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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백부장의 믿음 (눅 0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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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서너 시간을 통하여 <평지보훈>을 상고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한 백부장의 종을 살려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좋은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여 줍니다. 예수님은 이 백부장이 좋은 신앙을 가졌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그는 로마인이었고 또한 군인이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하여 백부장의 믿음을 배우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좋은 신앙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Ⅰ. 백부장의 인격(1-5)

예수님은 <평지보훈>을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예수 님은 6장에서 12제자를 택하시고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이 어떠해야 되는가를 <평지보훈>을 통하여 가르쳐 주시고 이 말씀을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 가셨습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께서 복음역사를 감당하시던 갈릴리 사역의 중심지였습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와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의 고향이었습니다.(막1:16-21)
가버나움은 당시에 상당히 중요하고 번화한 중소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로마의 세관이 거기에 있었고(막2;14) 헤롯의 신하도 여기에 살고 있었습니다.(요4:46) 또한 로마의 군대가 가버나움에 주둔해 있었습니다. 아마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그 군대의 파견 대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들을 데리고 가버나움에 들어 가셨을 때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러했을 때 백부장을 통하여 그가 건강하게 되는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되는 백부장의 인격에 대하여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1)백부장의 사회적 지위 입니다.
당시 백부장은 로마 군대 지휘관으로 백명의 군대를 통솔했습니다. 더구나 식민지의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그는 막강한 권세를 가진 자였습니다. 이런 권세를 가진 그에게는 많은 종들이 있었습니다.

2)자기 종을 사랑하였습니다.
많은 종들이 있었지만 종을 사랑했고 종이 병들었을 때에 종을 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로마 법률의 견지로서는 종이란 살아있는 도구였습니다. 종을 때리고 싶으면 때리고, 굶기고 싶으면 굶기고, 버리고 싶으면 버리고,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사고 팔고 합니다. 당시 종은 주인의 재산에 속했고, 생활 수단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짐승을 부리듯 하였고 늙거나 병이 들면 짐승처럼 내다 버리고 묻어 버리기도 합니다. 또 죽으면 고양이처럼 내다 버립니다. 그렇다고 해도 종은 아무런 법적인 권리도 주장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식민지에 주둔해 있는 군인들은 강포하고 잔인 했습니다.(눅3:14) 식민지 백성들을 괴롭히고 착취를 하는 것은 보통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은 종을 사랑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종은 중풍병에 걸렸다고 했습니다.(마8:6) 여러분들이 아시는 대로 중풍병이 들면 반신불구가 되고 수족을 맘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병들어 죽어가고 있었다고 했으니까 정리하면 중풍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대소변을 받아 내어야 하고 모든 수발을 하여야 합니다. 이 종은 이제 아무런 쓸모가 없고 이용가치가 없으므로 내다 버리거나 묻어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이 백부장은 이 종을 어떻게 했습니까 3절을 보십시오.

3)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그 종을 구원하기를 청했습니다. 종을 살리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하였습니다.
백부장은 가버나움에 오래 주둔해 있으면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앞선 4:31절 이하 예수님은 가버나움 동네에 들어 오셔서 가르치시기도 하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 냈습니다.(4:31-37)
또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시었습니다.(4:38-39)
또 각색 병든 자들을 밤늦도록 일일이 다 고쳐 주셨습니다.(눅4:40-41)
또 문둥이를 고치시고(5:12-16)
또 침상 채 누운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눅18-26)
이런 여러 가지 소문을 듣고 백부장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 예수, 예수 그분만 모셔오면 내 종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 백부장의 마음 속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백부장은 즉시 유대인의 장로들을 찾아 갔습니다. 이는 백부장으로 이방인이었습니다. 할례를 받지 못한 자가 높으신 예수님께 직접 나갈 수 없으므로 유대 장로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모시고 오도록 청했습니다. 백부장은 병들어 죽어 가는 종을 살리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 하나이다”고 고백을 했습니다.(마8:6) 이 말씀을 볼 때 백부장은 그 종의 괴로움을 보고 함께 괴로워 하고 있습니다. 꺼져가는 한 종의 생명을 건지기 위해 온 힘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의 가치를 사회적인 신분이나 외모나 인간적인 능력에 두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가 사회적인 신분이 낮은 자라 할지라도 진심에서 그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귀하게 보신 것이겠습니다. 요사이 끼리끼리란 말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손해 날만한 사람 하고는 상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백부장은 손해가 나도 그를 섬기고 그를 사랑했습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백부장의 인간 됨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4)그는 유대인을 사랑하여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유대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백부장의 청을 들어 주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5절을 보니까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고 했습니다.
그는 로마 군인으로서 유대인이 식민지 백성이라고 해서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유대민족을 사랑했습니다. 이는 헤롯처럼 유대민족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성전을 짓었던 것처럼 짓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치적 목적으로나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서 회당을 지은 것이 아니고 단지 유대민족을 사랑하여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회당을 지어 줌으로서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 백부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백부장이 유대교로 개종하였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는 유대인을 사랑하여 회당을 지어 주고 신앙생활을 자유로이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했습니다.
이 백부장은 유대민족을 사랑하되 관념적으로나 이론적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사랑 했습니다. 회당을 지어주고 하인을 살리기 위해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다. 여기 장로는 회당직원이나 그 도시의 지도적인 인물이 아닌가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백부장의 인품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더웁게 하라, 배고픈 자에게 배부르게 하라 ’ 말만 하지 말고 참으로 도와 주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요사이 교회에 새신자들이 많이 들어 옵니다. 새신자들이 많이 들어오는 것으로 기뻐 할 것이 아니고 이 분들이 정말 교회에 들어 오셔서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구원을 얻도록 구체적으로 도와야 합니다. 믿음이란 들음에서 납니다.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으므로 이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예수님이 지상 명령을 하실 때 가르쳐 지키게 하라 했습니다. 말씀을 가르쳐야 믿음이 자라고 올바른 믿음이 됩니다. 요한복음 5:25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했습니다. 여기 죽은 자들은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살아나리라 했습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신앙의 뿌리가 내리지 않고 믿음이 올바르게 제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우리교회는 구체적으로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하므로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이도록 하십시다.
여기 백부장은 돈을 쓸 줄 아는 자였습니다. 돈을 두고 돈을 쓸 줄 모르는 이가 참 많습니다. 아무런 곳에나 돈을 쓴다고 다 돈을 잘 쓰는 것은 아닙니다. 백부장은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회당을 지었습니다. 회당을 지어 교육을 받게 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거기 이사장이나, 회장을 하는 것도 아니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병든 자기의 종 하나를 살리려고 오랜 투병생활에 돈도 꽤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죽어 가는 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물질을 드리고, 마태복음대로는 중풍병자였으니까 대소변을 받아내는 섬김이 있었습니다.
요사이 우리 교회는 태신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이 분들이 돌아올 때까지 뒤에서 소리없이 섬길 것입니다. 이 섬김에는 기도가 있어야 하고 매주 편지를 보내는 일과 심방하는 일과 그리고 물질의 섬김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서서히 전도하는 것을 ‘이슬비 전도’라고 합니다. 이슬은 보이지 않습니다. 또 이슬은 서서히 내리지만 땅 깊숙이 다 젖어들고 이슬을 맞고 곡식이 움트고 싹이 올라오고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듯이 성도가 열매를 맺어 갈 것입니다. 이런 이슬비 전도에 힘을 기우려 주시기 바랍니다.

옆 교회는 한 사람을 데려 오는데 3만원 이라는 돈을 준다고 합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는 거기 가 보셨던 분들도 계시지는 않는지 모르겠지만 별별 방법으로 한 영혼을 구하려고 애를 쓰는 것을 봅니다. 여기 백부장, 그는 종을 구하는데 물질도, 시간도, 봉사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Ⅱ. 이 만한 믿음(6-10)

이제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그 장로들과 함께 그 백부장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집이 멀지 아니하였는데 백부장이 예수님께 벗들을 보내어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했습니다. 그는 엄격한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율법상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행10:38) 그리고 엄격한 유대인이라면 이방인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지 않았으며 어떠한 상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막상 오시자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인 우리 집에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일로 예수님을 괴롭혀 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에 예수님을 들어 오시게 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마치 군에서 소위가 참모총장 앞에 나아가기를 감당치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인격이나 자기의 신분이나 모든 면에서는 도저히 예수님을 뵈올 자격이 없는 자신을 발견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참된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 앞에서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한 고백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지위와 권세가 높으면 보리처럼 빳빳하고 교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로 알면 참으로 겸손해 집니다. 그는 예수님이 절대자임을 알고 그 앞에 철저히 순종하고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믿고 있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이 이적을 행하실 때마다 말씀으로 꾸짖었습니다.
4:35절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있었는데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거룩한 자니이다”하고 떠들자 예수님은 꾸짖어 내쫓으셨습니다.
4:39절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들었을 때 꾸짖으시니 병이 나았습니다.
4:41절 해질 적에 각색 병자들과 귀신 들린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니 예수께서 꾸짖으사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꾸짖으시니 낫게 되는데 말씀 한마디만 하시면 나았습니다.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8) 당시 로마 군대는 철저한 명령과 복종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장교 생활을 하면서 말의 권세 “명령”에 대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상관에게 철저히 복종하고 부하들에게 복종만을 가르치는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시고 문둥이를 말씀으로 깨끗게 하시고 중풍병자를 말씀으로 걸어 가라고 하시니 걸어 갔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소문을 들으면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를 지휘하시는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군의 세계도 명령을 내리면 그대로 순종하는데 예수님이 명령을 하시면 그대로 될 것이라는 신앙입니다.

요한복음 4:43-54절에 역시 가버나움에서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이 나옵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 와서 내려 오셔서 고쳐 달라고 하였으나 예수님은 가시지 않으시고,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한 것을 봅니다. 요한복음에는 낮은 믿음을 향상시키기 위해 말씀으로 “가라 네 아들이 살아났다”하시어 고치셨고, 오늘 본문에는 백부장이 “말씀만”“명령만 하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습니다”하는 높은 믿음이 있습니다. 그의 믿음은 어떻게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댄다거나, 환상을 본다거나, 예수님의 옷을 만진다거나, 예수님의 만져주심이나 바라는, 안수를 받기를 바라고, 뭐 몸에 닿은 수건이나 앞치마를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행19:21) 천국고약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천국고약(이상한 기도원에서 밀가루에 소금을 풀어서 반죽한 것을 마시고 붙이는 것), 베드로나 바울이 다닐 때 지는 그 그림자라도 그 위에 지나도록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였습니다. 오직 말씀만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말씀만 하옵소서”
예수님은 백부장의 이 말을 들으시고 어느 정도로 기뻐하셨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기이히 여기사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하셨습니다. 대단히 기뻐하셨습니다. 여기 <기이히 여기셨다>는 말은 “he marveled at him”(RSV)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의 말을 들으시고 굉장히 놀라고 감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심히 기뻐 하셨습니다. 그래서 쫓는 무리들에게 칭찬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믿는 믿음을 크게 기뻐하셨습니다.

히11: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했습니다. 이런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저 창세기 15:6에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겠다 했을 때, 아브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밤하늘의 수 많은 별과 밤하늘에 하얗게 뿌려진 은하수를 가리키며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했을 때 아브람이 믿으니라 했습니다. 이렇게 믿었을 때 하나님이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기쁘게 받으셨습니다.(창15:6, 롬4:3,9,22, 갈3:6, 약2:23) 말씀을 믿으매 의로 여기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표적과 기사를 구했습니다.(4:23)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하는 표적이 무엇이니까(요6:30) 하여튼 이적과 기사와 표적을 구했습니다.
마태복음 12:39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믿지 않고 표적만 구하는 자들을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 제자들에게는 직접적으로 이적, 기사를 행치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말씀만을 열심히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말씀으로 양육하시고 기적과 이적은 이들에게 직접 하시지 않고 간접으로만 하셨습니다.
요즈음도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기보다 표적을 구하는 신자들을 많이 봅니다. 그래서 점쟁이를 찾아 가듯이 기도원을 찾아 가기도 하고 이상한 가정제단이라는 곳을 찾아가고 예언하는 자, 방언하는 자를 찾아가고 기도를 받고 복채를 주는 것이 옳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이란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는 신앙을 기뻐 하십니다. 언제든지 잘못된 신앙은 먼저 기적을 구하고, 기적을 보고 믿는 신앙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이란 말씀을 순종하다 보면 기적이 일어납니다.(말씀 + 순종 + 이적) 예컨대 갈리리 가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할 때, 먼저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물을 항아리에 채우라는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물이 포도주로 변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한 복음 9장에도 날 때부터 소경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눈에 발라 주시며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였을 때, 먼저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순종하여 씻었더니 보게 되는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잘되고 바른 신앙이란 <말씀 + 순종 + 이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만한 믿음은 이스라엘 중에서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만한 믿음”이란 영어로 “such great faith” 곧 “이러한 위대한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위대한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절대적으로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이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말이란 그 사람의 사상과 감정의 표현이요, 그 사람의 인격의 표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인격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믿는 것은 예수님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는 믿음을 소유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주의 영광을 맛보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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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 1

2.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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