다시 갖다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참 귀합니다.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 게 만족케 하리라. (예레미야 31:14)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제사장은 누구입니 까 예전 구약 시대에는 그림자의 제사나 제사장도 아무나 되는 것이 아 니었습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해도 다른 지파 사람은 제사장이 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래요 레위 지파 중에서만 제사장을 뽑았습니다.

레위 지파라 해도 다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라야 됩니다. 또 레위 지 파의 남자라 해도 팔 병신이거나 다리를 절거나 얼굴에 상처가 있으면 됩 니까, 안됩니까 안됩니다. 부정한 사람입니다. 아까 말씀대로 수태한 여 인, 해산하는 여인 또 부정한 기간에 있는 사람이 다 부정한 것으로 심판 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레위 지파 중에도 남자 중에도 아무 흠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루살렘의 성전에 제사할 양은 어떤 양입니 까 작아야 됩니까 커야 됩니까 일 년 된 양이어야 합니다. 일 년이 넘 으면 안됩니다. 일 년이 못 되어도 안됩니다. 아무리 잘나도 일 년된 양, 구별된 양, 성별된 양이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여러분이 제사장입니까, 아닙니까 그걸 이해하지 못하겠거든 베드로전서를 읽어 보세요. '산 돌이신 예수에 게 나아와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 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베드로전서 2:5) 우리는 다 제사장입니다. 전에는 제사장이 제사 지낼 사람들의 중보자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중보자는 없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제 사장이고 주님을 자기의 중보자로 삼는 사람은 다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은 자기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서 부르짖고 하나님 앞 에 응답을 받고 또 백성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제사장입니다. 그러 면 이 제사장은 어떤 신분에 속한 사람들입니까 내적으로 제사장의 자격 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만일 집사님이 제사장인데 그 심령이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하면 제사 지낼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제사장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나의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 라.'-은혜라는 말이 참 귀합니다. 은혜가 만족하면 기름이 만족하고 은혜 가 만족하면 성령이 만족합니다. 그렇잖아요 '은혜로 만족케 하겠다.' 무 궁한 사랑의 요구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무궁한 사랑의 요구입니 다. 빼앗으려고 하는 요구가 아닙니다. 주기 위한 요구입니다. 우리에게 무 엇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주기 위한 요구입니다.

성령의 요구, 하나님의 요구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 린 양의 혼인 잔치는 다 준비되었습니다. 갖출 것을 다 갖추었습니다. 그 러면 어린 양과 아버지의 요구가 무엇이겠습니까 어린 양의 혼인 잔치를 준비해 놓으신 분의 요구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의 요구가 무엇이며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요구는 무엇이며 우리를 향하 신 성령의 요구는 무엇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요구는 무엇 이겠습니까 다른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다만 '돌아오라' 그 말입니다. 다 준비했으 니 돌아오라, 마음 놓고 와서 먹으라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유일 한 요구입니다. 다만 흰 옷을 입어야 됩니다. 그것도 내 옷이 아닙니다. 내 가 고쳐서 벌어서 입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의 옷입니다. 주님의 의의 옷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심령을 대신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 나님의 애가와 애곡을 대신해서 40년 동안이나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그러 나 그 호소를 안 듣는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오늘도 그렇습니다.

우리 모임은 몇 사람 모여서 밥이나 먹고 살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모임은 그렇게 하는지 몰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이 사실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나를 향하신 사랑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입니다. 우리를 위해 예비해 두신 애가와 애곡, 내 심령 속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애가와 애곡입니다. 신구약 66권 전부가 다 나 를 향하신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입니다. 들어야 됩니다. 돌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을 그대로 받아서 누려야 됩니다.

 (기 도) 주의 성령의 감화와 감동을 의지해서 그들 마음에 그들 입에 밝혀 주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애가와 애곡을 우리가 지금 그들의 입을 통해서 듣 고 있습니다. 참으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애가와 애곡을 무궁한 사랑의 소리를 듣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귀한 첫째 위치인 것을 압니다.

우리가 듣고, 이미 준비해 놓으신 그것에 의심하지 않고 나아가서 취하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이 말씀을 가지고 어린애 같은 저희들이 짐짓 말씀을 하였사오나 이 말씀 안에 은혜를 입혀 주시고 기름을 부으시사 기 름의 충만을 받는 심령이 되게 하시기를 바라고 원하오며 앞으로 있는 시 간도 주께서 축복해 주셔서 한 사람도 거저 왔다가 거저 가지 않게 하시 고 한 사람도 헛된 시간과 헛된 봉사를 하지 않도록 주께서 취급해 주시 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정말로 제사장의 마음 속에 기름으로 부어서 흡족하게 하시는 주님께서 흡족한 심령을 가지고 주의 제단에서 주님을 찬양하게 하시기를 바라오며 오늘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기를 바라고 원합 니다.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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