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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다를 잠잠케 하신 예수님 (눅 08: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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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난 시간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받아 드리는 자세가 어떠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풍랑이 이는 바다를 말씀으로 잔잔케 하시고 고난 중에 있는 제자들을 건지시는 예수께서 현재도 풍랑이 이는 이곳에서도 잔잔케 해 주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Ⅰ. 풍랑이 이는 갈릴리 바다(22-23)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하셨습니다. 이 호수는 갈릴리 호수로서 남북의 길이가 약 50리(약20.8km)이고 폭이 40리(약1

2.8km)로 대단히 큰, 엄청난 호수이기 때문에 보통 갈릴리 바다라 부릅니다.
예수님은 이 바다 건너 조용하고 한적한 가버나움 맞은 편 뵈뢰아로 가서 쉬쉴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이 바다를 건너가고자 제안을 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물이 유리알처럼 맑고 푸르며 고기가 대단히 많은 호수입니다. 주위에는 높은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 쌓여 있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이 때는 해가 지고 저녁 노을이 일 때입니다. 해는 서산에 넘어가고 붉은 저녁 노을이 잔잔한 물결에 부셔졌을 것입니다. 제자들 중에는 상당히 많은 제자들이 이 바다에서 자라고 여기서 생계를 이어왔으므로 이 바다에 대한 것에는 자신이 있어서 아마 팔을 걷어 젖히고 휘파람을 불며 신나게 노 저어 이 바다를 건너고 있습니다. 배는 순풍에 돛을 단 듯이 바다 위를 미끄러져 갔습니다. 이렇게 “행선 할 때 예수님은 잠이 드셨더니”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하루는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사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자 하셨으나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포함해서 여러 비유를 들어 말씀을 하시던 날 저녁이었다고(막4:25) 밝히고 있습니다.
만약 그날 저녁이었다면 ①예수께서 각 성과 촌(村)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8:1) ②또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고(2) ③씨뿌리는 자의 비유(4-9) ④또 그 씨뿌리는 자의 해석(9-15) ⑤그리고 등불 비유(16-17) ⑥또 예수님을 찾아 온 모친과 동생들을 돌려보내는(18-21)... 이런 일들을 하시느라 하루해가 다 가고 피곤 하셔서 바다를 건너 한적한 곳에 가셔서 쉬고자 했는데 채 바다를 건너기도 전에 잠에 골아 떨어졌습니다.
큰 풍랑이 일어서 배가 흔들리고 배는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하였고 파도가 배에 부딪히므로 예수님의 얼굴에도 물이 뿌려졌을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피곤한 탓에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루종일 하나님의 나라를 각 성과 촌에 선포하시고 뙤약볕 아래서 혼신을 다해 말씀을 가르치시느라 매우 피곤하셨던 것 같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쳐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 하신 예수님에겐 이 시간이 가장 유일한 휴식 시간이었습니다. 일정한 주거지가 없던 주님은 도처에서 편안히 처소를 가지신 것이겠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수면이 해면보다 213m나 낮고 호수 주위에 높은 산들로 둘러 쌓여 있습니다. 또 북쪽에는 사시사철 흰눈으로 덮여 있는 힐몬산이 있습니다. 또 골란 산맥이 둘러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골란 산맥의 깊은 골에서 내려오는 한냉 기류와 호수 유역 남쪽 요단 계곡으로 불어오는 사막의 열풍이 맞닿는 날에는 무서운 돌풍을 일으킵니다. 이 돌풍이 불면 바다는 삽시간에 큰 폭풍이 일어 배가 뒤집히고 사람의 생명을 잃게 됩니다.

제자들이 지금 이런 돌풍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이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 출신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바다의 풍랑의 경험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경험과 기술로 풍랑을 헤쳐 나가려고 몸부림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들의 모든 수고가 허사였습니다. 바람은 점점 더 일고 물결은 점점 더 사나워졌습니다. 그들의 존재는 풍전등화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바다에서는 “내노라”하던 자 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제 자기들의 능력과 성실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있습니다. 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쟁 할 때마다 백전백승 하였습니다. 그는 전쟁에 많은 경험이 있고 전쟁을 했다 하면 승리를 합니다. 그는 그 많은 전쟁의 경험을 토대로 전쟁하고 전술을 짤만도 한데 그런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사무엘상 23:1-5절에 보면 전쟁에 나갈 때마다 늘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전쟁을 할까요 올라가서 싸울까요 내가 올라가서 이불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그는 자기의 경험을 의지하거나 전적을 의지하지 않고, 전쟁에 나갈 때마다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고 나가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므로 늘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여기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이제까지 자기 경험을 의지하고, 자기들의 기술을 의지하느라 예수님을 깨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파도 소리, 물방울이 얼굴에 떨어져도 어떤 파리가 달려드느냐며 훔치시고는 또 주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곤하셔서 깊은 잠이 드셨습니다. 그러나 그 귀는 항상 열어 놓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기도 소리에 항상 깨어 계십니다.(아5;2)

나를 지키시는 이는 나의 잊음이 되지 않으십니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십니다.(시121:2-7)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했습니다.
요사이는 그런 어머니를 보기가 힘이 듭니다만,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일에 지친 어머니들은 앉아서 졸아요. 졸다가도 아기가 칭얼대면 앞가슴을 열고는 젖꼭지를 물리고 또 좁니다. 예수님께서 일찍 깨시지 않은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지 않는데 있습니다. 보채지 않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주는 교훈 몇 가지를 얻고자 합니다.
① 예수님이 하자고 하신 일에도 풍랑이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22절 하반 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자고 하시는 일에도 사단의 시험이 있고 바람이 일고 물결이 휘몰아쳐 온다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이 타신 배에도 광풍이 밀어 닥치고, 배에 물이 가득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섬기고 하나님을 믿어도 역시 환난도 오고, 병도 오고, 질고도 오고, 우환도 닥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타신 배에도 풍랑이 일고, 배에 물이 들어왔다면 예수님을 모신 우리 가정에도 풍랑이 일고, 물이 들어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교회에도, 예수님을 모신 목사, 장로, 집사, 교인들의 집에도 풍랑이 일고 물이 들어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③ 그러나 그리스도 인에게는 이런 노도 같은 풍랑이 일 때, 믿지 않는 자와 다른 것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예수님을 깨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풍랑이 이는 것은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라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를 무시하면 큰 위험을 당합니다. 풍랑을 다같이 만나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이게 기도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가정에 풍랑이 일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있는데 어려운 시험이나 풍랑이 일지 않습니까 그것은 기도하라는 신호입니다.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가면 벌금을 내거나 큰 사고를 만납니다.
얼마 전에 자동차를 몰고 가는데 분명히 파란 불이어서 출발했더니 중간쯤 가니 노란 불로 바뀌고 다 건너가니까 빨간 불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저 건너편에서 교통순경이 호루라기를 불며 세우는 것입니다. 신호 위반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만원의 스티커를 받았습니다.
기도하라는 신호를 위반하면 나가지 않을 돈이 나갑니다. 그냥 신호를 위반하고 가면 부딪혀 죽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변화산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세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지만 아홉 제자는 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 때 어떤 아버지가 귀신 들려 간질 하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제자들에게 고쳐 달라고 합니다. 제자들이 아무리 고쳐 봐도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이 귀신아 나가라” 해도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전에는 되었는데 지금은 되질 않습니다. 서기관들과 무리들은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제자들은 아무리 해봐도 되질 않으니까 어쩔 줄을 모르고 쩔쩔매고 있을 때, 마침 예수님이 기도를 마치시고 내려 오셨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예수님께 쫓아가서 “선생님,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고 하였으나 능히 못하더이다 할 수 있거든 이 아들을 고쳐 주시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고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니 귀신이 경련을 일으키고 나갔습니다. 후일에 집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기를 “그때 우리는 왜 고치지를 못했습니까” 하고 궁금해 하니 예수님의 대답이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하셨습니다.
어려운 풍랑이 일어나는 것은 기도하라는 신호요, 기도하면 주께서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헛돈이 나가고 위험이 따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광풍이 밀어 닥치고 배에 물이 가득하게 들어오고, 위험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 나아 와서 깨우며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해 볼대로 다 해보다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어떤 분은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인간의 방법대로 해 볼대로 다 해보고 되면 되고, 안되면 안되는 식으로 맨 끝에 가서 매달리는데 이게 얼마나 불신앙의 소행입니까
제자들은 자기들의 기술과 경험을 총동원해서 살아남고자 안간힘을 쓰고 몸부림을 쳤습니다. 베드로는 억센 팔뚝으로 키를 잡고 비상 대책을 발표하며 진두 지휘를 했을 것입니다. 안드레는 원래 부지런하니까 배에 물을 빼내고 퍼냈을 것입니다. 그 와중에 빌립은 배에 들어온 물을 재며 벌벌 떨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리 쏠리고 저리 몰리고, 배의 기구들은 이리 미끌어 지고 저리 구르고, 아마 제자들은 멀미도 했을 것입니다. 죽을 지경이 됐을 때,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만큼 예수님을 늦게 깨우면 늦게 깨우는 만큼 애를 먹고 손해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기도하고 묻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되는 줄 믿습니다. 기도는 일찍, 미리미리 하는 것 만큼 덕이 됩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모시고 인생을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때때로 광풍이 몰아닥칩니다. 광풍이 몰아치면 사람들은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 해결해 보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계 상황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자포자기 합니다. 이때야말로 예수님을 깨워야 할 때요, 부르짖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때입니다. 이 때가 가장 예수님의 능력을 덧입을 때입니다.

Ⅱ.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24-25)

예수님께서 잠을 깨서 어떻게 하셨습니까1)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24)
마치 귀신 들린 사람을 꾸짖음같이 꾸짖으셨습니다. 마가복음 4:39절에 예수님은 잠에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 하라 하셨습니다. 어느 인격체를 꾸짖고 명하듯이 하셨습니다. 마치 바다가 말을 많이 하는 것처럼 사단이 풍랑 뒤에서 떠들어대니까 그것을 보시고 <잠잠 하라>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4:35절에 귀신이 들여 예수를 알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는 귀신을 꾸짖어 사람에게서 나오게 하시고
4:39절에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이 들었을 때, 그 병을 꾸짖어 고쳐 주시었습니다.
또, 4:41절 많은 귀신 들린 자들을 꾸짖어 내쫓아 주셨습니다.
2) 두번째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25)
2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풍랑을 꾸짖어 잔잔케 하신 후에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셨습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누가 복음에서 만도 대충 큰 것만 몇군데 살펴보아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기에 넉넉합니다.
① 5:1-11절 제자들이 밤새껏 고기를 잡았으나 한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은 그물 이 찢어지게, 두 배가 잠길 정도로 고기를 잡게 하셨습니다.
② 5:12-16절 문둥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③ 5:17-27절 중풍 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④ 7:1-10절 백부장의 종을 고쳐 주셨습니다.
⑤ 7:11-17절 과부의 죽은 외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⑥ 7:36-50절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런 이적 기사를 보았으면 믿기에 넉넉하고, 두려워 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이런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도 믿지 못하고 풍랑이 인다고 어쩔 줄을 몰라 하니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죄 많은 여인의 죄를 사해 주시듯이 우리 죄를 사해 주시는 예수님이시요. 죽은 자를 살려 주시고, 불치병인 문둥 병과 중풍 병을 고쳐 주신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고기를 잡게 해 주시고, 풍랑이 이는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시는 창조주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 주님을 모시고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광풍이 일고, 폭풍이 몰아 칠 때도 있습니다. 이 때 주님을 찾고 주여! 주여! 부르짖어 구원함을 얻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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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7. 1

7. 주일 낮 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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