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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 요한을 칭찬하신 예수님 (눅 07: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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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시고 나인성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 주신 사건을 통하여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생명의 주님이시요 우리의 인생 문제에 다가오셔서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믿음으로 살다가 환난을 당하고 회의에 빠진 세례 요한을 격려하시고 당시에 악한 세대를 책망하시는 사건입니다. 오늘은 본문 말씀을 통하여 패역한 세상에서 사명자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잘 배우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요한에게 확신을 심어 주신 예수님(18-23)

18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했습니다.
여기 이 모든 일이란 3:20절에 요한이 옥에 갇힌 이후의 모든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 하던 중 예수께서 요단강으로 나오시자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그 위에 강림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요1:34) 이런 일이 있고 난 이후 세례 요한은 헤롯이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살며 헤롯이 해한 모든 일이 악함을 책망하자 헤롯이 세례 요한을 마카에루스(Machaerus)성(城) 지하 감옥에 강금을 시켰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투옥된 후에 복음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후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후 예수님은 광야 40일 동안 성령에 이끌려 기도하시고 성령이 충만해 돌아 오셔서 갈릴리에서 복음 사역을 시작하셨는데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귀신들린 사람이 귀신이 나가고, 시몬의 장모가 열병이 들었는데 그것을 고치고 또 각색 병든 자를 고치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교 지도자들의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자들은 색안경을 끼고 예수님께 조사단을 파견했습니다.(5:17)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손 마른 자를 고치시고 또 중풍 병자를 고쳤습니다.(5:17-26) 이 안식일 문제며 죄 사하는 사죄의 문제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은 여러번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헤롯당과 결탁하여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6:11) 이런 살벌한 가운데 예수님은 산으로 가사 기도하시고 열두 제자를 택하시고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평지보훈을 말씀하시고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을 고치시고, 또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 장례를 치르러 가는 행렬을 세우고 상여의 관에 손을 대시며 살펴 주셨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 모든 일을 지금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세례 요한에게 보고를 하였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세례 요한은 자기 제자 중 둘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니까” 하였습니다. 이 질문을 볼 때 세례 요한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왜 이렇게 세례 요한의 마음이 흔들리며 의심이 일어났겠습니까1)첫째,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신속하게 어둠의 권세와 불의의 세력들을 심판하실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그것을 하지 않으므로 의심이 생겼습니다.
세례 요한의 눈으로 볼 때 예수님의 일이 너무 무기력하게 여겨지고 연약해 보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왜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능력을 가지고 로마를 뒤엎고 헤롯당을 일망타진 하여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주시지 않는가 그리고 왜 빨리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지 않는가 이런 여러 가지 의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2)둘째, 세례 요한을 구출해 주시지 않으므로 의심을 가졌습니다.
세례 요한은 회개의 메시지를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장차 올 심판을 피하라 하더냐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자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눅3:7-9) 그리고 헤롯이 그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아내로 삼아 살자 그 불법을 책망하다가 지금 강금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불의의 세력들을 파하실 줄을 굳게 믿고 담대하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구해 주거나, 서명 운동도 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둑 컴컴한 지하 감옥에서 기약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려야 하는 자신을 바라 볼 때 예수님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서 생명을 바쳐서 충성한 자기를 구해 주시지 않는가 이용 할대로 다 이용해 놓고 더 이용 할 가치가 없으니까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가 하는 회의도 들 수 있습니다.
3)셋째, 유대인들이 대규모적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복종하여야 하는데 예수님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시 유대교 당국자들은 예수님을 미친 사람 취급을 하고, 이단시하고, 예수님을 참담한 자로 몰아붙여 죽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중에서도 기적적인 방법을 취하시지 않고 조용히 제자 양성만을 하시니까, 그것도 열둘을 택해서 하십니다. 너무 초라하고 요한의 눈으로 볼 때 너무 시시해서 자기 제자 둘을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하고 질문을 하는 세례 요한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도착했을 때, 그 시각에 예수님은 마침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21절을 보십시오. 마침 그 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자비와 사랑의 주님이시요 인생의 모든 무거운 짐을 풀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세례 요한이 생각하는 그런 심판의 메시야는 아니였습니다. 무력으로 로마를 뒤엎고, 헤롯의 세력을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해방을 갖어다 주는 민족해방자는 아니었습니다. 조용히 한 영혼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시고 육신의 질병과 고통 그리고 악귀 들린 자를 고쳐 주시며 소경을 보게 하셨습니다. 병든 몸과 상한 마음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목자를 잃고 유리 방황하다가 길을 잃고 병이 들고 사나운 맹수에게 찢긴 상한 양 떼들을 일일이 어루만지시며 고쳐 주시고 치료해 주시는 선한 목자 예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모시면 모든 상처와 고통을 깨끗이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악령에서 벗어납니다.

J.Hart는 1712-68년에 살던 사람인데 그는 그의 시(詩)에 예수님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 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추한 자의 정함과 죽을 자의 생명이며 죄인들의 중보와 멸망 자의 구원되고 우리 평화 되시네(찬송 94장)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니까” 하고 질문을 하자 예수님은 이 질문을 받고도 상당한 시간이 흐르도록 대답을 하시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질병과 고통과 악귀 들린 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고,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셨습니다. 이 6가지는 구약의 메시야의 이적으로 예언된 것입니다.(사35:5-6, 사61:1,2) 그러므로 이 회답은 자신이 메시야인 것을 자증하는 말씀입니다. 또 실제 요한이 보낸 제자들 앞에서 마침 그 시각에 질병과 고통 및 악귀 들린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요한이 보낸 제자들에게 시청각 교육을 하신 것입니다.
소경이 보며(사29:18, 35:5)
앉은뱅이가 걸으며(사35:6, 61:1)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사61:1)
귀머거리가 들으며(사29:18, 35:5)
죽은 자가 살아나며(사11:2)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사11:2, 42:1-5, 60:1,2) 하여라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런 예언의 말씀이 문자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고 있음을 증거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마음 속에 말씀을 심어 주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오실 그이심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주심으로 마음에 확신을 심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과 이적의 역사를 이루셔도 바리새인들처럼 어긋나게 볼려고 하면 더욱 큰 불신에 빠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 속에 신앙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말씀에 대한 절대 신앙만이 모든 회의와 불신에서 우리를 구해 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려운 문제가 생기고, 마음에 문제가 생기면 이 사람 저 사람 사람을 찾아다닙니다. 사람의 말을 들으니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큰 시험과 회의에 바질 뿐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의심이 생길 때일수록 더욱 말씀을 읽고 말씀에 매달려야 합니다. 거기에 참삶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 거하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너는 동산의 모든 나무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는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였더라면 낙원을 계속 누리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 행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행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매달리며 순종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영화 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알려진 “벤허”를 쓴 작가는 웰레스인데 그는 해군 장성 출신입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불신과 악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책들을 읽고 마지막에는 성경을 읽고 연구해서 기독교의 비진리와 거짓을 만천하에 선포하고자 결심을 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또 읽고, 읽다가 큰 감동을 받고 마침내 가장 진실한 크리스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벤허”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원래 이 책의 본명은 “예수의 이야기”입니다. 하여튼 마음 속에 의심이 생기고 문제가 많이 일어나고 시험에 들 때면 더욱 성경 말씀을 읽고 가까이하고 이 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어떤 경계의 말씀을 하셨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실족하지 않고 지금까지 달려온 믿음의 길을 계속 달려 갈 수 있도록 격려하신 말씀입니다만,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고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복음 역사와 가르치심을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만, 자기 생각을 고집하고 반발하는 자, 또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와 가르치심을 거절하고 걸려 넘어지는 자는 불행합니다.
베드로는 이 예수님을 “거치는 반석”이라고 했습니다.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 지나니 이는 저희로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6,8)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처음에 자기의 생각, 자기의 계획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자기 생각대로 예수님이 해 주시지 않으므로 많은 의심과 실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제자를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하고 이제는 자기 생각을 버리고 유유히 그리스도의 길을 여전히 따라갑니다. 이와 같이 성도여러분들도 내 계획, 내 생각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실족치 말고, 내 생각을 부인하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받아 드리고 순종하여 열매 맺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제자들의 보고를 들은 세례 요한은 만족을 했습니다. 모든 의심의 구름은 사라지고 성경대로 성취 되는구나를 알고 그는 감옥에서 그대로 신앙을 지켜 갔습니다. 그래서 이 23절 공동 번역에는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자는 참으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Ⅱ.세례 요한을 칭찬하신 예수님(24-28)
1) 세례 요한을 선지자보다 나은 자라고 칭찬을 하셨습니다.(26)
세례 요한은 선지자인데 선지자보다 나은 선지자라니까 선지자 중의 선지자입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기회주의자도 아니요,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세속적인 지도자가 아니란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나간 것은 그러 자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광야에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습니까 2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선지자냐” “옳다”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를 보려고 광야에 나갔습니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뜻과 계시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사명을 받은 자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동안 선지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영적인 무지와 교만과 불신으로 하나님의 품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라고 있는 제사장들은 모두가 돈에 눈이 어두워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나느뇨” 하는 바로 왕의 물음에 모두가 “예,예, 유대 베들레헴이지요”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호해야 될 이들이 그리스도를 잡히도록 하는데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세례 요한은 유대 광야에 나타나 엘리야의 심령과 엘리야의 능력으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은 자기 죄를 애통하며 회개하고, 자복하며 세례를 받으므로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는 또한 안락과 사치를 즐기는 제사장들과 같이 세속에 물든 사람이 아니였습니다. 그도 제사장의 외아들로 얼마든지 안정된 생활 속에서 부드러운 옷을 입고 호화 호식하며 안락한 개인의 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그는 유대 광야에서 입는 옷이란 약대의 껍질을 걸치고, 먹는 것이란 날아다니는 메뚜기를 잡아서 구워 먹고, 집벌들이 날아와서 야생벌이 되어 바위 끝이나 나무통 속에 굴을 쳐 놓은 것을 취해 뜯어먹고 살았습니다. 이 석청이 흔하다거나 많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는 경건하고 청빈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오직 사명만을 위해 살아갔으므로 선지자 중에 선지자라고 예수님이 첫칭찬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사명이 분명하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젊은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지혜자가 이렇게 묻습니다. “학생은 공부를 왜 열심히 하는가”하고 묻자,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요”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럼 좋은 대학에 가면 뭘 하는가”하고 다시 묻자 대답하기를 “좋은 대학에 가서 공부를 많이 하고 돈을 많이 벌어 좋은데 장가 가려구요” 합니다. 지혜자가 다시 묻습니다. “좋은데 장가가면 다음에는 뭘 어떻게 하는가” 하자 그 학생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어떻하긴 어떻합니까! 머리 좋은 자식 낳아야지요.그 다음은 자식 키워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보내고, 그 다음엔 중년 신사가 되겠지요, 그 다음엔 손자 보며 서서히 늙어 가겠지요, 뭐 ” 지혜자가 다시 묻습니다. “그 다음엔” “그 다음은 죽지요!” 라고 대답을 하였답니다.
이 사람은 죽기 위해 공부를 하고, 죽기 위해 자라고, 죽기 위해 먹고, 죽기 위해 장가가고, 죽기 위해 자식 낳고, 죽기 위해 돈을 벌고, 죽기 위해 나이를 먹어 가는 겁니다. 이는 죽기 위해 태어난 인생입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안에서 새 삶으로 바꾸어진 자는 먹는 것도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먹고, 자는 것도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자고, 돈을 버는 것도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돈 벌고, 먹어서 건강하게 하는 것도 주의 일을 하기 위해 건강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가를 가는 것도 주의 일을 하기 위해서 하고, 늙어 가는 것도 주의 영광을 위해 늙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므로 주 이름을 위하여 사는, 주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사는 사명자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2) 둘째,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보낸 제자들이 돌아 간 후에 부리에게 세례 요한을 칭찬하시기를 세례 요한은 내 사자(使者)라고 27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성경에 예언된 선지자입니다. “내가 내 사자를 내 앞에 보내노니”
다른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언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위해서 직접 보내신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 Messenger였습니다. 세례 요한에 대하여 말라기 3:1절에 메시야의 사자(使者)로 예언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태로 부터 성령이 충만함을 입어 탄생하였습니다.(1:11-20) 이러한 탄생은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키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라고 메시야의 출현을 선포하고, 죄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며(1:76-77, 마3:2)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무대 위에 그 모습을 들어낼 때는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할 자라”고 하며 그리스도를 한껏 높이고 “그는 흥하여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며 겸손히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은 “그가 참 내 사자(使者)다”고 하셨습니다.
3) 셋째, 요한이 보낸 사자들이 돌아간 뒤에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자랑하기를 그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자다(28)라고 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을 칭찬하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위대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여자가 낳은 자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난 자연인을 가리킵니다. 어디까지나 육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세례를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죄를 지고간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님을 믿고 주홍같이 붉은 모든 죄를 사함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계시며,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하나하나 변화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날로 날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서 합당한 생활을 배워가고 있습니다.(딛3:5) 우리는 이 땅위에서 이 모든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행복이며 축복입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0:23-24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처럼 우리는 선지자와 임금들이 보고, 듣고자 한 이 진리를 얼마든지 보고, 듣고 싶으면 듣고, 그 축복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복되고 큰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복된 기회를 복되게 하실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Ⅲ. 악한 세대를 책망하신 예수님(29-35)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요한의 세례는 죄를 회개하고, 회개한 표로 받는 것이겠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①세례도 받지 아니하고 ②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자기의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는 결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더 큰 죄악임을 깨우쳐 주시며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이 시대 사람을 유흥에 참여치 않는 어린아이들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아이들은 두 패로 나뉘어서 장터에 앉아 놀이를 하는데 한쪽에서 피리를 불면 그 피리 소리에 맞추어 다른 편 아이들이 춤을 춥니다. 또 한쪽에서 애곡을 하면 저쪽에서는 울어야 합니다. 그래야 재미가 나고 흥이 생깁니다. 그러나 장터의 이들은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이 세대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고 무감각함을 비유하신 말씀입니다. 실제로 세례 요한이 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으나 슬퍼하거나 애통하거나 하지 않고 죄를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기쁜 복음을 전해도 기뻐하거나 즐거워함도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니 귀신이 들렸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은 오셔서 먹고 마시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고 헐뜯기만 하는 겁니다. 이래도 헐뜯고 저래도 헐뜯는 이 시대가 그 옛날 장터에 앉아 노는 아이들과 같이 영적인 세계에 무감각하고 완악해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옳다함을 얻느니라 하였습니다.
여기 “지혜”란 그리스도 자신을 뜻하며(고전1:24,30) “자기의 모든 자녀란” 지혜를 듣고 행하고, 의지하는 자는 옳다, 순종해 본 자는 그렇다 하므로 무감각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면 그것이 옳다라고 체험하는 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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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 26.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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